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96) 안국동이라는 동명은 김안국(金安國)에게서.hwp
“경북신문” 124호(2017.12.8.). p.14.
경북 인물열전 (96)
안국동이라는 동명은 김안국(金安國)에게서
[大東野乘 第20卷 海東雜錄 2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이 웅 재
김안국(金安國:1478년~1543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참봉 김연(金璉)의 아들이며, 김정국(金正國)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일곱 살에 처음으로 『소학』을 배울 때, “효자로다, 민자건(閔子騫)이여!” 하는 대목에 이르러 말하기를, “남은 항상 이것을 법도로 삼는데, 나는 언제나 이것을 잘 행할 수 있으랴.” 하니, 듣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12세에는 경사(經史)를 읽고 대의(大義)에 통달했다고 한다.
실록에 의하면 “나이 20세가 못 되어 부모를 연이어 여의었던 까닭에 모재(慕齋)로 자호하고 정성을 다하여 죽은 부모를 섬겼다. 출입할 때는 늘 고하였음은 물론이요,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제를 올렸다. 사당 옆에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거처하며 음식 먹을 때에는 반드시 부모를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젊어서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였으며 지치주의(至治主義: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사상) 사림파의 선도자이다.
1503년(연산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기묘년에 우참찬이 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19년이나 지내다가 정유년에 간신들(金安老 등)이 처벌되자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문형(文衡)을 맡아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일찍이 영남 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모든 고을의 향교에서 『소학』을 가르쳤고, 경상 감사로 있을 적에는 순찰하는 중 비안(比安)에 둑을 쌓고 저수지를 만드니, 사람들이 처음 둑의 이름을 상국제(相國堤)라고 하였으나, 상국은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이름을 안국제(安國堤)로 고쳤다고 한다.
그는 늘 개혁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직 수준의 가벼운 처분을 받게 된 것은 그가 늘 온건한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의 개혁 성향은 급진적이어서 기성 정치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였으나, 그는 상대 세력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일이 적어서 비교적 가벼운 처분을 받았던 것이다.
여강(驪江) 하류에 이호(梨湖)가 있었는데, 훗날 사람들이 배나무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배나무 이(梨)자와 물가 포(浦) 자를 합쳐 이포라고 부르게 된 곳으로, 그가 기묘년에 파직되어 그곳에 우거하고 있을 때에는 그 옆에 범사정(泛槎亭)을 세우고, 근처 이호 16경으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면서 지내기도 한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훼손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그 인연으로 나중 금사면(金沙面)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될 수가 있었다.
사신으로 명나라 서울에 갔을 때에는, 성리학에 관한 책을 많이 사 가지고 왔는데, “우리 나라는 대국을 섬겨 표전(表牋)을 중히 여겼으나 유생(儒生)들이 그것을 배우기에 힘쓰지 아니하여 표전의 문장을 대할 때마다 매우 군색한 점이 많다.”고 하면서, 고금의 표선(表選)을 함께 사 오기도 하였다.
그의 성품을 짐작케 하는 일화들 몇몇을 보자.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풋콩을 삶아 오기도 하고 혹은 오이를 따가지고 와서 바치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모두 또박또박 책에 기록하여 두었다. 그것을 본 동생 김정국이 핀잔하자 “사람들이 성의로 보내오는데 내가 어찌 남의 은혜로운 뜻을 버리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성품이 정(精)하고 부지런하며, 상세하고 치밀하여 방아를 찧을 때에는 싸라기와 쌀겨도 함께 거두어 저장하였다가 춘궁기(春窮期)에 굶주린 백성을 먹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이 물질을 낼 때에는 모두 쓰일 곳이 있도록 마련하였으니, 마구 없애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혹시 비방하면 웃으며 말하기를, “범인(凡人)은 마음이 거칠고 성인은 마음이 세밀하니라.”라고 말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된 이외에도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
그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유자(儒者)의 사범(師範)이 되었으며, 저서로는 『모재집(慕齋集)』·『모재가훈(慕齋家訓)』·『동몽선습(童蒙先習)』(朴世茂가 지었다는 이설도 있음)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 『성리대전언해(性理大全諺解)』, 『농서언해』, 『잠서언해』, 『여씨향약언해』, 『정속언해(正俗諺解)』, 『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이 있다.
지금 서울 안국동(安國洞)의 지명은 그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는 곳마다 많은 선정을 베풀어 나중에는 대제학이 되고, 또한 선정의 대가로 국가로부터 많은 땅을 하사받았는데, 그 하사받은 땅을 생활이 곤궁한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하는데, 그가 내어 놓은 땅이 종로 일대였다고 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여 그곳을 안국방(安國坊)이라 불렀고, 그 안국방이 후에 안국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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