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83) 사궤(食饋)의 효시를 있게 한 윤상(尹祥)

거북이3 2015. 11. 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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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인물열전 (83)

          사궤(食饋)의 효시를 있게 한 윤상(尹祥)

                                                               [大東野乘 第19卷 海東雜錄 1 尹祥 條]

                                                                                                                                                이 웅 재

  윤상(尹祥: 1373[공민왕 22]∼1455[단종 3])은 조선 초기의 학자요 문신으로 본관은 예천(醴泉), 초명은 윤철(尹哲),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이다.

  예천군의 향리(鄕吏)인 윤선(尹善)의 아들로 태어나서 과거를 통하여 양반신분으로 올랐다. 향리 역(役)에 종사하면서 퇴식(退食: 관청에서 나와 집에서 밥을 먹음)을 하는 사이에 관솔을 모아 불을 밝혀 밤늦게까지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은 조용(趙庸)이 1392년(태조 1)에 역성혁명을 반대하여 예천에 유배되어 오자, 조말생(趙末生)·배강(裵杠) 등과 함께 그의 문인이 되었는데, 그해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는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96년(태조 5) 2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교수관(敎授官)을 거쳐, 예조정랑 때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 가친이 연로하여 외직을 청하여 황간·영천(榮川)·대구 등지의 군사(郡事)를 맡은 뒤, 사성을 거쳐 대사성에 올랐다.

  세종 때 성균관에서 세자 문종과 세손 단종을 가르치기도 하는 등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문하에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김시습(金時習)도 그에게서 『주역』과 『예기』를 배웠다고 하며, 김종직(金宗直)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도 그에게서 배웠다. 그는 특히 경학(經學)에 밝았으며 문장에도 매우 능하였다.

  『조선왕조실록』문종 즉위년(1450년) 7월 8일(庚戌) 8번째 기사를 보면, 성균 생원 유상해(兪尙諧) 등이 윤상의 재 등용을 청하는 상서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신 등이 엎드려 금 7월 초6일 정비(政批: 임금이 내리던 批答)를 보니,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을 파직하였는데, 신 등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하여 분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상언(上言)합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인재는 국가의 이기(利器)요, 사유(師儒)는 사람을 만드는 모범(模範)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나라가 성할 때에는 사유(師儒)를 중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조정이 개국한 이래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가면서 사부(師傅)를 존중하고, 교화를 숭상하고, 어진이를 장려하고, 힘써 참된 유학자를 얻어 사부의 반(班)에 앉게 하여 인재 양성의 효과와 풍교(風敎)의 아름다움이 당우(唐虞: 堯임금·舜임금 시대) ·삼대(三代: 夏·殷·周 시대) 에 비할 만큼 융성합니다. 윤상(尹祥)은 성품이 온량(溫良)하고, 조행(操行)이 청렴하여 결백하고, 학문이 정미(精微)하고, 문사(文詞)가 우아하고 건실하며, 손은 책장 넘기는 것을 멈추지 않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재주 있는 자가 있으면 유도(誘導) 권장하여 더욱 진보하게 하고, 재주 없는 자는 반복하여 가르치고 깨우쳐서 통달시키고 맙니다. 무릇 조정에 포열(布列)한 문학하는 선비로서 누가 윤상의 지도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 사람의 국가에 유익한 것이 참으로 작지 않습니다. 또 비록 연로(年老)하였으나 기력이 강건하고, 총명이 감하지 아니하였으며, 언행 동정(動靜)이 모두 사범(師範)이 될 만합니다. 지난 날 세종(世宗) 때에 늙었다고 사직하는 것을 윤허하지 아니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어짊을 분명히 알고 영구히 사표(師表)로 삼자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 등이 어찌 오늘에 도리어 그 직을 파면할 것을 생각하였겠습니까? 쓰고 버리는 것은 진실로 이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으나, 국가의 어진 이를 임용하는 뜻에 어찌 결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실망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특별히 산관(散官)에 두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다시 함장(函丈: 스승) 사이에 돌아오게 하시면 신 등의 다행이요, 국가의 다행입니다.”

하였다. 정부(政府)에 내리어 의논하게 하니, 정부에서 아뢰기를,

  “윤상(尹祥)의 나이 70이 넘었으니, 관례상 마땅히 물러가 쉬어야 합니다. 그대로 파(罷)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상(尹祥)은 예천군(醴泉郡)의 아전으로 처음에 열심히 글을 읽었으며, 비록 이역(吏役)에 분주하여도 조금도 학업을 폐하지 않았으며, 학문이 정미하고, 이학(理學)을 잘하였는데, 더욱 주역(周易)에 정(精)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경학(經學)으로 소문이 나서 오래 성균관(成均館)에 임명되어 여러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조금도 권태한 빛이 없어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일찍이 나이 70을 지났으므로 치사(致仕)하였으나, 세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나이 늙었으므로 면직하였다. 나이 78세였으나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모두 그의 가는 것을 아깝게 여겼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왕이 사궤(食饋: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음식물)를 내렸다. 이 제도는 오랫동안 국가를 위해 봉사한 늙은 신하를 위로하기 위한 것인데, 바로 이때가 효시였다. 예천(醴泉)에 퇴거하여 제자를 교수하니, 남방의 배우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사석(師席)에 앉은 선비로는 당시에 으뜸이었다. 귀향 후 3년여 만에 83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불천위 사당인 윤별동묘가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眉湖里)에 있고 근처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최근(1920년)에 건립한 청심대(淸心臺)가 있기도 하다.

  저서로는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서문을 쓴『별동집』이 있다. (15.11.1.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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