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95)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된 김정(金淨).hwp
경북 인물열전 (95)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된 김정(金淨)
[大東野乘 第20卷 海東雜錄 2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이 웅 재
김정(金淨: 1486년~1521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원충(元冲)이고, 호는 충암(冲庵), 고봉(孤峯)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본관은 경주(慶州)로, 할아버지는 증 병조참판(兵曹參判) 김처용(金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며, 어머니는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판관(判官) 허윤공(許允恭)의 딸이며, 부인은 진사(進士) 송여익(宋汝翼)의 딸이다.
1507년(중종 2년)에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뽑히어 청관(淸官)과 요직을 역임하였다. 1514년(중종 9년)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청원하여 순창(淳昌) 군수가 되었다.
이때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신씨(愼氏: 폐출된 중종의 첫 왕비 端敬王后)의 복위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사론(邪論)이라 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報恩)에 유배되었다.
이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치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치죄를 반대하였고, 조광조(趙光祖)는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기까지 하였다.
1516년(중종 11) 풀려나와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부제학,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승진은 놀랄 만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극형은 면하고 금산(錦山), 진도(珍島)를 거쳐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그 뒤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중죄에 처해져 사사(賜死)되었다.
1545년(인종 1)에 복관되고, 1646년(인조 24)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간공(文簡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형님의 아들 철보(哲葆)로 뒤를 잇게 하였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며 겉으로는 순후하고 안으로는 민첩하다. 서사(書史)를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외웠다.
공은 죽음에 임하여 술을 가져오라 하여 실컷 마시고 「임절사(臨絶辭)」 한 편을 읊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하 「海東雜錄」2에서 발췌)
“절도(絶島)에 버려져 외로운 넋이 되매, 사랑하는 어머니 버리고 천륜마저 끊겼도다. 이런 세상을 만나 내 몸을 죽이니, 구름 타고 천제의 궁궐을 거쳐 굴원(屈原)을 좇아 높이 소요하려는데, 어둡고 긴긴 밤은 언제 새려나. 사무치는 붉은 마음 풀숲에 묻치었네. 당당한 큰뜻 중도에 꺾였으니, 천추만세에 응당 나를 슬퍼하리라.”
공은 「십일잠(十一箴)」을 짓기도 했는데, 그의 사상이 어떠했는지 그 중 몇 편을 보기로 한다. 먼저 그 ‘서(序)’를 보자.
“검은 표범[玄豹]이 안개 속에 숨어 있으면 여우나 너구리가 업신여긴다. 그러나, 그가 한 번 울부짖고 긴파람을 하면 온갖 짐승이 놀라 간을 떨어뜨린다. 대저 무늬를 번득이며 산에서 나오는 것은 검은 표범의 신령이요, 암연(闇然)하여 날로 빛나는 것은 군자의 도(道)이다. 모기처럼 아주 세미한 것은 밝게 보면서도 앉아 있는 탑[坐榻]이 기우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총명은 마루 밑의 개미 싸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머리 위의 벼락 소리는 깨닫지 못한다.…젊었을 때에 앞날이 먼 것을 믿고 일생을 향락으로 지내다가 늘그막에 이르러 그 이룩한 바 없음을 뉘우치는 것은, 마치 달아나는 뱀이 구멍에 들어갔으나 꼬리를 감추지 않은 것을 당기어 도로 꺼내려는 것과 같아서 한탄하여도 늦고 말 것이다.”
「행잠(行箴)」에서는 말했다.
“칠보(七寶)로 꾸민 옷을 입고 똥통에 누워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코를 막고 피할 것이다.…군자는 덕이 몸에서 떠나지 않으므로 몸이 위태로운 데 가깝게 가지 않는다.”
「용잠(勇箴)」을 보자.
“세상에 큰 용기(勇氣)를 가진 사람은 헐뜯어도 성내지 아니하고, 범하여도 놀라지 아니하며, 욕하여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義)를 행함에 용감하므로 분하고 노여운 일들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일락잠(逸樂箴)」이다.
“한창 때에 힘쓰지 아니하면 썩은 풀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하루살이가 아침저녁으로 들끓지마는 세찬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자취도 보이지 않는다.”
「욕잠(欲箴)」도 있다.
“명예는 비방을 기다리지 않아도 비방은 저절로 따르고, 이익은 다툼질을 기다리지 않아도 다툼질은 미치는 법이며, 부유함은 원망을 기다리지 않아도 원망은 좇아오게 된다. 사람에 있어서 욕망이라는 것은 마치 불이 처음 일어날 때와 같다. 그 시초에는 기세가 아주 작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구경하며 쉽게 여기나 그것이 불꽃을 튀기게 되면 두들겨도 꺼지지 않아, 비록 팽려(彭蠡: 큰 호수 이름)와 여량(呂梁: 물결이 사납고 급한 물 이름)의 물결을 기울여도 쉽게 끌 수 없게 된다.”
「용의잠(容儀箴)」도 있다.
“경솔하고 부박한 무리가 덕(德)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것은 비유한다면, 바다를 건너는 데 가마를 타고, 날개를 바라면서 양(羊)을 기르는 것과 같다.”
「분한잠(忿恨箴)」의 내용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물욕이 없어서 <마음이> 평탄하기가 가을 물과 같고, 조급한 자는 촉박하여 위태하기가 마치 우뚝한 멧부리와 같다.…쥐를 때려 맞지 않으면 종일토록 뛰어 다니고, 모기를 쫓아도 사라지지 않으면 밤새도록 자지 못하며, 마음에 맑지 않음이 있으면 겸연(慊然)하여 편치 못함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17.10.1.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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