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현충원에서

거북이3 2006. 11. 30. 15:49
 

     현충원에서

                                              이   웅   재

 11월 22일. 우리 삶에서는 가끔 죽은 자가 산 자를 제어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수요일은 연구일이라서 나는 모처럼 산 자와의 만남을 약속해 두었던 터이다. 그 만남은 무척 오래간만의 일이요, 파기하고픈 약속이 아니었으나, 어쩔 것이랴? 죽은 자가 산 자와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외국 유학생으로 최연소 청와대 비서실장, 최연소 외무부장관, 국회 최초의 4선 의원, 한일의원연맹 초대 회장에다가 스위스 대사 등 여러 나라의 대사를 지냈고, 한일국교정상화, 월남 파병, 한미행정협정, 아스팍(ASPAC:아시아태평양 각료회의) 창립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무궁화훈장을 비롯한 10여 개의 훈장, 일본 독일 이태리 태국 대만 등 18개국 최고훈장을 받은 우리 대학의 설립자 이동원 박사가 향년 80세로 서거하여 외교통상부장으로 치러지는데 그 발인이 바로 오늘인 것이었다.

 예정으로는 11:50에 운구가 도착하여 학교를 한 바퀴 돌고 12:00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스케줄을 철석같이 믿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그 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니 11:15. 밖의 기맥이라도 보려고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갔더니 허풀싸, 대학본부 쪽으로부터 학생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학교 정문쯤을 지나가고 있지 아니한가?

 얼른 대학본부 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거기에서 장지로 가는 버스가 대기한다고 했던 것이다. 여직원 서너 명이 운구 행렬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11시 50분에 도착한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싸이카가 에스코트해 주는 바람에 모든 행사가 예정보다 빨라졌나 봐요.”

 “그럼 어쩌지? 연락 좀 해 봐요.”

 여직원 한 사람이 H․P을 걸었다. 꼭 만나야 할 산 자와의 만남도 깨뜨려버린 처지인데…, 허망한 심정으로 맥을 놓고 있는데, 여직원이 말했다.

 “버스를 잡아 놓았어요. 마침 효암관을 돌고 가느라고 조금 지체가 되었거든요. 빨리 이리로 오세요.”

 그러면서 승용차 한 대를 급히 대령시킨다. 덕분에 간신히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4대의 버스 중 2호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먼저 탑승해 있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넨다.

 “영결식 인사말, 고마웠어요.”

 사무처장이었다.

 “뭘요….”

하면서, 서둘러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버스는 11:30 학교를 출발, 1시간가량 달리다가 음성휴게소엘 들렀다. 화장실엘 다녀와서 자리에 앉았는데, 사무처 직원들의 말이 들린다.

 “시간도 되었고, 여기가 좋겠는데….”

 그러더니, 직원 몇 명이 커다란 박스를 뜯는다. 그리고는 그것을 끌고 다니면서 안의 내용물을 분배하고 있었다. 도시락이었다. 장지인 대전현충원에서는 음식 접대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도시락은 맛있었다. 오늘처럼 맛있는 도시락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특별한 도시락이라서였을까? 신년 하례식이라든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가끔 설립자이신 이박사 님과 함께 식사를 해보기도 했으나, 오늘의 이 도시락은 이박사 님이 내게 사주시는 마지막 만찬이 아닌가?

 13:00쯤 출발해서 14:00 조금 넘어서 대전 현충원엘 도착했다. 하관 예정시간은 15:00. 시간이 조금 남기에 여유롭게 주위를 살펴볼 수가 있었다. 묘지는 우백호는 건실한데 좌청룡이 거의 없었다. 나무로 보완하려고는 했으나 역부족으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곳은 아들보다는 딸이 훨씬 발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국가유공자묘역.’

 처음 나는 장관을 지낸 사람은 자동적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국가에 대한 ‘공’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마침 옆에 K교수가 있기에 덕담 한 마디를 했다. 그 형님이 집권당의 중진 국회의원이었던 것이다.

  “형님께서 무척 애쓰셨다면서요?”

 이후 남은 시간을 때울 겸 묘역을 둘러보았다. 맨 위쪽 우측의 처음 무덤은 민관식 씨의 것, 그리고 건너 건너에는 윤석중 씨의 것도 있었다. 손기정 씨의 무덤도 보였고 황산덕 씨의 것도 있었다.

 이박사의 안식처는 2번째 줄 좌측 2번째 자리였다. 향불연기가 은은히 풍겨 나온다. 20여 명의 악대가 등장하고, 의장대의 ‘받들어총’한 가운데 운구가 50여 m정도 이동하여 묘지로 운반되었다. 맨 앞에 인도자, 다음 2명이  뒤를 따르고, 이어서 영정, 그리고 양쪽 4명씩이 운구를 들고 있었고 맨 뒤쪽에 또 한 명이 따랐다. 그 뒤쪽으로 상주 등 죽은 이의 친척 친지들이 열을 이루고 있었다.

 하관의식은 지휘자의 받들어총, 세워총의 구령과 함께 이루어졌고, 다음 헌화요원이 입장하여 헌화 분향을 하도록 했다. 필요한 사람들의 헌화가 끝나자 사회자가 말했다.

 “지금 헌화하지 못한 분들께서는 식이 끝난 후 자유로이 헌화 분향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하관요원 입장. 그들은 운구를 감쌌던 태극기를 떼어내어 착착 접고 있었다. 사회자의 요청에 따라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유가족 대표 1인이 하관을 지켜보았다.

 다음은 포토요원 및 유가족이 운구 옆에 지켜선 채, 조총을 발사했다. 사회자가 미리 놀라지 마시라는 멘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은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다. 조총은 한 번에 3발씩 3번, 모두 9발을 발사했다. 이어서 묵념의 순서를 가졌다. 그리고는 유가족 대표의 보훈처, 국립현충원, 외교통상부의 배려 및 후의에 감사한다는 인사로써 하관식은 종료되었다.

 일세를 풍미했던 정치가 겸 교육자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떠나갔고, 그를 애도하는 화환들만이 그 다음의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외교통상부장관 직무대행의 화환이 첫 자리를 차지했고, 이어서 노무현 대통령, 김대중 전대통령, 국회의장 임채정, 그리고 다음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화환들과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의 것도 눈에 띄었다. 아, 그리고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의 대통령,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축전 등도 오늘의 하관식을 명예롭게 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