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8)
거제(車制)
박지원 지음
이웅재 해설
타는 수레는 태평차(太平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팔꿈치에 닿으며 바퀴마다 살이 서른 개인데, 대추나무로 둥글게 테를 메우고 쇳조각과 쇠못을 온 바퀴에 입혔다. 그 위에는 둥근 방을 만들어 세 사람이 들어갈 만하다. 방에는 푸른 베 혹은 공단이나 우단으로 휘장을 치고 더러는 주렴을 드리워 은 단추로 여닫게 되었다. 좌우에는 파리(?璃; 유리[琉璃]를 이른 말)를 붙여서 창을 내고, 앞에 널판을 가로 놓아서 마부가 앉게 되었으며, 뒤에도 역시 하인이 앉게 마련이다.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갈 수 있으나 먼 길을 가려면 말이나 노새 수를 더 늘린다.
짐을 싣는 것은 대차(大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태평차보다 조금 덜한 듯하며 바퀴살은 입(?) 자의 모양으로 되었고, 싣는 수량은 8백 근으로 정하여 말 두 필을 메우고, 8백 근이 넘을 경우에는 짐을 보아서 말을 늘린다. 짐 위에는 삿자리로 방을 꾸미되 마치 배 안 같이 하여 그 속에서 자고 눕게 되어 있다. 대체로 말 여섯 필이 끄는데 수레 밑에 커다란 왕방울을 달고 말 목에도 조그만 방울 수백 개를 둘러서 그 댕그랑댕그랑하는 소리로 밤을 경계한다. 태평차는 겉 바퀴로 돌며, 대차는 속 바퀴로 돈다. 그리고 쌍 바퀴가 똑같이 둥글므로 고루 돌아가고 빨리 달릴 수 있다. 멍에 밑에 매는 말은 제일 튼튼한 말이나 건실한 나귀를 사용하며, 수레 멍에를 쓰지 않고 조그만 나무 안장을 만들어 가죽끈이나 튼튼한 바(굵다란 삼베줄)로 멍에 머리에 얽어매어서 말을 달았다. 멍에 밑에 들지 않은 말들은 모두 쇠가죽끈으로 배띠를 하고 바를 매어서 끌게 되었다. 짐이 무거우면 바퀴채보다도 훨씬 더 밖으로 튀어 나오고 때로는 높이가 몇 길이나 되며, 끄는 말도 많으면 십여 필이나 된다.…(중략)…
독륜차(獨輪車)는 뒤에서 한 사람이 치대(원래는 뗏목의 앞쪽에 설치하여 뗏목의 운동 방향을 바로잡는 긴 나무임)를 잡고 수레를 밀도록 되었다. 한가운데쯤 바퀴를 달았는데 바퀴가 수레바탕 위로 반이나 솟았으며, 양쪽이 상자처럼 되어 싣는 물건이 꼭 대칭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바퀴 닿는 곳은 북을 반쯤 자른 것같이 보이며, 바퀴를 가운데로 하고 짐은 사이를 두고 실어서 바퀴와 짐이 서로 닿지 않도록 하였다. 치대 밑에 짧은 막대가 양쪽으로 드리워서, 갈 때는 치대와 함께 들리고 멈출 때는 바퀴와 함께 멈추어서, 이것이 버팀나무가 되어 수레가 쓰러지지 않게 되었다. 길가에서 떡ㆍ엿ㆍ능금ㆍ오이 등을 파는 장사들도 모두 이 독륜차를 이용하며, 밭둑길에 거름 내기에 가장 편리하다. 언젠가 보니, 시골 여자 둘이 양쪽 상자에 타고 앉아서 각기 어린애 하나씩을 안고 가기도 하고, 물을 긷을 때에는 한 쪽에 대여섯 통씩 싣는다. 짐이 무겁고 많으면 끈을 달아서 한 사람이 끌고, 때로는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마치 배를 끌듯이 한다.…(중략)…
중국은 재산이 풍족할뿐더러 한 곳에 지체되지 않고 골고루 유통함은 모두 수레를 쓴 이익일 것이다. 이제 비근한 예를 든다면, 우리 사행이 모든 번거로운 폐단을 없애버리고 우리가 만든 수레에 우리가 올라타고 바로 연경에 닿을 텐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인가. 영남 어린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 백성들은 아가위를 절여서 장 대신 쓰고, 서북 사람들은 감과 감자(柑子;귤)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며…(중략)… 한산(韓山)의 천 이랑 모시와 관동의 천 통 벌꿀 들은 모두 우리 일상생활에서 교역해 써야 할 것인데도, 이제 이곳에서 천한 물건이 저곳에서는 귀할뿐더러 그 이름만 알고 실지로 보지 못함은 어찌된 까닭일까. 그것은 오로지 멀리 나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겨우 몇 천 리밖에 안 되는 나라에 백성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함은, 한 말로 표현한다면 수레가 국내에 다니지 못하는 까닭이라 하겠다.
어떤 이가, “그러면 수레는 어찌하여 다니지 못하는 거요.” 하고 묻는다면, 역시 한 마디 말로, “이는 사대부들의 허물입니다.” 하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에 글을 읽을 때에는, …(중략)…윤인(輪人)이니, 여인(輿人)이니, 거인(車人)이니, 주인(?人)이니 하고 떠들어대나, 끝내 그것을 만드는 기술이나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도무지 연구하지 않으니, 이는 이른바 헛되이 글만 읽을 뿐이요 참된 학문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중략)…
이에 뜻있는 이가 잘 연구하여 그 제도를 본받는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의 극도에 달한 가난병도 얼마쯤은 고칠 수가 있을 터이다. 이제 내가 본 불끄는 수레의 제도를 대략 적어서 우리나라에 돌아가 이를 전하려 한다.…(하략)…
해설: 지난달 수필문학 하계 세미나 때 연암 박지원의 문학세계에 대한 주제 발표가 있었기에 이번에는 바로 그 연암의 「일신수필(馹?隨筆)」중 「거제(車制)」를 요약 소개한다.
지은이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결혼을 하던 16세 때에야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3년 동안 문 밖을 나가지 않고 발분하여 학문에 전력투구하였다. 문재(文才) 뛰어난 그는 이미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짓는 등 30세 무렵까지 「방경각외전(放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전을 지었다. 44세 때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연경(燕京)을 다녀와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었다.
저서에는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이 있다.
** 한문 번역은 민족문화추진회의 『열하일기』「일신수필(馹?隨筆)」을 따랐으나 맞춤법, 띄어쓰기와 문맥을 살리기 위한 부분적 윤문은 해설자가 하였음을 밝혀 둔다.
(07. 7. 12. 원고지 16매 정도) http://blog.daum.net/leewj1004
'우리의 고전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수필 순례 10) 국선생전 (麴先生傳) (0) | 2007.08.08 |
---|---|
(고전수필 순례 9) 불씨 걸식의 변 [佛氏乞食之辨] (0) | 2007.08.06 |
(고전수필 순례 7) 독서당기(讀書堂記) (0) | 2007.03.19 |
(고전수필 순례 5) 수직(守職) (0) | 2007.03.15 |
(고전수필 순례 6) 공방전(孔方傳) (0) | 2006.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