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92) 삼전도(三田渡)의 아름다움을 써서 남겼던 김수동(金壽童)

거북이3 2017. 1. 6.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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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인물열전 (92)

            삼전도(三田渡)의 아름다움을 써서 남겼던 김수동(金壽童)

                                                 [大東野乘 第20卷 海東雜錄 2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이 웅 재

  김수동(金壽童:1457∼151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요, 자는 미수(眉叟), 호는 만보당(晩保堂)인데 김방경(金方慶: 경북인물열전 32 참조)의 계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이면서, 첨지중추부사 김적(金磧)과 동부승지 안질(安質)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503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주서·홍문관 정자·의정부 사인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올랐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典翰)·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 동부승지, 이듬 해 좌승지를 거쳐, 그 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경기관찰사·형조판서에 올랐다.

  연산군이 선생을 두고 이르기를 “내가 옛날 세자로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김수동만을 좋아했다. 그 이유는 그의 사람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는데 내가 즉위(卽位) 뒤에도 자주 그를 대해보니 역시 훌륭한 점이 많아 또한 좋아하노라.” 하였다. 따라서 그의 벼슬길이 순탄하였다.

  1504년에는 47세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 해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의 회릉추숭(懷陵追崇)을 주장, 시행해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506년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에 의해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그는 성품이 단정하고 무게가 있으며 지혜가 많았다. 유생 때부터 정승이 되기까지 사람들이 그를 시비하지 못하였다. 연산(燕山)이 흉악 잔인한 짓을 하던 때에도 때를 따라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하여 임금에 대해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면서도 아래로는 많은 문신(文臣)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고 문란한 정치에는 부정과 비리가 자행하게 마련인데 공은 이에 물들지 않고 청렴결백하였다.

  중종반정(1508년)에 참여해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의거(義擧)하던 날, 성희안(成希顔)이 그 집으로 가서 알리니, 함부로 굽혀 따르지도 않고 조급히 굴지도 아니하고 조용히 살피고 헤아린 뒤에 행동하므로 사림(士林)들이 모두 그의 도량을 탄복하였다. (『(陰崖雜記』) 

  좌의정 김수동 등이 육조 참판 이상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왕에게 아뢰기를, “의거 때에 먼저 신수근(愼守勤)을 죽인 것은 큰일을 성공하려고 하여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딸이 대궐에 들어와 임금을 모시고 있어 인심이 위태롭고 두려워하니, 청컨대, 은정(恩情)을 끊고 내어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아뢴 바는 심히 당연하나, 조강(糟糠)의 처(妻)를 어찌 하리오.”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신들도 이미 짐작한 바이오나 종사(宗社)의 큰일을 어찌 하겠습니까? 쾌히 결단하여 미루지 마시옵소서.”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종묘사직이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헤아리겠는가. 마땅히 중의를 좇을 것이오.” 하였다. 그 날 밤으로 곧 신씨는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나가 머물게 하였다. (『東閣雜記』) 

  연산을 폐할 때에 성희안(成希顔)이 우상 김수동의 집으로 가서 알리니 우상이 말하기를, “이러한 나라의 큰일을 나는 처음에 그 전말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재상의 말을 따라 뛰어갈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곧 베개에 누우면서, “그대는 내 목을 잘라 가라.” 하였다. 성공(成公)이 대군(大君)을 세운다는 뜻을 아뢰니, 우상이, “그렇다면 내가 가야겠다.” 하였다. (『言行錄』에서 나옴)

  사림으로부터 연산군에게 충실했다고 비난받기도 하고 본인도 연산조에 있었다 하여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되었고, 1510년(중종5) 영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그 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1512년(중종7) 5월 병으로 사직, 동년 7월 별세하니 향년 55세이었다. 예서(隷書)를 잘 썼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산천 삼전도(三田渡) 조(條)에는 김수동(金壽童)이 쓴 글이 나온다.

  “우뚝하게 높도다, 범바위[虎巖] 깎아선 모습 몇 천 길인고. 뭇 봉우리 높이 솟음이여, 용이 나는 듯 봉새가 춤추는 듯 다투어 솟아오르네. 아래는 긴 강 있어 쉬지 않고 흐름이여, 밤낮으로 성난 조수 바다 어귀[海門]에 통한다네.…생선 잡아 서리 같은 칼날로 가늘게 회를 치매, 은실이 날리는 듯 뱃노래 소리 속에 맑은 술병 열었구나. 미인이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칼인데, 맑고 시원한 선궁(仙宮)으로 나를 맞이하고, 자하주(紫霞酒) 부어 나를 권하려 하니, 이 내 몸 어느 사이 신혼(神魂)이 아득하네, 신령스러운 자라 부르고 푸른 용 불러서, 흥(興)을 타고 신선 나라 바로 찾으려니, 천풍(天風)이 나를 끼고 소요(逍遙)하며 노네. 인간 세상 내려다보니 몇 겹의 티끌로 막혔으니, 소상강ㆍ동정호 좋다한들 이 경치 비길쏘냐. 소동파[蘇仙]의 적벽(赤壁)놀이 말할 것은 무엇인가.…

  ‘삼전도’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국에게 항복을 한 곳으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리었으며, 1950년대 말까지는 나룻배가 다녔다. 김수동의 글에 이렇게 낭만적으로 그려진 곳이 그만 치욕의 대명사로 바뀌고 말았다. 지금도 석촌호수 가에는 ‘삼전도비’라 불리는 ‘대청황제공덕비’가 남아 있다. (17.1.6.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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