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의 무덤에 와서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다
이 웅 재
사라져 버린 가을을 찾으러 영월엘 가 보았다. 가을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엊그제까지도 여름이었었는데…. 가을이 가 있음직한 곳을 이리저리 생각하다 보니 그만 위쪽 눈꺼풀이 아래쪽 눈꺼풀로 덥석 떨어져 붙어 버렸다. 그 사이에 시간이란 놈은 슬금슬금 흘러가서, 우리가 탄 버스는 장릉(莊陵) 앞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단종(端宗)의 능인 장릉(莊陵)은 한 마디로 능 같지 않은 능이었다. 우선 가파르다고 할 정도의 수많은 계단을 올라 한참 동안이나 능선을 따라 걸어야 했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청령포(淸泠浦)에 유배되었다가 홍수로 인해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아아, 그곳에서 사약(賜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어서 강물에 버려진 시체, 누구도 감히 그 시신을 거두지 못하고 있어, 송장은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떠돌고 있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탓하여 무엇하랴! 그러나 가끔씩은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은 의인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날은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단다. 호장 엄흥도(嚴興道)는 죽음을 무릅쓰고 노산군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온 세상 몰래 선산 깊은 산속에 묻으려고 산등성이를 허위허위 오르고 있었다. 맨몸으로도 숨이 턱에 닿아야 할 즈음, 눈 속에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앞에서 시신을 얹은 지게를 내려놓고 쉬고 있노라니 노루가 가 버리더란다. 당연히 노루가 앉았던 자리엔 눈이 녹아 있었는데, 다시 지게를 지려 했더니 지게가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단다.
당연할 일일 것이다. 시체가 얼마나 무거운가? 그 시체를 지고 산등성이를 허위허위 올랐으니 더 이상 움직일 여력이 남아 있을 턱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얘기는 그 ‘당연성’을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데에 묘미가 있었다.
그는 바로 그 자리야말로 노산군의 점지된 장지로 생각하고 그곳에 암매장을 해 버렸다. 그래서 장릉은 산등성이에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곳에 있게 된 것이다. 나중에 복위가 되어 능도 추봉이 되었지만, 추봉된 능이기에 석호(石虎)도 한 쌍, 석양(石羊)도 한 쌍, 문인석(文人石)도 한 쌍씩뿐이었고, 무인석(武人石)은 아예 없었다. 말하자면 능이라기엔 너무 초라해 보였다는 말이다.
능에서 보면 오른쪽 산기슭에 정자각(丁字閣) 등이 있었는데, 능 앞의 혼유석(魂遊石)에서는 그곳에 진설해 놓을 제사 음식들이 보이지도 않을 듯했다. 제사 음식이나마 편히 흠향(歆饗)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고 있다는 말이다.
마음이 아팠다. 죽은 이가 잠들어 있는 곳이 으레 사람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드는 곳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단종의 능 장릉은 더욱더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12살에 왕이 되었다가 17살에 강제로 삶을 마감했으니,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한창때의 나이를 아기자기하게 즐기며 살아갔을 터인데, 그 삶이 오죽이나 원망스러웠을까?
일반적인 왕릉은 한양에서 백리 안에 있어야 한다. 능행을 하더라도 하루를 넘기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종의 능은 능행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고, 그리고 자손도 없었기에 암매장되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초라한 모습으로 오늘까지도 남아있었다. 능이라는 이름이라도 붙을 수 있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랄 수 있을 터이다.
가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장릉을 떠나 유배지였던 청령포로 향했다. 3면이 강물, 뒤쪽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로 되어 있는 천혜의 유배지였단다. 사람들은 모두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아, 이런 절경이 또 있을까 싶은 것이었다. 아마도 나는 왕이 되어보지 못한 보잘것없는 하나의 서민이기 때문에 본질에서 벗어난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강의 폭이 그리 넓지도 않은데, 헤엄을 배우면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꾸역꾸역 피어오르는 것이다. 직접 당해본 일이 아니니까 여유롭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는지? 연작(燕雀)이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헤아릴 수가 있을까?
궁녀 몇 명이 이곳까지 찾아와서 함께 지내다가, 단종이 죽게 되자 낭떠러지 위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다했다는 낙화암도 있다는데, 역시 속인의 생각으로는 미칠 수 없는 세상의 일이기 때문인지, 점차 아리아리하던 마음이 희석되어 간다.
초가삼간의 유배지터, 그리고 수령 600년이라는 30m 높이의 소나무. 그 나무는 아직도 정정했다. 까마득한 소나무의 중동에는 다른 소나무에서는 볼 수 없는 구불구불한 가지가 있었다. 단종이 올라타고 지냈던 흔적이라 한다. 소나무는 그래서 관음송(觀音松)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뒤쪽 낭떠러지로 가는 길은 나름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평소 아픈 다리를 이끌며 많은 나무계단을 올랐는데, 웬 일일까? 다리가 아프질 않은 것이다. 모처럼 찾아온 것을 반가워하는 단종 임금의 배려 덕분일까?
그러나, 아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오늘밤 이곳 리버텔에서 일박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혼자서 상경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우리 대학의 설립자이신 이동원 박사님께서 숙환으로 별세하셨다는 핸펀이 울렸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무덤에 와서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다니….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모양이다.
서둘러 상경하는 바람에 그만 내일 가 보기로 했던 영월장의 그 사람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된 점과 김삿갓 유적지엘 들르지 못하게 된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영월장에서는 몇 가지 약재를 사다가 술이라도 좀 담가 보려 했었는데 단종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고, 김삿갓 유적지에서는 말하나마나 술꾼인 거북이가 당대의 최고 음유시인 김삿갓을 만나 함께 대작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들, 마지막 가는 가을을 붙잡아 앉혀 두고 우리 싸구려 쐬주나 한잔하심은 어떠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