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90) 위포(韋布)의 선비에게도 신발을 끌고 나아가 맞아들였던 김수녕(金壽寧)

거북이3 2016. 11. 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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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 제118호”.16.11.14.p.14.에 게재됨.


   경북 인물열전 (90)

      위포(韋布)의 선비에게도 신발을 끌고 나아가 맞아들였던 김수녕(金壽寧)

                    [大東野乘 第19卷 海東雜錄 2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21卷 慶州府 人物 條, 高麗史 列傳 條]

                                                                                                                                                  이 웅 재

   김수녕(金壽寧:1436년[세종 18]-1473년[성종 4])은 자(字)가 이수(頤臾)이고, 호(號)는 양소당(養素堂)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김익정(金益精)이요,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과 어머니 순흥 안씨 호조판서 안숭선(安崇善)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이다.

   1453년(단종 1) 18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을 제수받았다. 1455년(세조 1)에 집현전 수찬에 승진되어, 병조판서 이계전, 예문제학 박팽년, 예조참판 하위지, 직제학 강희안, 직집 이승소, 응교 서거정 등과 관제(官制)를 편찬하였다. 이어 병조 좌랑·헌납·예문관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7년(세조 3) 정월에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춘추관사 신숙주, 춘추관 편수관 이극감, 춘추관 기주관 한계희, 강희맹, 성임, 김지경과 더불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찬술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에는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로 있으면서 그를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1461년, 한명회가 그를 보내어 변방의 일을 아뢰었는데, 임금을 면대하여 말하는 것이 심히 자세하므로, 세조가 감탄하여 말하였다.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비록 천리를 격하였지만 한명회와 더불어 면대해 말하는 것과 같도다.”

   이듬해에는 세조가 경회루에 나아가서 예문관의 여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옛날의 제왕의 득실을 논란하게 하였는데, 그가 경사(經史)를 증거하면서 시비(是非)를 변석(辨析)하니 문득 말할 때마다 임금이 감동하여 들었고, 또 명하여 자급을 더하게 하였으며,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으나 일 때문에 파면당하기도 하였다. 1463년에는 집의, 이어서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당상관에 올랐으며, 1465년에는 좌승지가 되었다.

   1468년에는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周易口訣)』 간행에 참여기도 하였는가 하면, 관계(官階)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예종 즉위년에는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470년에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국조보감』에 의하면, 성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으니,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다음과 같은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학문을 하는 길은 배가 물에 뜬 것과 같사오니 날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로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조강(朝講)과 주강(晝講)에만 경연(經筵)에 나오시고 석강(夕講)에는 나오지 않으시니,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시려는 뜻이 아닐 듯합니다. 바라옵건대, 경연관으로 하여금 번갈아 숙직하게 하여 고문에 대비하도록 하소서.…

   높은 자리에 계시면 겸손할 것을 생각하시고, 가득 찼을 때에는 줄어들 것을 생각하시며, 즐거운 일을 만나면 씀씀이를 절약할 것을 생각하시고, 편안할 때에는 뒷날의 걱정을 생각하시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면 만족할 줄을 아시고, 장차 영선(營繕)하고 싶으면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며, 간신에게 총명이 가리워짐을 막으려면 바른 말을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시고, 참소와 간사함을 미워하려면 몸소 바르게 되기를 생각하시며, 벼슬을 상 주려 할 때에는 혹시 기쁜 나머지 지나치지 않는가를 생각하시고, 형벌을 줄 때에는 혹시 노한 김에 함부로 하지 않는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10가지 생각을 겸하여 행하기를 꾸준히 하시고, 지키기를 성신(誠信)으로써 하신다면 민심이 기뻐하고 천도(天道)가 순하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당장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져서 가정 대부로 승진하였는데, 1473년 어느날 저녁에 술을 심히 마시고 졸하니 나이 38세였으며, 슬하에는 1남 2녀를 두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그의 졸기(卒記) 일부를 보자.

   복창군 김수녕이 졸하니 철조(輟朝=廢朝: 임금이 조회를 폐함)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7세에 속문(屬文)에 능하니 당시에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외조부인 좌참찬(左參贊) 안숭선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다른 날 마땅히 세상에 크게 날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는 천자(天資)가 명민하고 학문이 해박하며, 문장을 짓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고 간고(簡古)하며, 필을 잡으면 바로 성취하여 전인의 말을 답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글로 써 둔 것이 없어서, 이 때문에 시문으로서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적다. 바깥으로는 온화하고 안으로는 강직하여서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귀요(貴要)라 하더라도 종일토록 마주 대하여 일찍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나, 만약 그 적당한 사람일 때에는 비록 위포(韋布:韋帶布衣의 준말. 장식이 없는 평민용 가죽띠와 베로 만든 옷이라는 뜻으로, 벼슬을 하기 전의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선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신발을 끌고 나아가 맞아들였다.…다만 익살이 많아 큰 소리를 치니 군자의 근묵(謹默)하는 위용(偉容)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여기었다.…

   문도(文悼)라고 시호)하니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중년에 일찍이 죽은 것을 도(悼)라고 한다. (16.11.7.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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