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⑦
신라 음악의 개척자 옥보고(玉寶高)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古跡 琴松亭條]
이 웅 재
지난번에는 화가를 알아보았으니 이번에는 음악가를 찾아보기로 한다. “예기” ‘악기(樂記)’를 보면 예(禮)와 악(樂)은 정치의 근본이라 하였다. ‘예’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제도로서(禮以地制) 구속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요(禮自外作), ‘악’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성정(性情) 감발(感發)의 결과물로서(樂由天作), 스스로를 계발시키는(樂由中出) 것이란다.
한편, “효경”에는 풍속을 바꾸는 데 ‘악’보다 나은 것이 없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에는 ‘예’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예’는 ‘타속(他束)’이요, ‘악’은 ‘자발(自發)’임을 알 수가 있겠다. 한 마디로 ‘예’란 ‘하지 마라, 하지 마라’인 것이요, 악이란 ‘얼씨구절씨구’ 부추기는 일이다. ‘하지 마라’ 하면 오히려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요, ‘얼씨구절씨구’ 멍석을 펴 놓으면 도망가는 것이 우리들 습성이다. ‘악’이 한(限)을 모르면 방종이 되는 것이요, ‘예’가 도를 넘으면 탄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은 ‘예’로써 묶어놓아야 할 일이요, ‘예’는 ‘악’으로 풀어놓아야 할 일이다. 정치란 바로 이러한 ‘예’와 ‘악’의 상승적(上昇的) 조화를 효과적으로 이루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이 ‘예와 악’을 제멋대로 해석해 왔다. ‘예’와 ‘악’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통치자 자신은 ‘악’으로써 마음껏 즐겨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백성들은 ‘예’로써 묶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악’에 대한 신라 시대의 형편은 어떠했을까? 신라의 음악은 삼죽(三竹), 삼현(三絃), 박판(拍板: 여섯 개의 얇고 긴 판목을 모아 한쪽 끝을 끈으로 꿰어, 폈다 접었다 하며 소리를 내는 국악기. 풍류와 춤을 시작할 때나 마칠 때 또는 곡조의 빠르고 더딤을 이끄는 데 쓴다.), 대고(大鼓: 타악기의 하나. 나무나 금속으로 된 테에 가죽을 메우고 방망이로 쳐서 소리를 낸다.), 가무(歌舞)로 춤추는 두 사람은 뿔 달린 복두(幞頭)를 쓰고, 붉은 빛 큰 소매의 공복 난삼(襴衫: 붉은 가죽띠에 도금한 띠돈(노리개의 맨 윗부분에 있는 장식품. 금이나 은, 옥 따위로 사각형, 원형, 꽃 모양, 나비 모양 따위를 만듦.)의 허리띠를 매고 검은 가죽신을 신는다. 삼현(三絃)의 일은 현금(玄琴)이요, 이는 가야금(伽倻琴), 삼은 비파(琵琶)이고, 삼죽은 일은 대금(大笒), 이는 중금(中笒), 삼은 소금(小琴)이다.
신라고기(古記)를 보자. 처음 진(晋)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보고 악기 같기는 한데, 그 타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해서 이를 능히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리라고 널리 광고하였다. 이에 제2상(第二相)인 왕산악(王山岳)이 그 본양(本樣)은 그대로 둔 채, 여러 번 그 법제를 개량하여 악기를 만들고, 겸하여 1백여 곡을 지어 이를 연주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때마다 검은 학[玄鶴]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와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드디어는 악기의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다. 그것이 나중에는 현금(玄琴)으로 바뀌었는데, 우리말로는 ‘거문고’였다.
신라에서는 경덕왕(景德王) 때 사찬(沙湌) 공영(恭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금오산(金鰲山: 경주의 남산) 마루턱 소나무가 있는 정자에 올라 늘 거문고를 타고 놀았다. 그래서 그곳을 금송정(琴松亭)이라 하였다. 그는 후에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금법(琴法)을 배워, 신조(新調) 30곡(曲)을 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곡을 탈 때 현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고, 그래서 현학금이라 이름했고, 이것이 나중에 현금으로 바뀌었다고 하였으나, 앞서“삼국사기”에서 말한 왕산악과 관련된 얘기를 변형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이 30곡을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했는데, 속명득은 이를 다시 귀금(貴金) 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 선생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단절될까 걱정하였다. 이에 이찬(伊湌) 윤흥(尹興)이 그 소리를 전(傳)해 얻겠다 하기에 그에게 남원공사(南原公事)를 맡겼다. 윤흥은 남원에 이르러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이라는 총명한 소년을 뽑아 금도(琴道)를 닦게 하였다. 선생은 이들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 은미(隱微)한 점은 전교(傳敎)하지 않으므로 윤흥이 이에 술을 가지고 가서 자신의 부인에게 술잔을 들려 무릎을 꿇고 예의와 정성을 다해 전교를 부탁하니 그제서야 숨기었던 표풍(飄風) 등 3곡을 전하여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옥보고의 지은 바 30곡은 상원곡일(上院曲一), 중원곡일(中院曲一), 하원곡일(下院曲一), 의암곡일(倚嵒曲一), 노인곡칠(老人曲七), 춘조곡일(春朝曲一), 추석곡일(秋夕曲一) 등이다.
'경북인물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북 인물열전 ⑨ 독약이 든 음식을 알면서도 먹고 죽은 검군(劍君) (0) | 2006.12.03 |
---|---|
아들을 파묻으려다가 돌종을 얻게 된 효자 손순(孫順) (0) | 2006.12.03 |
경북 인물열전 ⑥ 황룡사(黃龍寺) 벽에 노송(老松)을 그린 솔거(率居) (0) | 2006.09.19 |
경북 인물열전④ 신선이 되어 갔다는 최치원의 좌절 (0) | 2006.08.20 |
경북 인물열전 ⑤ 진평왕에게 묘간(墓諫)을 했던 김후직(金后稷) (0) | 2006.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