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85) 임금이 하사한 은 술잔을 늘여서 술을 마셨던 손순효(孫舜孝).hwp
경북 인물열전 (85)
임금이 하사한 은 술잔을 늘여서 술을 마셨던 손순효(孫舜孝)
[大東野乘 第19卷 海東雜錄 1 孫舜孝 條]
이 웅 재
손순효(孫舜孝:1427[세종 9]~1497[연산군 3])는 조선 전기 성종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해(平海), 자(字)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 칠휴거사(七休居士)이다. 증조부는 증 가선대부 형조참판 손영(孫永), 조부는 증 정헌대부 병조판서 손유례(孫有禮), 아버지는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군수 손밀(孫密)이며, 어머니는 정선군사(旌善郡事) 횡성 조씨 조온보(趙溫寶)의 딸이요, 부인은 평산 신씨 신자의(申子儀)의 딸이다.
출생지는 충주시 산척면(山尺面) 원월리(院月里)이다.
나이 10세 무렵, 어머니가 병이 들어 누워서 살구를 맛보고 싶어하였는데, 살구나무 밑에 가서 하늘을 우러러 절하며 기도하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살구가 바람도 없이 저절로 떨어지거늘, 주워서 달려가 어머니에게 바쳤다.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1451년(문종 1) 생원시 장원, 1453년(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1457년(세조 3)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성품은 소탈하고 호탕하여서 세상일에 간략하며, 스스로 칠휴거사(七休居士)라 호(號)하였다. 칠휴란 삼휴와 사휴를 합친 것인데, 세 가지 쉼[三休]이란 당(唐) 나라 사공도(司空圖)의 「휴휴정기(休休亭記)」에서 말한 것으로, 재주를 헤아려 보아 쉬는 것, 분수를 헤아려 보아 쉬는 것, 늙고 귀먹으면 쉬는 것이고, 네 가지 쉼[四休]이란 송(宋)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사휴거사시서(四休居士詩序)」에서 말한 것으로, 허술한 음식으로라도 배부르면 쉬고, 뚫어진 데를 기워 따사로우면 쉬고, 세 가지는 보통이고 두 가지는 만족해서[三平二滿] 지나치면 쉬고, 탐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아 늙으면 쉬는 것이 그것이다.
문명(文名)이 뛰어났고, 더욱 경학에 정통하였다. 항상 방 한 칸을 깨끗이 청소하여 기기도(攲器圖: 기기는 周代에 임금을 경계하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그릇. 텅 비면 기울어지고, 물을 가득 채우면 엎어지나, 8분쯤 알맞게 물을 채우면 반듯이 놓인다 함)를 걸어 놓고 드나들며 보고 반성하였다. 성리학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아 성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1470년(성종1) 성종이 즉위하자, 다음해 시정(時政)에 관한 17조목(條目)을 상소하였는데, 성종이 이를 가납(嘉納)하고 특별히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 형조참의에 임명하였다. 그해 『세조실록(世祖實錄)』수찬관(修撰官)에 임명되어, 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472년 상호군(上護軍)으로 전임되자, 남산(南山) 밑에 초당(草堂)을 짓고 연못을 파고는 연꽃을 심어 놓고 날마다 후학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으로 삼기도 하였다.
1475년 부제학을 거쳐 부승지, 좌승지를 지내고, 1478년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고,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면서 성종이 중궁(中宮) 윤씨(尹氏)를 폐비(廢妃)시킬 때에는 후환을 경고하고 극력 이에 반대하였다.
1480년에는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때마침 중국과 서쪽 오랑캐[西戒]와의 전쟁으로 길이 막혀 있었으나, 길을 떠나기에 임하여 말하기를, “남의 신하로서 사명을 받았을 때에는 집안일을 잊는다.” 하며, 처자도 보지 않고 떠났다고 한다.
1485년(성종 16)에는 임사홍(任士洪)을 두둔하다 왕의 미움을 사서 경상도 관찰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를 보면, 그가 경상도 관찰사로 가서 순시하다가 영천(永川) 땅을 지날 때였다. 말 위에서 졸음에 취하여 눈을 감고 포은(圃隱)의 사당이 있는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갔다. 꿈속에 수염과 머리털이 허연 한 노옹이 나타나더니, 스스로 포은이라 하며 이르기를, “거처하는 데가 헐고 황폐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한다.” 하면서, 부탁하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다. 그가 놀라 이상히 여기고 나이 많은 늙은이에게 물어 그 옛터를 찾아서 군(郡)을 독려하여 사당을 새로 짓게 하고, 사당이 완성되자 몸소 제사를 올리고 글을 지어 벽에다 써 붙이기도 하였다.
그는 술을 좋아하여 과음하는 일이 많았다. 성종이 유독 그를 아꼈으나 과음하는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작은 은 술잔을 만들어 주며, “이 잔으로 하루에 한 잔씩만 마시라.”고 명했다. 손순효에게 그 술잔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그래서 그는 그 은잔을 얇게 두드려 잔을 크게 만들어서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그에게 임금이 자문(咨文)을 지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그는 맡겨만 달라고 하더니, 순식간에 글을 지어 올렸는데 글자의 획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으며 문장도 명문이었다. 성종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경은 취한 정신이 깬 정신보다 나은가 보구려! 하지만 짐과의 약조는 왜 어겼는고?” 하고 물으니, 이에 전말을 밝혔다. 성종이 웃으며 “앞으로 나의 소견도 경이 간언하여 은잔처럼 넓게 해주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에도 “내가 죽으면 비석을 세울 생각 말고 평생 좋아하던 소주 한 병만 곁에 묻어 달라”고 말했다 한다.
저서로는『식료찬요(食療撰要)』,『물재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충주시 산척면(山尺面) 송강리(松江里) 404에 있고, 경북 울진군 기성면(箕城面) 구산리(邱山里)에 있는 운암서원(雲巖書院)에 배향되었다. (15.11.8.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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