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아지는 개구리
이 웅 재
화장실엘 들어갔다. 칫솔 통에는 9개의 칫솔이 꽂혀 있었다. 식구는 모두 4명뿐인데…. 아들놈들이 그저 편한 대로 그때그때 새칫솔을 꺼내 사용한 때문이었다. 새로 칫솔을 꺼내 쓰기 시작하려면 사용하던 칫솔은 버리던가 해야 할 텐데, 쓰지 않는 것도 그냥 함께 놓아두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가 사용하는 것과 사용하지 않는 것의 구분이 없다. 내 손으로라도 쓰지 않는 것을 뽑아 버리고 싶지만, 내 것이 아니다 보니 어떤 게 사용하지 않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어 그럴 수도 없다. 새것과 헌 것의 구분도 아주 모호한 실정이라 더욱 그렇다. 말하자면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어서 새것을 꺼내 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볼 적마다 마음이 언짢이 생각되었지만, 그런 걸 가지고 아이들을 나무라봐야 나만 쪼잔한 사람이 되어 버릴 게 틀림없어 그냥 꾸욱 참을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칫솔을 찾아 꺼냈다. 치약을 찾으니 이건 또 웬 일인가? 전에 쓰던 치약이 아직 반쯤 남아 있는데, 떠억 하니 새 치약 튜브가 ‘나 여기 있소.’ 하고 으스대는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나는 헌 치약 튜브를 가져다가 꾸욱 눌러 칫솔에다가 치약을 짜서 묻혔다. 그리곤 치카치카 이를 닦는데, 기분은 영 노굿이다.
이 닦기를 끝내고 세수를 하려고 비누를 찾으니, 역시 아직은 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은 비누는 찬밥 신세가 되어 버리고 새로운 비누가 ‘나 여기 있소.’ 하고 버티고 있다.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부아를 삭이기 위해 대충대충 세수를 끝내고 화장실에서 철수를 했다.
이와 비슷한 현상들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 현관에는 무슨 놈의 신발들이 그렇게 많은지 발 디딜 틈이 없다. 자주 신지 않는 신발들은 신장에다 넣어 버리면 될 텐데, 한 번 신발장에서 나온 놈은 계속해서 현관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등산화나 조깅화, 또는 운동화 등도 도시 신발장 안으로 들어갈 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방이란 방은 또 어떤가? 비타 1000, 게토레이, 코카콜라 …, 온갖 빈병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고, 무슨무슨 이름의 과자나 초콜릿 봉지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져 있다. 게다가 프린터에서 잘못 출력된 파지들이 저 있고 싶은 곳에 아무렇게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필요에 의해 잠깐씩 보던 책들도 제멋대로 이쪽저쪽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서 에넘느레했다.
도대체가 정리정돈이 되어 있질 않은 것이다. 지저분한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들이 공해를 유발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점에 더욱 참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기껏해야 잔소리로 치부되어 버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을 하기는 싫었다. 어쩌면 나의 이러한 생각도 직무유기쯤의 문제성을 지니는 일은 아닐지 모르겠다.
공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걱정하면서도 그것을 줄이는 일에는 거의 무관심한 편이다. 고속도로 주변의 그 허구많은 쓰레기들, 공원이나 유원지에 나뒹구는 비닐, 스티로폼, 빈 깡통, 신문지, 과자 봉지, 비닐 등. 남이 버린 것을 보면서는 혀를 끌끌끌 차면서도 막상 자기 스스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런 물건들을 마구 버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차에는 차량 내부에 재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던지는 운전자들…. 그런 사람일수록 뒷 유리창에는 ‘내 탓이오!’를 자랑스럽게 붙이고 다닌다. 자기 탓이라는 걸 써 붙여 놓았으니까 그것으로 상쇄된다는 의미인지? 기실 그 ‘내 탓이오!’는 뒷사람이 보게 되는 것이니, 아마도 뒷사람 탓이라는 말은 아니렷다?
내가 공해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떤 분의 글을 읽은 후부터였다.
그 글 글의 대체적인 내용은 이랬다.
개구리는 변온동물, 주위의 온도에 따라서 자기 몸의 온도도 변해갈 수 있는 동물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개구리를 7부쯤 물을 채운 비커에 넣는다. 그리고 그 밑바닥 쪽을 알코올램프로 가열을 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아주 서서히’ 가열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의 온도 변화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개구리란 놈은 서서히 변화되어가는 물의 온도에 자신의 체온을 맞추어간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비등점에 이르러도 개구리란 놈은 그걸 의식하지 못하게 되어, 궁극에는 비커 안에서 삶아진 채로 죽게 된다는 얘기였다. 뚜껑이 덮여져 있다든가 했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겠지만, 얼마든지 뛰쳐나갈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삶아지는 개구리. 그게 바로 공해문제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주는 얘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공해란 놈은 서서히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놈이다. 어제의 공기와 오늘의 공기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알코올램프 위에 놓여 있는 비커, 그 속에 들어있는 개구리처럼, 우리는 조금씩조금씩 변하는 자연환경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질 못한다. 오존 경보가 내렸다손 당장 내가 죽는다든가 아니면 큰 병에 걸린다든가 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비커 속의 개구리처럼 삶아져서 죽어가는 것이다. 그 ‘서서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공해, 공해’ 하면서도 그걸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되짚어 보자.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마셔도 아무 탈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수돗물도 믿을 수 없다고 생수를 사서 마시고, 정수기를 사용하는 현실이 아니던가?
우리집 아이들을 위시해서 요즘 젊은이들은 정신 바싹 차려야 할 일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을 때까지는 ‘공해, 공해’ 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다음 세대에서는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모든 젊은이들은 깨달아야 한다. 하루가 새롭다. 비커의 끓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삶아진 채로 죽기가 싫다면, 하루라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공해, 그 놈이 정말 무서운 건, 바로 그 ‘서서히’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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