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과의 대작
이 웅 재
한 번쯤은 서오릉(西五陵)엘 가 보았지 싶은데 도통 기억이 없다. 서오릉이란 서울의 서쪽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명릉(明陵), 익릉(翼陵), 경릉(敬陵), 홍릉(弘陵), 창릉(昌陵)의 다섯 능이 있어 서오릉인 것이다. 그러나 기실은 이 다섯 능 이외에도 수경원(綏慶園), 순창원(順昌園)이 있고, 게다가 대빈묘(大賓墓)가 하나 더 있었다.
이 중 명릉은 경외(境外)에 있어서 볼 수가 없었는데, 이곳은 조선조 제19대 숙종(肅宗)과 그의 제1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김씨와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능이다. 인현왕후는 주지하다시피 장희빈에게 밀려났다가 다시 왕후로 들어갔지만, 35세로 소생 없이 승하한 인현왕후전의 주인공이다. 이곳은 유명한 지관 갈처사가 잡아준 자리라고 하는데, 갈처사에 관한 전설이 꽤나 재미가 있다.
숙종대왕이 지금 수원천 부근을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놓고서 슬피 울면서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의 땅을 파고 있었더란다.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이곳이 명당이니 꼭 이곳에 묘를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딱하게 여긴 숙종이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어서 총각에게 주면서 말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한편 숙종은 총각이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산마루 찌그러져가는 단칸 초막을 찾아가서 따졌다.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 터인 줄 알기나 해? 그곳은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그리고 이 집은 나라님이 찾아오실 곳이야."
그 갈처사에게 부탁하여 잡아준 숙종의 왕릉이 지금의 ‘명릉’이라고 한다.
(출전: http://cafe.daum.net/skyunder9731)
인현왕후의 능을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무덤이 ‘영빈전의이씨지묘’인 수경원이었다. 사도세자의 생모가 누워있는 무덤이었다. 사도세자가 왕이 되었더라면 ‘능’이라는 칭호를 달았을 텐데, 죽어서도 원통하게 ‘원’으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 무덤은 원래 연세대학교의 구내에 있던 무덤이었다. 내가 대학생일 때엔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르고, ‘웬 놈의 무덤이 대학 구내에 있다냐?’ 하면서 그 무덤 위를 마구 뛰놀던 기억이 되살아,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익릉(翼陵),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의 능이다. 11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으나, 1680년 20세에 후사 없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였다. 고조부가 김장생이고 조부는 김익겸, 청나라에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강화로 가서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 직전에 분신 자결한 충신이었고, 아버지는 서포 김만중의 형인 김만기이다. 김장생의 제자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송시열이었으니, 김만중이 “사씨남정기”를 짓고도 유배로만 끝날 수 있었던 내막을 알 만하다 하겠다. 다음의 계비가 바로 인현왕후였다. 그 앞쪽 소나무 그늘에는 보람유치원생들이 숲속체험을 한다고 오락가락, 왁자지껄하였다.
다음은 경릉(敬陵). 세조의 장남, 후에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와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능으로 서오릉(西五陵) 중 제일 먼저 조성된 능이다. 덕종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바,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와 같은 20세에 요절한 분이다. 왜들 이렇게 일찍 죽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쩌면, 사람이란 일단 어느 정도는 오래 살고 볼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한 우리가 무척이나 행복에 겨운 느낌을 만끽하면서 찾아든 곳은 대빈묘, 서오릉 유일의 ‘묘’였다. 묘 뒤쪽으로는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온 세 그루 나무가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능역 속의 묘는 묘한 이질감을 불러오기도 했다. 한 마디로 서글픈 느낌이었다. 왜 ‘능’이나 ‘원’이 아닌 ‘묘’일까? 무덤 속에 누워있는 주인공을 알고 보니 이해가 갔다. 그는 바로 장희빈의 묘였던 것이다.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는데, 그렇게 해서 숙종과 그 원비,그리고 두 계비에다가, 장희빈까지 서로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같은 묘역에 자리 잡고 있는 모양새를 갖추었으니, 능묘 관리인들의 마음씀씀이가 어떤 면에서는 고맙기까지도 하였다.
늦게 도착한 한선생과 함께 오로지 장희빈의 묘에서만 술잔을 따라주고 함께 대작했던 이유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좋았다. 장희빈, 가난했고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영민하고도 아름다웠던 여인, 그러한 열성적(劣性的)인 인자(因子)로 인해 왕후에서 폐출, 사약을 마시기까지한 여인을 어찌 모른 척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오늘 밤, 나는 장희빈과 시공(時空)을 뛰어넘은 대작(對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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