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국내)

비가 온다 오누나

거북이3 2008. 8. 2. 13:10

 비가 온다 오누나

                                           이   웅   재 

 찜통 같은 날씨가 계속되니 짜증이 난다. 그런데 오늘은 모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반갑다. 한편, 걱정이 되기도 한다. 오늘은 사목회의 다섯 번째 나들이 가는 날인 까닭이다. 애초에 ‘우천순연’ 따위의 단서를 붙이지 않은 모임이니, 뭐 별다른 일이야 있을라고 하면서 우산 들고 집을 나섰는데, 아무래도 찜찜하다. 그렇다고 ‘우천불구’를 못박아 놓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때르르릉!” 아니, 아니다. 핸드폰에서 무슨 때르르릉인가? 하지만, 기억이 안 난다. 하고많은 사람들 핸드폰 벨 소리가 모두 각양각색인데, 그걸 어찌 일일이 기억할 수 있는가? 어쨌든 신호가 가고 상대방이 호출됐다.

 “우천불구 맞지요?”

 이건 사실 윽박지르는 말이다. 상대방은 오히려 나긋나긋하다.

 “그럼요, 당근이지요.”

 그놈의 당근, 도저히 출처가 불분명한 말이 의젓하게 행세하고 있는 세상이다. 말[馬]이 좋아하는 당근, 아마도 말[言]로 물었으니까 말[馬]이 좋아하는 당근으로 ‘물론’이라는 말을 대신하는 것은 아닌지?  말[馬]과 말[言]은 음이 같고, ‘물론이지’라는 뜻으로 ‘당연하지’라는 ‘당’ 자와 ‘당근’은 돌림자도 같지 않은가? 말[言]은 말[馬]처럼 ‘달리기’를 좋아하니까, 항상 조심을 해야 하는데, 요즈음은 어찌된 판국인지 말[言]과 말[馬]이 구분되지를 않는 실정이다.

 어쨌든, 약속 장소에는 예상했던 대로 4명이 차례로 나타났고, 주르륵주르륵 신나게 내리는 비를 친구 삼아 ‘서울대공원’을 향해 보무도 당당하게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서울 사람 쳐놓고 63빌딩 구경한 사람 많지 않고, 한강 유람선 타본 사람 별로 없다지만, 서울 대공원 구경 못 해본 사람은 거의 없는데, 나는 어쩌자고 3대 불출 중에 끼었는지, 오늘이 처음 이 ‘서울대공원’과 맞선을 보는 자리이다. 아니, 아니다. 분당 사람 착각 중의 하나가 또 발동이 되었다. 저희가 서울 사람으로 알고, 서울시장 선거에 투표하러 가려는데 투표장을 찾을 수가 없더라나…하는 얘기는 너무 고전적이니까 접어두자. 그런데도 이건 좀 이상하다. ‘서울대공원’? 여긴 분명 경기도인 것이다. 그런데 ‘서울대공원’이다. 대공원도 제가 ‘서울’에 위치한 줄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가?

 비는 계속 내렸다. 주룩주룩, 주르륵주르륵.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댓새 왔으면 좋지.      <김소월의 ‘왕십리’ 중에서>


 나는 김소월을 생각하면서 무연(憮然)히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리프트 탑승권 판매소 앞, 리프트는 운행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타고 싶었다. 언제 또 와서 저걸 타보느냔 말이다. 매표소의 앳된 아가씨에게 우리는 타야 되겠다고 말했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그러더니 선선히 표를 끊어주는 것이 아닌가? 대기실에는 몇 명의 다른 손님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리프트를 타지 않았다. 리프트는, 리프트는, 결국 우리 4명을 위해서 전체 시스템을 가동하였다. 우리가 낸 요금(8000×4=32,000원) 가지고는 엄청난 적자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프트를 가동해준 우리 젊은 기사님들께 지금도 고맙다는 마음을 떨어내지 못하고 있다.

 빗발은 점점 거세지는데, 우리는 그 비를 다 맞으면서 리프트를 탔다. 가다가다 우산을 펼쳐 쓰기도 했지만, 타고 내릴 때에는 안전 문제상 우산을 접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홀딱 젖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정말로 좋았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발밑으로는 호수와 장미꽃 화원과 동물원이 우리, 우리 4명을 위하여 저처럼 멋진 풍경들을 연출해 주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는 오늘의 이 나들이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억수처럼 내리는 비 때문에, 텅텅 빈 ‘서울대공원’- 그걸 우리가 전세 낸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말이다. 동물원의 사자나 호랑이들이 비에 쫄딱 젖은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입장료는 우리가 냈는데, 우리가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몇 명은 경로우대로 무료입장을 했지만 말이다.

 비가 약간 뜸해지자, 젊었을 적 곧잘 흥얼거리던 제목마저도 생각나지 않는 조병화 씨의 시 구절 하나가 떠오른다.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주막에 들러 나를 마신다.


 해서 호랑이사(舍) 앞쪽에서 내가 가지고 간 매실주를 꺼내어 조용히 네 사람의 순대에 들이부었다. 짜릿하다. 송강 정철의 ‘한 잔 먹새근여 또 한 잔 먹새근여’ 하는 ‘장진주사’가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곶 어 산(算) 노코 무진무진 먹새근여’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얼큰하게 되었다. 해롱해롱한 처지에서 ‘귀경’하게 된 수달의 ‘사랑놀이’는 그런대로 볼만했다. 그들의 사랑놀이는 능동 피동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껴주고 위해주고, 정말로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시 빗줄기가 거세진다. 동물들도 쏟아 붓듯 내리는 비는 부담이 되는지 모두들 그늘막 밑으로 들어가 있는데, 미련한 곰퉁이 한 마리는 장대비를 혼자 다 맞으면서도 느릿느릿 여유롭다. 계곡은 금세 콸콸거리며 요동치는 물줄기를 뿜어낸다. 저절로 마음이 시원해진다. 군데군데 ‘대피소’가 있어서 가끔 비를 긋곤 했는데, 왜 그 멋대가리 없는 ‘대피소’란 말을 썼을까 싶었다. 생김새로 보아 ‘정자’ 같았는데…누군가가 해석을 달았다.

 “정자라고 했다간 왜 난자는 없느냐고 항의를 받을까 봐서….”

 안줏감의 말잔치가 등장하니 한 잔 안 할 수가 없어, 걸음을 재촉했다. 정문 앞의 허술한 주막에서의 술맛은 비 맞으면서 넷이서만 타던 리프트 맛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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