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고전 수필

(고전수필 순례 5) 수직(守職)

거북이3 2007. 3. 15. 21:58
 

(고전수필 순례 5)      

        수직(守職)

                                                            서거정 지음

                                             이웅재 해설


 무릇 물(物)은 각기 직책이 있다. 소의 직책은 밭가는 것이요, 말의 직책은 사람 태우고 물건 싣는 것이며, 닭의 직책은 새벽을 알리는 것이요, 개의 직책은 밤에 도둑을 지키는 것이니, 능히 제 직책을 다하면 직책을 지킨다 이르는 것이요, 제 직책을 못하면서 다른 직책을 가름하면 직책을 넘어섰다 이르는 것이니, 직책을 넘어서면 이치를 위배하는 것이요, 이치를 위배하면 앙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한 가지 물건을 들어서 비유하건대, 닭이 새벽에 울지 아니하고 저녁에 운다면, 사람이 다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반드시 잡아 없애고 말 것이니, 직분을 넘어서는 데서 앙화를 받는 것이 아닌가.

 나는 보건대, 양반의 집안에서 사내종은 농사를 직책으로 하고 계집종은 길쌈을 직책으로 하여, 사내종은 농사짓고 계집종은 길쌈하면 그 집일이 잘되거니와, 만약 사내종이 길쌈하고 계집종이 농사짓는다면,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며, 어찌 찢어 없애는 것과 같은 화가 있을는지 뉘 알리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공경(公卿)ㆍ재상은 공경ㆍ재상의 직책을 맡고, 근시(近侍)ㆍ대간(臺諫)은 근시ㆍ대간의 직책을 맡으며, 설어(褻御; 시종꾼)ㆍ복종(僕從=僕夫; 종으로 부리는 남자)은 설어ㆍ복종의 직책을 맡고, 부리(府吏)ㆍ서도(胥徒;말단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구실아치들)는 부리ㆍ서도의 직책을 맡아서 각기 제 구실을 다하면, 정사의 질서가 바로 서는 동시에 나라는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다. 만약 설어ㆍ복종이 공경ㆍ재상의 직책을 가로 맡고, 부리ㆍ서도가 근시ㆍ대간의 직책을 가로 맡게 되면, 공경ㆍ재상과 근시ㆍ대간은 제 직책을 못하게 되니, 그 지위를 떠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직책을 넘어서는 행위도 이치에 위배되는 것이니, 상서롭지 못함이 이보다 클 수 없다. 남화노선(南華老仙; 莊子)의 말에, “푸주를 맡은 사람[庖人]이 비록 푸주의 일을 잘못한다 해도, 시축(尸祝; 시동(尸童)1)과 축관(祝官))이 준조(樽俎; 음식제조)를 넘어서 가로 맡을 수는 없다.” 하였으니 이것이 지론이다.

 최근에 한 모갑(某甲)2)이 미천한 데서 출세하였는데도 요행을 틈타서 맹부(盟府)3)에 참예하여 관직이 1품에 오르니, 직책은 대간이 아닌데 대간의 직책을 행하여, 곧잘 소장(疏章)을 아뢰어 인신공격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그는 소로써 한 대신을 논하여 입이 마르도록 헐뜯고 곽광(藿光)4)ㆍ양기(梁冀)5)에게 비하여 글월을 세 번 네 번 올렸으되, 자못 권태를 느끼지 아니하며 또 상소로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을 내리 무너뜨려 조정에 온전한 사람이 없으며, 조정을 능멸하고 진신(搢紳)6)을 편달하는 것을 스스로 잘하는 노릇인 양 여기고, 또 상소로 한 근시(近侍)를 논하여 그가 형편없는 소인이란 것을 극구 말함과 동시에, 이임보(李林甫)7)ㆍ노기(盧杞)8)ㆍ가사도(賈似道)9)ㆍ한탁주(韓侘冑)10)와 같다 하여, 대궐문에 엎드리어 임금을 항거하며 굳이 다투기를 대간보다 더하였다. 나 서거정은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모갑이 어질기도 하고 재주도 있고 글도 한다고 보겠다. 그러나 직책을 넘어서 일을 따지기를 좋아하니, 나는 아무래도 닭이 밤에 울다 제 놈이 없어지는 화를 입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하였더니, 얼마 안 되어서 조정의 사대부가 붕당(朋黨)으로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 하여 죄를 주는데 당에 연좌되고, 권문에 아부하여 사람의 죄목을 구성하여 모함하는 상소를 했다 하여 훈적(勳籍)을 박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직책을 넘은 화이다.” 하였다. 이러므로 군자가 제 직책을 지키는 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해설: 요즈음 모든 분야에서 제 직분을 지키지 못하고 제 분을 넘쳐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아 이 글을 소개한다. 이 글은 속동문선 제 18권 잡서(雜書)에 나오는 글이다. 이런 잡저류는 동문선에 나오는 40여 종의 문장 양식 중의 하나로, “자유로운 형식으로 쓴 글. 작자의 감정이나 사상이 잘 유로되어 있”으며,(한국문학개론 편찬위원회 편. 韓國文學槪論. 혜진서관.1991. p.543.) 장르상 ‘수필적 계열’에 속한다.(동 pp.540-546 참조.)

 지은이 서거정(徐居正; 1420~88)은 조선조 초기의 대학자로서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대구이다. 6살에 글을 읽고 시를 지어 신동이라 일컬어졌고, 세종 이후 6조를 역사(歷仕)하였는데, 여러 학문 분야에 두루 능통하였고, 사가집(四佳集) 34권을 비롯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 동문선(東文選),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太平閑話), 필원잡기(筆苑雜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남긴 저서도 방대하다.

**  한문 번역은 민족문화추진회의 『속동문선』을 따랐으나 맞춤법, 띄어쓰기, 문맥을 살리기 위한 부분적 윤문, 그리고 작은 글씨의 협주(夾註) 및 미주는 해설자가 하였음을 밝혀 둔다.    

                             

                                           *leewj1004@hanmail.net

주(註)   

1)시동(尸童); 예전에 제사를 지낼 때, 신위(神位) 대신으로 앉히던 어린아이.

2)모갑(某甲; ‘모가비’의 취음(取音). 막벌이꾼이나 광대 같은 낮은 패(牌; 동아리)의 우두머리)

3)맹부(盟府); 충훈부(忠勳府). 조선 시대에 공신의 훈공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 하던 관아.

4)곽광(藿光); 중국 전한(前漢)의 장군(?~B.C.68). 무제를 섬기다가 무제가 죽자 실권을 장악하였다.

5)양기(梁冀); 동한(東漢; 後漢) 때의 대장군(?~159). 황후의 오빠로 20여 년 동안 조정(朝政)을 전횡함. 성품이 잔학하고 음탕하였다.

6)진신(搢紳); 진신(縉紳).모든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 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사람.

7)이임보(李林甫); 당(唐)의 종실(宗室)(?~752). 현종(玄宗) 때 재상으로 겉으로는 가까운 척하면서 모략중상을 일삼아 세인들이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했다.

8)노기(盧杞); 당나라 때 사람. 용모가 추했으나 구변이 좋아 덕종(德宗) 때 재상이 되어 서예가로 이름 난 안진경(顔眞卿)등을 모함하는 등 제멋대로 전권을 휘둘렀다. 신당서(新唐書) 간신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9)가사도(賈似道); 중국 남송 말기의 재상(1213~1275). 공전법(公田法)을 실시하였고 이종 (理宗), 도종(度宗), 공제(恭帝)의 3대에 걸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10) 한탁주(韓侘冑); 중국 남송의 정치가(?~1207). 영종(寧宗)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주자학파를 억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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