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풍속도

추석날, 황당한 배터리 방전

거북이3 2006. 10. 9. 10:28
 

추석날, 황당한 배터리 방전              

                                                                       이   웅   재 

  

 추석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다. 모두들 귀성 전쟁으로 아우성이다. 하지만 내겐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나는 기껏해야 가까운 복정동에 살고 있는 형님 집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분당에 있는 남서울 공원묘지의 부모님 묘를 성묘하면 그것으로 추석절 행사 끝인 것이다.

 아이들을 재촉해서 자가용에 올랐다. 시동을 걸려고 했더니 안 걸린다. 어제 낮이었던가? 큰놈이 자동차 좀 쓰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했더니, 밤중에 경비실에서 연락이 왔었다. 실내등이 켜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가 끄고 왔는데, 시간이 좀 오래 되어서였던지 그만 방전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시동을 걸어 보았지만, 허사였다. 약하게 부르릉부르릉 대다가는 곧 피식피식 멈춰버리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파트 앞쪽에 비교적 큰 카센터가 2개씩이나 있으니 거기 가서 부탁하면 금세 해결될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웬 걸? 추석이라서 모두가 영업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드디어 난감해졌다. 할 수 없었다. 형님에게 핸드폰을 걸어 사정을 얘기하고 아무래도 가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찜찜했다. 그때 아내가 거든다.

 “보험회사에 연락해보지 그래요. 저번에 한아 차에 기름이 바닥났을 때도 보험회사에 연락하니까 금방 갖다 주던데….”

 그래, 그렇다.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하여튼 남자들은 늙으면 마누라 처분만 바라며 살아야 한다니까…. 보험카드를 꺼내 보았다. 카드 뒷면을 보니 ‘긴급출동 5회’가 무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위치를 묻는다. 그래서 위치를 말해주고 근처에 오면 다시 연락해 달라고 그랬더니, 빨리빨리 움직여야 하니 지금 집 앞으로 나와 기다리란다. 어떤 명령인데 안 들을 수가 있으랴, 부랴부랴 나갔더니, 벌써 긴급출동 차량이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해서 문제 해결 끝.

 그때 핸드폰 벨이 울린다. 형님이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조카가 모시러 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얼른 말을 막았다. 보험회사에 연락해서 지금 막 고치고 있는 중이니까 조금 후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 30분쯤 뒤, 형님 집 근처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동안 당황해서 허둥지둥했었기 때문일까?  형님 집 같기는 한데, 어정쩡해지는 것이 아닌가? 지난 한식 때에도 왔었는데 이럴 수가? 이곳은 몇 년 전 새로 개발되어 많은 건물들이 들어선 곳이기는 하지만, 성남비행장 때문에 고도 제한을 받는 곳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4층집, 그 집이 그 집 같은데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근처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고, 집 앞에 있던 철물점도 자동차 부품집인가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골동품이 되어 버린 지 오래지만, 반 년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도 제대로 집을 찾기가 힘들다니? 그러니 돌아가신 조상님들께서 제사상 받으러 오시는 길은 또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없던 길도 생겨난데다가, 논밭의 경작지가 마천루 같은 아파트 숲으로 변모해 있지를 않은가, 게다가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을 피해야 하는 어려움은 또 어느 정도나 될까? 어찌어찌 제사상 앞에까지는 오셨더라도 또 얼마나 황당할 것인지?

 적전중앙(炙奠中央), 홍동백서(紅東白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좌면우병(左麵右餠), 반서갱동(飯西羹東), 생동숙서(生東熟西), 건좌습우(乾左濕右) … 제수의 진설방법은 가가례(家家禮)라지만, 요즈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제수들도 등장하다 보니, 좌우나 동서의 개념에도 혼란이 가중되지 않던가?

 돌아가신 분이 평소에 커피를 좋아하셨다고 해서 커피가 오르기도 하고, 바나나, 레몬 따위의 서양과일이나 심지어는 검(gum)까지도 제사상에 오른다고들 하니, 그런 것들은 어느 곳에 놓아야 할 것인지? 백화수복으로 대표가 되었던 제주(祭酒)도 온갖 고급 양주로 대치되기도 하고 있으니, 조상님들, 멋도 모르고 일배일배부일배하시다가는 꼴까닥 취하셔서 명부(冥府)로 돌아가시는 길을 잊으시지나 않을지 그것도 걱정이다.

 반대로 제사상에서 차츰 사라져가는 제수들을 볼 때에도 왠지 씁쓰레한 마음이 든다. 예컨대, 옥춘(玉瑃)과 같은 것이 그렇다. 요즈음은 옥춘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보통 사탕은 전체가 둥글지만, 옥춘당(玉瑃糖)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탕은 전체적으로는 동그랗게 생겼지만, 가운데는 오히려 쏙 들어가게 생긴 놈이다. 아마도 괴어 놓기 편하게 하기 위한 생김새가 아닐까 한다. 명절, 제사, 회갑연 등에서 사용되는 이 사탕은 맷돌 같이 생겼다고 하여 ‘맷돌사탕’이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쌀가루로 만드는 것이다.  맛은 박하 맛이고, 높이의 치수와 접시 수 따위는 홀수로 한다. 이는 다른 과일 등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관습이다.

 제사를 마치고 음복을 한다. 나야 물론 퇴주를 비롯하여 술이 그 주종(主種)이 된다. 퇴주가 다 없어지자 조카가 직접 고창 농가에서 제조한 것을 얻어왔다면서 복분자주(覆盆子酒)를 내놓는다. 겉병에 씌어진 그 효능을 보았더니, 양기를 일으키며 정혈작용(精血作用)이 뛰어나단다. 게다가 고혈압, 당뇨병 등 성인병도 예방해 준단다. 신장에도 좋고 간을 보호하며 폐질환에도 좋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요새 고생하고 있는 관절염에도 탁월한 효능을 지녔고, 심지어는 피부를 곱게 하고 머리를 검게 해주며 미용효과에도 좋다고 하였다.

 그래, 자칫하면 그놈의 배터리 방전 때문에 이처럼 좋은 만병통치약을 못 먹을 뻔하지 않았는가? 역시 마나님 얘기는 항상 존중하라는 계시(?)가 아닌가 싶었다. 천하의 남성들이여, 명심, 또 명심하기를 바란다.

                                      (06. 10. 8. 원고지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