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요약)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고

거북이3 2006. 6. 7. 10:46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고

                             이   웅   재


 박현욱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었다. 특이했다. 발상이 특이했고, 서술방식이 특이했고, 주인공들의 생활 패턴이 특이했다. 작품에서 풍겨지는 느낌이 특이했고, 작품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특이했다.


 작품이 시작되기 전, 작가는 W. 스콧의 말을 백지 한 장을 할애하여 인용했다.


 인생 그 자체가 축구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한 장을 넘겨 ‘冒頭’ 부분을 보자.


 아내가 결혼했다. 이게 모두다.


 나는 그녀의 친구가 아니다. 친정식구도 아니다. 전 남편도 아니다. 그녀의 엄연한 현재 남편이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은 엉망이 되었다.


 소설을 읽는 나의 생각도 엉망이 되었다. 여자에 대한 관념에 혼란이 뒤따랐고, 축구가 인생의 변화에 그렇게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에 또한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면서 그럴 수도 있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억지로 해 보았다. 그럴 수도 있는 일? 그럴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말을 어떻게 납득하란 말인가?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났고 그와 결혼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러면서도 나와 이혼하지 않으려 했고 결국 이혼하지 않았다. 역시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는 그런 아내와 헤어지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놈은 남편이 버젓이 있는 여자와 결혼을 해 버렸다. 그 또한 사랑한다는 이유로.

 대체 사랑이 뭐길래?


 주인공도 아내의 결혼이 충분히 납득이 되지 않았는지 ‘시뮬라시옹’에서 말했다.


 나도 결혼했다. 혼인한 채로. 다른 여자와.

 아내가 하는 일을 나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공간에서의 일일 뿐이었다.

 아내가 임신했다.

 

 “누구 아이야?”

 “누구 아이긴. 내 아이지. 당신 아이고. 또 그 사람 아이고.”

 “뭘 물어보는지 알잖아. 아이 아빠가 나야, 그놈이야? 날짜 계산해 보면 나오잖아.”

 “두 사람 모두라니까.”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 아내는 매우 뿌듯해했다. 그녀는 두 명의 남편 앞에서 의연했고 당당했으며 무엇보다 행복해 보였다. 오직 행복한 삶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삶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그런 와중에 나는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신은 불공평하다. 교통사고가 나려거든 놈에게 일어나야 했다. 팔이 부러져도 놈의 팔이 부러져야 하고 다리가 부러져도 놈의 다리가 부러져야 마땅하다. 왜 나야?


 주인공은 아내의 새로운 남편인 ‘그놈’이 자신의 집에 와서 어린아이 지원(아내가 지단 넘버원에서 따다 지은 이름)을 보살펴 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놈과 나는 절대로 가족이 아니며 가족이 될 수도 없다.

 내게 있어 그놈은 남이며, 남이라고 하기에는 적에 가까우며, 적이라고 하기에도 과분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다. …


 딸 지원이 부쩍 자랐다. 한두 마디 말도 할 줄 알았다. 또렷하게 ‘엄마’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아빠’라는 말을 가르쳐야 한다. 먼저 내 얼굴을 각인시켜야 한다. 그놈을 위해서는 ‘아저씨’와 ‘나쁜 놈’이라는 단어를 가르쳐 줄 작정이다.


 지은이는 끝 무렵에 가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지구상에는 종족번식과 무관한 섹스를 하는 동물이 두 종이 있는데, 하나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보노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처다부로 사는 일이 어려운 일, 해서 아내는 뉴질랜드로 가 살자고 한다. 주인공은 물론 맹렬하게 반대를 하지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어느 덧 조건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떠나기로 하고 만다.


 그나저나 뉴질랜드에 가서 뭘 하지? 목수 일이라도 배워 놓아야 하는 건가?


 목수 일을 하건 인터넷에 매달려 백수 노릇을 하건 2006년 여름이 되면 하던 일을 접고 독일에 갈 것이다. 월드컵을 보려.…

 우리는 또다시 16강에 오를 수 있을까. 또다시 8강에 오를 수 있을까. 꿈은 또다시 이루어질까.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도’라는 마지막 소제목의 끝부분은 이렇게 맺어진다.


 바티스투타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항상 축구가 있다.”


 그리고 다음 장부터 미주(尾註)가 붙어 있었고, 그 다음 김윤식, 김원일, 성석제, 김형경, 서영채, 하응백, 김미현, 김연수의 제2회 세계문학상 심사평이 있었다.

 성석제는 썼다.


 젊다. 빠르다. 신선하다. 부지런하다. 흥미진진하다.


 하응백은 말한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를 근간으로 해서 이에 축구 이야기를 절묘하게 결합했다.


 마지막으로 김미현의 평을 옮겨본다.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동시에 두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통해 작가는 기존의 자유 연애 소설이나 불륜 소설로부터 탈주한다. 그래서 더욱 불편한 이 소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좋은 옛것보다 나쁜 새것이 더 낫다는 명제를 인정해야 한다. 사회가 제공해야 할 조직력은 뒷받침되지 못하고 소설가의 개인기에만 의존하는, 축구처럼 외롭고 힘든 경기를 펼치는 이 소설에 배수진은 없다. 무모하지만 용감하다.


오래간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은 감회는 현충일에 가지게 되는 경건한 마음과도 통한다는 생각이었다.


                   06. 6. 6. 제51회 현충일에(원고지 19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