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78) 화약의 발명으로 왜구 격퇴에 지대한 공을 남긴 최무선(崔茂宣)

거북이3 2015. 4. 30. 16:37

 *4/18~4/29까지 서부 유럽을 다녀 오느라고, 블로그 관리를 못하였음. 오늘(4/30)부터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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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인물열전 (78)

                          화약의 발명으로 왜구 격퇴에 지대한 공을 남긴 최무선(崔茂宣)

                                                                     [大東野乘 第19卷 海東雜錄 1 崔茂宣 條]

                                                                                                                                                이 웅 재

  최무선(崔茂宣, 1325~1395년)은 여말, 선초의 무신이자 화약 발명가로, 본관은 영주(永州: 永川)이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행동이 민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어에도 능통하였다. 할아버지는 고려 후기 왕실의 족보를 편찬 정리하는 일을 맡은 관청인 종부시(宗簿寺)의 최고직인 판사(判事)였고, 아버지는 문무백관의 녹봉에 대한 수입, 지출을 관리하는 호조(戶曹) 소속의 관청인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으로 부유한 가정 출신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과 함께 궁궐에서 중국인이 만든 불꽃놀이를 보면서 화약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시작하였으며, 그러한 연고가 동기가 되어 고려 말기에 자주 우리나라를 노략질하던 왜구를 격퇴시키기 위하여 화약과 총을 만드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부터 화약과 화포(火砲)가 전래되기는 하였으나 화약의 제조에 필요한 염초(焰硝)를 얻지 못해 일본이나 중국에 염초를 의존해야만 했었는데, 그는 염초채취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에도 갔었지만, 화약 제조 기술은 당시 중국에서도 국가적 기밀이었으므로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원나라 상인 이항(李亢)이라는 사람이 염초장(焰硝匠)으로 일한 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예성강(禮成江) 하구에 있는 벽란도(碧瀾渡)로 찾아가서 집으로 모셔다 극진히 대접하면서 화약제조 방법을 배워 집안의 동복(童僕)들에게 그것을 익히도록 하여 실제로 실험을 해 본 후, 왜적의 약탈을 물리칠 방안으로 화통도감(火筒都監) 설치하도록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화통은 화포, 총통이라고도 하는데, 쇠를 녹여 포신을 만들어 뒷부분에는 화약을, 앞부분에는 탄환이나 화약봉지를 단 쇠화살을 넣은 다음, 뒤쪽 뚫린 구멍으로 심지에 불을 붙여서 화약이 폭발하도록 하여 그 힘으로 탄환이나 화살이 나가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화통도감이 설치되자 그 제조(提調)가 되어 화기발사의 전문부대로 보이는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을 편성하여, 1380년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으로 금강(錦江) 하구의 진포(鎭浦)로 쳐들어 와서 서천(舒川)과 금강(錦江) 어구에까지 올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할 때에는 고려군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都元首) 심덕부(沈德符)와 상원수(上元首) 나세(羅世) 등과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격파하기도 하였다. 이 싸움은 고려 해군이 화약 무기를 이용하여 왜군을 무찌른 최초의 해상 함포대전이었다. 이후에도 그가 발명한 화약 병기의 사용으로 왜구의 침입이 대폭 줄어들었을 정도로 그가 발명한 화약 병기의 사용은 왜구 격퇴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왜구와의 해전 승리로 고려 조정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 정벌 정책을 펼쳤으며 그는 대마도 정벌에도 참전하여 로 끌려간 백여 명의 고려인을 구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李成桂) 등이 세력을 잡게 되자 그는 이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따라서 그는 새로운 정치 세력 층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약무기의 보급으로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까 걱정한 조준(趙浚) 등에 의하여, 왜구 침입이 줄어들어 더 이상 무기 제조가 필요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화통도감군기시(軍器寺)에 통합되어 버리는 등의 사태로 그의 화약 제조 연구는 중단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최무선의 공적은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못하여 그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면서 그간의 연구 결과들을 책으로 만들어서 아들 최해산(崔海山)에게 전하였다.

  최무선의 발명품 중에는 수레에 화기를 장착한 병기인 주화(走火)라는 것도 있었으며 여러 종류의 화기 등을 실을 수 있는 전함(戰艦)의 건조에도 힘써, 대량 장비도 실을 수 있는 누선(樓船)이라는 군함개발하기도 하였다. 뒤에 조선 태종 때에는 그의 기술을 계승한 아들 최해산이 군기시 소감(軍器侍少監)으로 중용되면서 다시 화기의 발달이 이루어져 세종 때에는 다중 로켓 발사기와 비슷한 발사 장치인 신기전(神機箭)이 개발되기도 한다. 이후 손자 최공손(崔功孫)까지 화약무기를 연구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볼 수 있는 3대에 걸쳐 화약무기를 연구한 집안이 되었다.

  사후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겸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화약수련법(火藥修練法)』과 『화포법(火砲法)』을 남겼으나 실전되었다. 북한 개성의 고려박물관에 금강 진포대첩의 명장 최무선 장군관이 있으며, 그의 무덤은 개성 교외에 있다고 전한다. (2015.4.30. 원고지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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