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문화 체험기 1. ‘달님은 본시 술 마실 줄 모르니’.hwp
(서유럽 문화 체험기 1)
‘달님은 본시 술 마실 줄 모르니’
이 웅 재
4/18 (토) 쾌청.
나는 오늘 10박 12일 여정의 서부유럽 문화 체험을 떠난다. ‘떠난다’는 말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 제일 먼저, 그 말에는 지금까지 함께하던 사람이나 사물들과 ‘관계를 끊음’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그 물건이 그 물건 같고 그날이 그날 같았던, 그래서 늘 관습이 되어 버렸던 모든 일들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것, 그것은 나 혼자 ‘새로 섬’, 그래서 나 자신의 ‘새로운 능력을 시험해 본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벗어남’과 함께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란 대체로 ‘반복’의 연속이다. 늘 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지겨움’을 수반하는 일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 것이랴!
‘떠난다’는 말에는,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미지의 세계로 출발한다, 곧 ‘시작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새로운 출발에는 늘 ‘다짐’이 뒤따른다. 어떤 목표를 세웠든 간에 그것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 그것은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에 활력소를 주는 일이 아닐 것이랴!
그래서 ‘떠난다’는 말에는, ‘달라짐’에 대한 ‘예단(豫斷)’을 준비하는 설렘이 준비되어 있기도 하다. ‘달라짐’, 아무리 작은 달라짐이라도 그것이 모이고 쌓이면 ‘우공이산(愚公移山)’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다. 때에 따라서는 그 ‘달라짐’이란 것이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에 나오는 ‘깊은 산 속의 굴’ 속에서 온갖 노력을 다하여 벗어나왔을 때 ‘자연의 태양 광선을 감당해 낼 수가 없’어서 ‘소경이 되어 버린’ 토끼의 신세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일이 아닐까 싶다.
왜? 무엇보다도 ‘떠남’은 ‘만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물,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떠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 새로운 만남을 위해서 얼마나 벅찬 ‘설렘’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랴! 만남은 또한 새로운 느낌을 창출하고, 그 새로운 느낌은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만남은 무한한 ‘기쁨’이기도 하 다.
신나게 떠나서 기쁘게 만남을 이루게 하여 주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공항버스는 막히는 일 하나 없이 신나게 달렸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에서 나는 내 ‘짝’을 찾기 위해서 탑승 수속을 마치자마자 제일 먼저 면세점엘 들렀다. 그리곤 곧장 주류 매장을 찾아가 예쁜 아가씨에게 말했다.
“소주 급 가격의 양주 한 병만 주세요.”
아가씨는 한 동안 말이 없더니 12초 정도쯤 지나자 말한다. 그 시간이라면 권총을 들고 나를 끌고 가던 적군에게서라도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잽싼 총잡이라도 권총을 빼어서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기까지에는 10초 정도의 시간은 지나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일단 나는 살았다.
“짐빔(Jim Beam)이 좋겠네요.”
미국에서 1933년 금주령이 해제되면서 Jim Beam이 처음 생산한 이 술은, 말하자면 미국의 소주라고 할 수 있는 술인데, 나는 40% 700ml 한 병을 거금 18,500원을 주고 샀다. 사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200mm짜리 진로 소주 포켓형 10개가 이미 여행용 백 속에 얌전하게 들어 있었지만, 짐을 꾸릴 때 10병 이상을 챙겨 넣기가 아내 보기에 좀 민망스러워서 10개로 마감을 하고서는 이러한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지난 번 미국‧캐나다 여행 때에도 비슷한 방법으로 SCOTCH WHISKY ‘CUTTY SARK’ 40%짜리 750ml 1병을 15$를 주고 샀었다. 그 술은 우리가 가난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미국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면서 만찬주로 사용했다던 술이었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새로운 만남에는 그 만남을 귀하게 만들어주고 정감이 넘치도록 만들어주는 ‘인류의 적(敵)’인 술이 함께해야 제 격이 아니던가?
그렇다. 무전천지(無錢天地)에는 소영웅(少英雄)이요, 유주강산(有酒江山)에는 다호걸(多豪傑)이렷다? 그런데 누구하고 마신다? 이번 여행 자체를 ‘덩달이’로 따라 나선 형편이기도 하지만, ‘울 마님’께선 밀밭 근처에만 가도 취하는 사람이니 더불어 마실 수가 없는 처지, 하지만, 뭐 그런 일쯤이야 대수일 것이랴!
주선(酒仙) 이태백(李太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흉내 낸들 누가 무어라 할 것인가?
“獨酌無相親이라(벗 없이 혼자 술을 마신다.)
擧盃邀明月하니(술잔 들어 밝은 달님 맞이하고)
對影成三人이라(그림자까지 대하고 보니 나를 포함해 모두가 셋이로구나.)
月旣不解飮하고(달님은 본시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이라(단지 그림자만 나를 따르는구나.)”
혼자 마시면 쓸쓸하고, 둘이 마시면 경쟁을 하게 되고, 셋이 마시는 것이 ‘딱’일 터이니, 감히 주선을 모방하여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서 마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리라. 게다가 ‘달님은 본시 술 마실 줄 모르’니 그 얼마나 좋은가? 그림자도 흉내만 낼 뿐 한 방울의 술도 축낼 일은 없으니 오롯이 ‘인류의 적(敵)’을 ‘마셔서 없앨’ 사람은 나 혼자뿐이 아니겠는가? 이 얼마나 ‘유쾌 뻑적지근한’ 일일 것이랴, 얼쑤! (15.8.6.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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