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국내)

이규보 선생과 전등사

거북이3 2008. 7. 22. 14:51
 

 

이규보 선생과 전등사

                                                                     이   웅   재

 08. 6. 26. 목요일. 6월의 네 번째 목요일, 사목회 나들이 가는 날이다. 오랜만에 전등사(傳燈寺)엘 가기로 하여 10시경 독립문역 세란병원 앞에서 일행들과 만나서, 임교장의 자가용으로 구길을 이용하여 강화도로 갔다. 새로 뚫린 길들은 씽씽 달리기는 좋지만, 때에 따라서는 막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도로변의 여러 가지 아기자기한 풍경들을 보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눈이 시원하니 마음도 시원해지고, 여유가 생기니 기분도 유쾌해진다. 옆 사람의 말 한 마디도 푸근하고 정겹게 들린다.

 매사에 수동적인 내가 전등사 가는 길 오른쪽으로 이규보(李奎報)의 묘소가 있으니 참배하고 가자고 모처럼 일행들을 꼬드겼더니 모두가 다 좋다고 한다. 철종의 외가라는 표지판을 지나서 한참을 달려도 이정표조차 보이지 않아서 어쩐 일인가 하는 차에 드디어 이정표가  보인다. 그것을 따라 좁은 길로 몇 번의 길을 꺾어 찾아간 묘소는 쓸쓸했다. 묘소 앞쪽의 주차장도 조그마했고 올라가는 계단도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못한 상태에다가 사람의 발자취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마음이 아렸다. 유영각(遺影閣)엘 들어가 선생의 영정이라도 뵈오려 했으나 그것도 허사였다. 큼지막한 자물통으로 꽉 채워져 우리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후손들도 있으련만 어찌 이리 소홀할까 싶었다.

 그 오른쪽 언덕 위에 무덤이 있었는데, 주위에는 잡초만이 우거져 있었다. 술도 한 잔 가져간 것이 없어 그냥 무덤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재배만 하는 것으로 800여 년 만의 대면을 하자니 우리도 죄스러웠다. 그가 누구인가? 고려 전체를 대표하는 대문장가가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시(詩)․ 금(琴)․ 주(酒) 세 가지를 지독하게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는 호까지 지니신 분인데…. 그는 앓아누워서도 술을 끊지 못하고, “맑은 정신으로 살아 있은들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취해 지내다 저세상 가는 것이 도리어 좋을 텐데…”라고 독백을 했다는 분이 아니었던가? 못 따라준 술은 집에 가서 저녁 때 대작할 예정이었으나 그나마도 다른 술타령으로 무산되었으니 선생에게 지은 죄가 적다고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이규보, 초명은 인저(仁底)였는데, 22세 때 사마시에 응시하기 전날 밤 꿈에 신인으로부터 “장원을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그러나 천기를 누설해서는 안 되느니라.”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장원으로 급제한 후, 이름을 규보(奎報:별이 알려주다)라고 개명하였단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묘소는 그런대로 제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상석과 비석, 투박한 모습의 문인상 한 쌍, 양 모양의 석상 한 쌍, 그리고 망주석 한 쌍이 그를 지키고 있어 그나마 외로움을 덜어주고 있었다. 무덤은 부부 합장, 인천광역시 기념물 15호였다. 한참 아래쪽으로 아마도 어느 후손의 묘로 보이는 무덤이 하나 더 있고, 그 아래에 무덤을 마주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쪽에는 김동욱(金東旭)의 글이 새겨진 ‘백운 이규보 선생 문학비(白雲 李奎報 先生 文學碑), 오른쪽으로는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오른쪽에 사가재(四可齋)가 있고, 재실 오른쪽 벽에는 동국이상국집 23권에 나오는 사가재기(四可齋記)가 성균관대학원장 우성[李佑成]의 글씨로 씌어진 현판이 있었다. ‘사가’란 ‘밭․ 뽕나무․ 샘․ 나무가 있어 식량 마련이 가하고, 의복 조달이 가하고, 물 마시기 가하고, 땔감 준비가 가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정면에는 또 해위(海葦; 尹潽善 전 대통령) 필적의 백운재(白雲齋)라는 현판도 있었다. 사가재 앞뜰의 양편에 2그루, 뒤란에도 역시 양편에 2그루, 도합 4그루의 산수유 고목이 열매도 실하게 달고 선 채로 우리들을 아쉬운 듯 전송해 주었다.

 1:00경 전등사 아래쪽 주차장에 도착, 한 음식점에 들어가서 산채비빔밥으로 배를 채운 뒤, 인삼막걸리를 한 사발씩 쭈욱 들이키고, 커피마저 한 잔씩 마시고는 기분이 흥애흥애해진 채로 전등사 대웅보전을 찾았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여러 번 중수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광해군 때의 중수 과정에서 네 귀퉁이의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이 조각되어 있어서 관심들이 지대했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 광해군 때 불에 탄 대웅보전을 중수하던 도편수(都片手)가 사하촌의 주막집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가 불사(佛事)에만 전념하다 보니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편수가 맡긴 돈주머니를 갖고 도망 가버렸단다. 이에 실망하고 분노한 도편수는 그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하여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또 머리 위에는 무거운 지붕을 얹어 영원히 지붕이나 떠받들면서 참회하라고 여인의 모습을 추녀 밑에 조각했다는 것이다.

 네 나부상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속곳을 입고 있는 나부상도 있고 벌을 서듯이 두 팔을 뻗고 있는 나부상도 있고 오른손, 또는 왼손으로만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도 있다. 저러고 몇 백 년을 버티고 있었으니 이젠 용서해 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뒤쪽으로는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인 장사각(藏史閣). 이곳은 한때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었던 곳이기도 한데, 지금은 서울대 규장각도서에 보관되어 있단다. 그런데 장사각은  접근 금지였다. 현재 실록이 보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서 한번 보고팠는데…. 아쉬운 마음을 추스르며 내려오다 보니 정족산 가궐지(假闕地)의 팻말이 보인다. 몽골 침입으로 소실된 곳으로, 왕이 거처하지 않을 때에도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권력이 좋기는 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대통령 선거 때면 입후보자가 줄을 서고 있지 않던가? 나도 한번 출마를 해 볼까? 최소한도 내가 나를 찍었을 때엔 1표는 보장이 되질 않는가? 마누라의 표는 없느냐고? 그야 당근이다. 우리 집사람은 절대로 나를 안 찍는다. 모든 국민의 대통령은 사적인 남편으로 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누라야 내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맛에 살고 있는데, 어디 될 법이나 한 얘기인가?

 대통령 출마도 한번 해 볼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면서, 오늘 함께 하지 못했다고 한 잔 사겠다는 전 사상계 편집장, 국회의원, 환경부 장관을 지낸 분의 꾐에 홀딱 넘어가기로 하는 바람에, 우리 삼혹호 선생과의 약속을 어기게 되었음이 또한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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