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동화)

거북이3 2017. 10. 17. 12:20


10.11.(동화)석이와 첫눈(60.1.4.).hwp


     (동화) 석이와 첫눈

                                                                                                                    이 웅 재

  아침부터 올 듯 올 듯한 눈이 거의 저녁때가 다 되었건만 한 송이도 내리지 않습니다. 석이는 안타까웠읍니다. 눈이 와야 아빠가 새로 사다 주신 까아만 털 구두에 칼라가 멋진 빨간색 꽃 잠바며 가죽 장갑을 끼고 하얀 솔이 달린 방울 모자를 쓰고 나가 뛰어놀 것이 아니겠어요?

  아빠는 사 오시던 날로 석이더러 맞나 안 맞나 입어보라고 하셨지만, 석이는 굳아 첫눈이 내리는 날 입겠다고 하여 여태까지 장롱 속에 채곡 채곡 개어 넣은 채, 이렇게 매일같이 눈 오기만을 기다리면 마루 끝에 앉아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석이는 한 번도 신어 보지 못한, 입어 보지 못한, 끼어 보지 못한, 그리고 써 보지 못한 그것들이 제게 꼭 맞을 것만 같았읍니다. 석이 생각으로는 꼭 맞아야만 했습니다. 석이는 벌써 사흘째 이렇게 눈 오기만을 기다리며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눈이 꼭 올 겁니다. 뒷집 분이도 저네 집 소리통(라디오)에서 오늘은 눈이 내린다고 하더랍니다만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까진 소리통이 무얼 알아요? 그것보다도 석인 아침에 엄마에게서 오늘은 꼭 눈이 올 거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석아, 추운데 방으로 들어와, 빨리.”

  엄마가 불렀습니다.

  “싫여, 인제 조금만 더 있으면 눈이 올 텐데….”

  석이 싫다고 몸을 흔들며 대답했습니다.

  “석아, 그렇게 나가 기다리면 눈이 안 와요. 이렇게 방에 앉아서 옛날 얘기를 들어야지 그 새에 몰래 몰래 눈이 오지.”

  석이는 옛날 얘길 무척 좋아했읍니다.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 젖을 주물럭주물럭하면서 마귀 할멈이랑, 기운 센 꼬마 포수랑 나오는 얘기를 듣가가는 콜콜 쌕쌕 잠이 들곤 합니다. 그러면 꿈에 마귀 할멈이 나타납니다. 석은 무서워서 도망가려고 해도 발이 떨어지질 않아요. 너무 너무 무서워서 ‘엄마얏!’ 하고 소릴 지릅니다. 그러면 그 기운 센 꼬마 포수가 활을 메고 나와서 마귀 할멈을 쏘아 죽입니다. 그러면 석은 너무나 너무나 좋아서 꼬마 포수 아저씨께 매어달립니다.

  “꼬마 포수야. 넌 아부지 원수 갚으러 가는 거지? 울 엄마가 그러드라.”

  그러면 꼬마 포수는,

  “응. 난 아버지 원수 갚으러 간다. 그럼 잘 있어, 석아.”

하고는 석이 손에 눈부신 구슬을 하나 주고는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석은 슬퍼서 흐느끼다가 그만 잠이 깨곤 합니다. 깨고 보면 으례 엄마 젖꼭지를 꼬옥 쥐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오늘만은 웬 일인지 옛날 얘기보담도, 엄마 젖꼭지보담도 눈이 더 기다려졌읍니다. 하지만 엄마가 옛날 얘길 들어야 눈이 온다고 하니 할 수 없읍니다. 어슬렁어슬렁 방에 들어가 엄마 품에 안겼읍니다. 엄마 품에 안기니 그래도 옛날 얘기 생각이 나서 엄마한테, 밤낮 듣는 그 얘기를 다시 한 번 더 해달라고 하였읍니다.

  “옛날에, 옛날에…, 듣니? 석아.”

  “응, 빨리 해.”

  “그래, 옛날에 옛날에 말이야. 마귀 할멈이 살았대. 듣니?”

  “응.”

  “그런데, 그 마귀 할멈은 머리가 세 개고 꼬리가 여덟이래.”

  “어유, 무셔. 그만 해 엄마.”

  “무섭긴? 인제 꼬마 포수도 나오고 재미 있을 텐데….”

  “그럼 빨리 또 해.”

☓ ☓ ☓

  기다리고 기다리던 눈이 옵니다.

  함박눈이 소복 소복 내려 쌓입니다.

  뒷집 분이도 앞집 바둑이도 벌써들 좋아라고 뛰어 다닙니다. 석이도 얼른 옷을 꺼내 입고, 털 구두, 방울 모자에 가죽 장갑까지 끼고,

  “야!-. 눈이다.”

  소리를 지르며 뛰어 나갔읍니다.

  마당을 하얗게 덮어 논 눈을 마구 밟으며 이리저리 뛰어 다녔읍니다. 방울 모자에 달린 흰 털이 나부끼는 것도 눈이 펄펄 내리는 그 모습에 못지 않게 고와 보입니다.

  석이는 재미가 솔솔 납니다.

  털 구두가 눈을 밟을 때마다 작년에 앓다 앓다 하얀 얼굴을 하고 석이 손을 꼬옥 쥐고 죽은 누나가 불던 꽈리 소리가 납니다. 엄마가 그러는데 누나는 폐병을 앓았었답니다. 석은 폐병이 무언지 모릅니다. 단지 폐병이 누나를 앗아 갔기 때문에 폐병이란 소리도 듣기 싫어졌습니다.

  누나가 죽던 날, 석은 누나가 이상한 소릴 하는 걸 들었읍니다.

  “석아, 넌 누나가 없어도 울지 않고 어마 말 잘 듣지?”

  “누나, 어디 가?”

  “응, 저 먼 나라로 간단다.”

  “저 먼 나라가 어디야?”

  “거긴 꽃도 피고 새도 우는 아주 아주 예쁜 나라란다.”

  “누나, 그럼 나두 같이 가아.”

  “안 돼, 넌 아직 갈 때가 안 됐단다.”

  누나 얼굴엔 눈물이 주르륵 흘렀읍니다.

  그 죽은 누난 꽈리를 참 잘 불었읍니다.

  그 꽈리 소리가 털 구두로 눈을 밟을 때마다 나는 것이었어요. 누나가 옆에 와 있는 거라고 석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뒤를 휙 돌아보았어요. 누난 없었읍니다. 머리를 홱 돌리는 바람에 모자 방울만 떨어졌읍니다. 하이얀 털 방울에서는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겠지요. 석은 멍하니 쳐다만 보았어요.

  흰 연기는 점점 더 커지더니, 그 연기 속에서 하이얀 얼굴을 한 누나가 새하얀 옷을 입고 서서 석을 손짓해 부릅니다.

  “누나!”

하고 석이 달려들었읍니다.

  허나 누난 없읍니다.

  “석아, 누난 여깄서.”

  그 소릴 쫓아보니, 누난 훨훨 날아서 자꾸만 저쪽으로 갑니다.

  “누나, 같이 가아.”

  석은 뛰었읍니다. 그러나 누난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석은 뛰고 또 뛰고, 있는 힘을 다해 뛰었읍니다. 한참을 뛰다 보니 누나가 보이지 않읍니다. 사방을 둘러 봅니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고 그 가운데로 좁다란 길이 하나 있읍니다. 석은 그 길을 따라 자꾸자꾸 갔읍니다. 누나는 꼭 그 길로 갔을 것만 같아섭니다.

얼마를 갔는지 석은 다리가 아파서 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누나! 같이 가아!”

  석은 있는 힘을 다해 누나를 부르면서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여태까지 빽빽이 들어섰던 나무들은 간데없고 파아란 잔디가 주욱 깔려 있는 것이 아니어요? 석은 이상해서 잔디밭을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아주 아름다운 꽃들이 사이사이 피어 있겠지요. 한참 동안을 향긋한 꽃 냄새에 취해 있다가 어디선가 조잘 조잘대는 소리가 있어서 눈을 들어 보니, 아! 어쩜 저렇게 예쁜 새가 다 있을까요? 아마도 누나가 간다던 그 머언 나라라고 석은 생각했습니다.

  “아이, 이뻐! 집에 잡아다 길러야지.”

하고 석이가 그 예쁜 새를 잡으려고 하였더니, ‘쫑!’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똥을 찍! 갈기고 날아갔읍니다. 그런데 똥인 줄 알았던 것이 점점 커지더니 조그만 인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석아, 난 네 누나가 너와 같이 놀라고 해서 왔다! 같이 놀아.”

하겠지요. 석은 그 인형과 함께 꽃밭을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그 인형은 애리라 했읍니다. 애리는 향긋한 꽃의 이름이랑, 예쁜 새의 이름이랑, 석이 모르는 것을 다 알고 있었읍니다. 석은 애리와 함께 노느라고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읍니다. 애리가,

  “석아, 해가 넘어갔어. 인젠 곧 밤이 될 거야. 빨리 집으로 가야 해.”

하는 말에 정신이 들었읍니다. 주위엔 벌써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읍니다. 석은 울려고 했습니다.

  “울지 마, 석아. 내가 데려다 줄게.”

  애리가 석의 손을 잡고 자꾸자꾸 갔읍니다. 아까 왔던 그 숲속도 지났읍니다. 시커먼 나무들이 어찌나 무서운지 몰랐읍니다. 그 시커먼 나무 위에서는 부엉이가 눈에 불을 켜고 석을 노려봅니다.

석은 무서웠습니다.

  애리는 무섭지가 않은가 봅니다. 석이 품 안에서 생글생글 웃고만 있쟎아요? 그런데 이번엔 정말로 무서운 마귀 할멈이 나타났읍니다. 석이는,

  “엄마얏!”

하고 소리쳤읍니다. 그 바람에 애리가 깜짝 놀라 땅에 떨어졌습니다.

☓ ☓ ☓

  “석아! 일어나, 눈 온다.”

  부드러운 엄마의 목소리입니다. 석은 옛날 얘기를 듣다 또 꿈을 꾸었나 봅니다. 그러나 석은 꿈 같지가 않았읍니다.

  석은 얼른 애리를 찾아 보았읍니다. 애리는 아무데도 없었읍니다. 석은 울상이 되었읍니다. “엄마, 애리가, 애리가….”

  “애리가 누구냐?”

  석이는 엄마에게 꿈 이야길 죄다 말하고 저 땜에 애리가 떨어져 죽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석이가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는 내일 또 꿈을 꾸면 애리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읍니다. 글쎄, 그렇기만 하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석이는 엄마 말이 믿어지지 않았읍니다. 여태까지는 무슨 말이든 엄마 말이면 무어고 간에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뒷집 분이네 소리통(라디오)보다도 엄마 말을 더 믿었었지만, 이번만은 그럴 거 같지가 않읍니다.

  석은 갑자기 눈이 내리는 마당으로 뛰어나갔읍니다. 털 구두도 방울 모자도 꽃 잠바도 가죽 장갑도 다 그냥 놓아둔 채로 뛰어나갔읍니다. 그리곤 손을 혹혹 불어 가면서, 눈을 굴렸읍니다. 저 땜에 죽었을 애리를 만들려는 것입니다.

  얼굴은 동그랗고, 속눈썹이 길고, 이마가 시원스럽고, 코는 오똑하고, 귀는 살프시, 눈은 빛나고, 입은 가벼운 듯 꽉 다문 애리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눈을 뭉칩니다. 눈 뭉치가 거의 애리만 해져 갑니다.

  ‘아빠가 사다 주신 꽃 잠바, 털 구두, 방울 모자, 가죽 장갑은 애리에게 주어야지….’

  애리의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점점 준에 서언하게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1960.1.4. 고1때. 東亞日報 신춘문예 최종예선에 올랐던 작품. 17.10.11.입력 2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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