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생을 함께할 그대에게
이 웅 재
그대는 아주 조용히 내게로 다가왔다. 발소리도 없었다. 기침소리도 없었다. 얼마나 소리 없이 내게로 다가왔는지 나는 정말로 아무 낌새도 채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그대가 내게로 찾아온 줄을 모르고 지냈었다. 한 시간 두 시간도, 하루도 이틀도 아니었다. 근 일주일 동안이나 나는 그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대는 어쩌면 그토록 감쪽같이 나를 속이고 지낼 수가 있었는지?
나중 알고 보니, 그대가 나를 찾아오던 첫날, 나는 어깻죽지 근처가 뻐근한 느낌이 들어서 집 근처에 있는 한의원엘 찾아갔었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 컴퓨터와 너무 가까이 지냈던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 물리치료나 받고 침이라도 좀 맞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젊은 의사는 말했다.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그렇게 하루 종일 컴퓨터에만 매달려 계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목이나 허리 디스크라도 생기면 얼마나 고생스러운데요. 쉬엄쉬엄 하세요.”
옳거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 의사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기로 마음먹었고, 따라서 나는 갑자기 한가해졌다. 별로 보지 않던 TV도 열심히 틀어서 뉴스를 보고, 연속극을 보고, 개그콘서트도 보았다. 먹방하고도 친해졌고, 축구나 야구 게임도 재미있게 보았다. 그러다가 또 지루해지면 침대에 벌렁 누워 천정에 있는 벽지 무늬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기도 하였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을 때면, 그대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는지 슬그머니 찾아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체하였다. 왜 그렇게 그대를 그토록 냉대하였는지, 나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대는 나의 그러한 태도에도 내게서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나에게 집착하고 있는 듯했다. 처음엔 어쩌다 한 번씩 내게 관심을 보이는 척하더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나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한의원엘 다녔다. 의사가 물었다.
“조금 나아지셨나요?”
난감했다. 하지만 어쩌랴? 있는 대로 말을 해야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미안한 마음으로 대답하곤 했다.
“별로인데요.”
그러면서 나는 그대의 존재를 말해 버릴까 말까를 잠시 주저했다. 그러다가 곧 단념했다. 너무 내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컴퓨터와 너무 친해져서 생긴 문제인데, 엉뚱하게 그대와의 관계를 연계시켜서 나아질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조금씩 더 적극적인 대시를 하고 있었다. 나도 마냥 그대를 모르는 체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대는 참 솔직했다. 내가 아주 조금 그대에 대한 생각을 했을 뿐인데, 그대는 내게 보다 그대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시키려는 듯 내 어깨를 계속 툭툭 치면서 친밀감을 과시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대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질 않았다.
나이도 지긋해진 처지에, 한 번도 만나보질 못했던 그대를, 어느 날 갑자기 반갑게 맞아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대는 끈질겼다.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대의 행동은 어찌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이라도 돌면 어쩌나 하는 마음인 듯 정말로 조용하고도 은밀스럽게 행동을 하곤 했다. ‘소문이란 무섭지 아니한가? 그러니 우리, 좀더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만나요.’ 그대는 그런 마음을 굳힌 듯 아주 서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말했다.
“언젠가는 들통이 날 텐데….”
“들통이 날 땐 나더라도, 우리 둘만의 시간을 좀더 가지기로 해요.”
그대의 계속되는 투정에 나도 차츰 그대에게 경도되기 시작했다.
“그대여, 이제는 망설임 없이 내게로 오고 있는 거야?”
나의 이 말을 들은 그대는 좀더 적극적으로 나를 껴안았다.
“참아요, 참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모르게 우리끼리 재미있게 지내자구요.”
그대의 모처럼의 부탁인데 안 들어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대의 나에 대한 집착은 점점 그 도가 심해졌다. 처음에는 남몰래 나를 찾아오더니, 웬걸, 며칠이 지나고 나자 점차 남의 시선쯤은 무시하면서 내게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심하게 나를 다그쳤다.
“어때요? 나하고 평생 같이 살래요?”
“그대와?”
“그럼요,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당신을 평생 모실게요.”
섬뜩했다. ‘평생 모신다’고?
이튿날, 나는 차병원 피부과를 찾아갔다. 의사가 핀잔하는 투로 말했다.
“어쩜 그리 무식해요?”
“무식하다뇨?”
“일주일씩이나 고생하시면서 이제야 오셨으니 말이에요. 이제는 평생을 같이 사셔야 될 거예요.”
“평생을요?”
“그렇습니다. 대상포진(帶狀疱疹)은 처음 시작할 때 피부과로 오시면 금방 낫고 후유증도 없지만, 이렇게 일주일씩이나 지나고 나면, 평생을 함께 지낼 수밖에는 없게 된답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대상포진과 여생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래도 이제는 같이 지낸 시간이 적지 않아서인지, 한창 때의 그대처럼 내 좌반신(左半身)을 송곳으로 찌르듯 치가 떨리게 나를 닦달하지는 않아서 매우 다행스러웠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서로가 조금씩 상대를 이해해주고 양보해 가면서 살아간다면 그런대로 살 만한 세상이 되지는 않을까 싶다. (2016.8.25.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