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⑧
아들을 파묻으려다가 돌종을 얻게 된
효자 손순(孫順)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孝子條]
이 웅 재
헤드폰을 끼고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탄천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진행자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었다. 중학생 몇 명이 70대 노인에게 담배를 달라고 했고, 이에 노인이 훈계를 하자, 학생들이 노인을 집단 구타했다는 것이다. 충격이었다. 해서 옛 사람들은 어떻게 노인을 공경했나 하는 점을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효자 손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은 삼국유사의 손순매아(孫順埋兒)와 대동소이하다.
손순(孫順 또한 孫舜)은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 때의 모량리(牟梁里) 사람이다. 아버지 학산(鶴山)이 세상을 떠나자 처와 더불어 품을 팔아 늙은 어미 운오(運烏)를 봉양하였다.
모량리는 어떠한 곳인가? 한때는 지증왕비인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 등을 배출하여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었지만, 32대 효소왕대 이후에는 더할 수 없는 가난한 마을로 전락해 버리고 만 곳이다. 왜 그랬을까?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배경설화를 보면 이 의문이 풀린다.
진덕․ 태종․ 문무․ 신문왕의 4대에 걸쳐 총재(冢宰)를 지냈고, 김유신(金庾信)을 도와 삼국통일의 공을 이룬 竹旨[竹曼 또는 智官]랑의 낭도 중에 득오(得烏)[得谷 또는 得烏失]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모량의 익선 아간(益善阿干)에게 부산성(副山城) 창직(倉直)으로 차출되어 그의 사전(私田)에서 부역을 하고 있었다.
이에 죽지랑은 떡과 술을 장만해 가지고 면회를 갔다. 좌인(左人: 奴僕) 및 낭도 137인이 따르는 매우 위의를 갖춘 행렬이었다. 죽지랑은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였으나 암색불통(暗塞不通)한 익선은 이를 거절하였다.
때마침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租) 30석(石)을 거두어 가던 사리(使吏) 간진(侃珎)이 보고 조 30석을 주고 청가(請暇)를 도왔으나 이 역시 거절당하하게 되어, 또 진절 사지(珎節舍知: 관등 13等)의 기마안구(騎馬鞍具)를 주고서야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
결국 이러한 소문이 조정의 화주(花主)에게 들어갔고, 화주는 노하여 그 더럽고 추함을 씻어주고자 사람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오게 했으나 익선은 도망하여 숨어 버렸다. 이에 그의 맏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성 안에 있는 연못 가운데에서 세욕(洗浴)시켰는데, 때가 마침 한겨울의 매우 추운 날이라서 그만 얼어죽고 말았다.
사건의 전말이 대왕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대왕은 모량리인으로서 관직에 종사하고 있는 자는 모두 몰아내어서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중도 되지 못하게 하였으며, 만약 이미 중이 된 자라고 하더라도 종고(鐘鼓)가 있는 절에는 들지 못하도록 조칙(詔勅)까지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원측법사(园測法師) 같은 이는 해동의 고승(高僧)이었지만 모량리 사람이라서 승직을 주지 않았다고 하니, 모량리 사람들의 몰락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효소왕대 이후 모량리인으로 사서(史書)에 이름이 보이는 사람으로서는 정치하고는 무관한 신문왕~혜공왕대의 김대성(金大城)과 흥덕왕대의 손순 정도밖에는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모량리를 부운촌(浮雲村)이라 불렀던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었을 것이다.(이웅재. 鄕歌에 나타난 庶民意識. 白文社. 1990. pp.181-215 참조)
이야기를 다시 유사의 기록으로 돌려보자. 손순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언제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손순이 이를 민망히 여겨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으나 어머님은 다시 얻기 어렵지 않소? 차라리 아이를 묻어 버립시다.”
그리하여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북쪽 들로 가서 땅을 파는데, 갑자기 땅속에서 돌종[石鐘]이 나왔다. 아내가 말했다.
“이는 아이의 복 같으니 묻지 맙시다.”
부부는 아이를 다시 업고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달고 두드려 보았다.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리게 되어 왕이 좌우에게 말했다.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더없이 맑고 멀리 들리니 속히 검사하여 보라.”
왕의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검사하고 와 사실을 고하니 왕이 듣고 말했다.
“옛날 곽거(郭巨: 漢人)가 아들을 파묻을 때 하늘이 금솥[金釜]을 내렸다는데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자 땅에서 돌종이 솟아났으니 이 두 효도는 천지의 귀감이로다.”
임금은 손순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고 해마다 메벼[粳]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를 숭상하게 하였다.
손순은 옛 집을 내놓아 절을 삼고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여기에 그 돌종을 안치하였다. 진성여왕(眞聖女王) 때 후백제의 도적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는데, 그 종을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와전되어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 효자 손순의 이야기는 효도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매우 문제가 있다. 불효 중에서도 무후위대(無後爲大)라 하였는데, 자식을 죽여 효를 실천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행위는 불의(不義)가 아닌가? 어미 때문에 불의를 저지른다는 것은 어미도 함께 불의에 빠지게 함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효라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아이를 파묻어 효를 실행하려 했다는 얘기는 극적으로 효를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표현수법일 뿐이라고 이해해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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