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문화 체험기 20. 입천장을 데면서 먹는 컵라면 맛, 그 맛을 ‘느그들이 알아’.hwp
(서유럽 문화 체험기 20)
입천장을 데면서 먹는 컵라면 맛, 그 맛을 ‘느그들이 알아?’
이 웅 재
4/22 (수) 맑음.
기차가 예상 외로 연착을 하는 바람에 호텔 도착은 밤 12시가 넘었다. 피곤하긴 하였지만, 이젠 프랑스의 때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스위스를 대하려고 샤워를 하였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이곳의 물은 석회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샤워 실 바닥으로 물이 잘 빠져 나가질 않는 것이었다. 샤워용 수도꼭지를 틀었다 껐다를 여러 번 반복하고서야 겨우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서둘러 잠을 자고 5:30쯤 기상하여 아침 식사용 도시락으로 샌드위치를 받아 휴대하고서 융프라우요흐로 가는 산악열차를 탔다. 왕복 각각 2시간 반쯤 걸린단다. 3,400여 m의 고지대라서 어지럼증을 느끼게 되는 사람도 생길 수 있지만, 10여 분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란다. 단, 저혈압 환자의 경우에는 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고혈압이니 해당 사항이 없어서 룰루랄라였다.
가차는 헐떡거리면서 산길을 기어오른다. 군데군데 비탈진 곳에 펼쳐지는 푸른 초원이 멀리 보이는 설산(雪山)과 대비가 되어 더욱 신선해 보인다. 산 중턱쯤 오르다가 그림 같은 마을 그린델발트(Grindelwald)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거대한 숲’이라는 뜻이라는데, ‘거대한’ 느낌보다는 ‘아기자기한’ 느낌이 드는 마을이었다. 푸른 초원은 목초(牧草)의 산지였고, 건초는 스위스 산(産)이 가장 비싸다고 했다. 스키어(skier)들에게는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여행지로서, 초록빛 경사지에 지붕이 뾰족뾰족한 알프스 풍의 목조 건물 샬레(chalet)가 눈길을 잡아끈다. 오두막 한 채의 가격은 보통 3~4억 정도라고 한다. 목축을 주업으로 하던 곳에 스키어들을 위한 자그마한 호텔이나 카페 등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고품격 여행객들이 몰려드는 관광지가 되었단다. 고품격이라고는 하지만 깜깜한 밤에 와서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 나오는 것밖에는 다를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는데, 스키를 메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무척이나 활기찬 모습인 것을 보니 그렇지만은 않은 듯이 느껴졌다.
기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고도(高度)가 달라짐에 따라 풀꽃들의 모양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가 하면 때로는 시원한 눈밭이 펼쳐지다 보니,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저 멀리 전망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좌측 아래가 노스페이스(North Face)란다. 요즈음은 유명 등산복 브랜드로 이름이 나 있지만, 원래는 알프스 산맥 중 가장 큰 아이거(Eiger) 산의 북벽을 가리키는 말로서, 클라이머(climber)들의 공동묘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산에 거대한 괴물이 살면서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보이는 족족 잡아먹는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페이스(Face)는 90°에 가까운 절벽에만 붙이는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이름의 노스페이스를 입고 죽음의 직벽(直壁) 노스페이스를 정복하려고 안간힘들을 쓰고 있다.
드디어 9:09에 융프라우요흐 역에 도착하였는데 10:10까지 모이란다. 최근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핑크스전망대로 올라가 얼음궁전(Ice Palace)도 구경하고 밖으로 나가 설산(雪山)을 직접 밟아도 보았다. 그러나 4년 전 캐나다의 재스퍼(Jasper) 국립공원 근처에 있는, 북극권을 제외하고는 북반구 최대의 빙원이라는 컬럼비아 빙원(Columbia Icefield)을 찾아가서 설상차(雪上車)를 타고 만년설 폭포 앞에서 공중제비를 하면서 사진을 찍던 감격 때문인지, 설렘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어 방송’이 들릴 때라든가 융프라우철도 한국총판인 ‘동신항운’의 노란 안내지를 보았을 때에 더욱 감격스러움을 느꼈다.
아침 식사용 도시락으로 가지고 갔던 샌드위치는 전망대에 있는 기념품 등을 파는 가게에서 먹었다. 한국인들이 융프라우요후엘 가는 이유는 ‘컵라면’을 먹기 위해서라고들 한다. 차갑게 식은 샌드위치를 먹으려면 따끈한 국물이 필요한데, 외국 여행을 하는 한국인들에게 컵라면처럼 입맛에 착착 들어맞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그런데 값이 장난이 아니다. 거금 8,000원을 내어야지만 먹을 수가 있다. 아마도 전망대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사진 찍고 하다 보면 밥 먹을 시간이 별로 없다 보니,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주문을 하게 되어 판매하는 쪽에서도 미처 손 쓸 틈이 부족하여서 그런 모양이었다. 하기야 맏아들 놈은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인 몽블랑(Monte Bianco: 하얀 산)에서 25,000원을 주고 사 먹은 바도 있었다니까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런 저런 소문을 들었기에 미리 컵라면과 커피포트에다가 더운 물을 담아 가지고 갔던 때문에 거금 8,000원을 아낄 수가 있었다. 가이드는 내려가는 기차 시간에 늦으면 다음 번 기차를 타고 내려오시면 된다고 친절히 가르쳐주고 있었지만, 그럴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누구나 뜨거운 컵라면을 급하게 먹는다. 하긴 그렇게 먹는 맛이야말로 정말로 일품이었다. 멀고먼 이국 땅, 거기에 눈 덮인 산 정상에서, 입천장을 데면서 먹는 컵라면 맛, 그 맛을 ‘느그들이 알아?’
(16.2.18.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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