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17) 결말쓰기(감동, 평가)
남다른 ‘느낌’을 주어야…
이 웅 재
우리들은 무엇에서나 정답을 찾으려고들 한다. 그러나 ‘1+1=2’라는 식의 정답 찾기는 숫자의 논리학에서는 가능할 수 있어도, 수필 쓰기에서는 곤란하다. 정답을 확인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수필 ‘따위’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바둑을 두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바둑이 생겨난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대국이 있어 왔지만, 공부를 위한 의도적인 복기(復碁)가 아니고서는 똑같은 기보(碁譜)를 보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수필 창작에서의 마무리 짓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서도 그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없다’라는 말이 정답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 글을 쓰는가? 그것은 ‘없다라는 말이 정답’이라면, ‘그것이 바로 정답이 아니냐?’고 반박할 사람들이 있겠기에, ‘없다’라는 말도 또한 정답이 아님을 보이기 위한 때문일 뿐이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는 말이 있다. 출생, 성장, 사망 ― 그 어느 하나가 사람의 일생에서 중요하지 않을까마는 그 사람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개관(蓋棺) 이후에라야지만 정당하게 내려질 수 있다는 말이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도 그 서두와 본문, 결말이 다 중요하겠지만, 작품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는 역시 글의 마무리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달려있지 않을까 한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끝마무리가 중요함을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털실로 스웨터를 뜰 때 마지막 실의 마감 처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스웨터는 어느 한 순간에 두르르 실밥이 풀어져 버리고야 말 것이다. ‘마무리’는 모든 일에서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수필 창작에서의 결말이란 그 작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작품을 온전하게 완성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부분이 바로 이 결말 부분이라는 말이다. 이제 실제 작품들을 통하여 결말의 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가 오랜 해외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해 독창회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팬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연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사회자가 황급히 나타나 객석을 향해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가수가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늦을 것 같습니다. 대신 우리나라에서 촉망받는 신인 가수 한 분의 노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소개한 신인 가수는 무대로 올라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실망한 청중들은 본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래를 다 불렀는데도 박수를 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극장의 2층 입구에서 한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빠, 정말 최고예요.”
신인 가수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였습니다. 그리고 청중들의 얼굴에도 따스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신인 가수가 바로 루치아노 파바로티였습니다.
(허재영, 국어능력인증시험 실전모의고사, 네오씽크, 2008)
그렇다. 그 마지막 ‘감동’을 선사하는 곳이 ‘결말’인 것이다. 서두는 나를 선보이는 자리요, 결말은 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마지막 결전장이다. 절대로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글짓기의 요체가 되는 부분이다. 시작은 반이다. 그러나 끝맺음은 전부이다. 시작은 일단의 유인책이요, 결말은 독자나 청중들의 최종 평가를 받는 부분이다. 서두가 멋진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질 수가 있다. 그런데 결말은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을 오래도록, 때로는 영원히 붙잡아 두는 구실을 한다. 서두를 잘 쓰면 베스트셀러가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스테디셀러가 되려면 결말이 좋아야만 한다. 베스트셀러는 매년 3,4종씩은 나온다. 그런데 그것이 스테디셀러로 주소 이전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가 않다.
좋은 책이란 어떤 걸까? 위에서 대충 그 정답이 나왔다고도 볼 수가 있는데, 그렇다, 좋은 책이란 재미가 있어서 계속 읽을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재미뿐만 아니라,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 책은 기껏해야 100년 정도를 살 수 있는 우리 인생과는 달리, 영원한 생명을 지닐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은 죽어 없어지더라도 그가 남긴 글이나 책은 연연세세(年年歲歲), 세세연연(歲歲年年)토록 후세로 후세로 전승될 것이다.
며칠 뒤, 무서리가 몹시 내린 어느 날 아침, 기이(奇異)하고 처참한 변이 또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도 알뜰히 보살펴 온 그 한 쌍의 황새가 서로 목을 감고 싸늘하게 죽어 있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은 이 슬픈 광경을 보자 숙연해졌다. 그리고 저마다 무엇을 느꼈음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김규련 씨의 ‘거룩한 본능’이다. 서사적 구성법을 취한 이 글은 위의 대목이 그 서사의 결말이 된다. 어쩌면 이 부분이 작품 결말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지 않느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서사로서의 소설이 아니고 수필이다. 따라서 서사적 결말이 곧 이 작품에서 그대로 결말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글의 마무리가 덧붙게 된다.
황새도 영물(靈物)일까? 산골의 날씨는 무섭게 추위지는데, 짝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없었던 애절한 황새의 정, 조류(鳥類)에 따라서는 암수의 애정(愛情)이 별스러운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생태요 본능(本能)이라 했다. 그러나 하찮은 그 본능이 오늘 따라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와 같은 결말은 앞의 서사적 사건에서부터 황새의 그 ‘거룩한 본능’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말하자면 ‘서사’를 ‘서사’로서만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감동’을 더하게끔 만들어 주는 유도적 장치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작품에 ‘감동성’을 부여해 주는 결말보다 더욱 훌륭한 마무리 짓기는 기실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까 한다.
같은 서사적 사건을 다룬 계용묵 씨의 ‘구두’를 보자.
그 2,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히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뿌리에도 풍진(風塵)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뚫어진 옆 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여기에서 서사는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뒤의,
기웃해 보니, 기다랗게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횡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은 알 바 없었으나, 나로선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에서, 처음 문장은 글쎄 서사의 연속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글 전체의 서사적 맥락으로 보아 꼭이 필요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결국 이 부분은 작품 전체의 마무리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異性)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別)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뛰어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분명 군더더기라 하겠다. 우리의 수필이 아직 일천(日淺)했던 때의 작품이라 그랬을까?
피천득 씨는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이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어쩌면 이 같은 수필이야말로 수필의 본령에 가까운 수필이 아닐까 한다. 이런 수필은 억지로 쓸 수 있는 종류의 수필이 아니다. 그야말로 글 쓰는 이의 인품이 저절로 배어나오는, 무기교의 기교, 무형식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글이다. 우리는 윤오영 씨의 ‘달밤’에서 그런 것을 만나게 된다. 짤막한 글에, 말수마저 아낀 ‘달밤’, 거기서 작자는 다음과 같은 결말을 보여준다.
이윽고,
“살펴 가우”하는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왔다.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언외(言外)의 인정미가 농익어 듣는 듯하다. 수필 미학의 극치라 하겠다.
멋이 느껴지는 표현으로 끝마무리를 할 수도 있다. ‘멋’ 자체가 문학성이 아니던가. 그러나 인위적으로 멋을 ‘만들다가는’ 속기(俗氣)가 풍겨 하등(下等)에 머무르게 되니 주의할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천명 씨의 ‘설야산책(雪夜散策)’은 정말 맛깔스럽다. 그 절대고독(絶對孤獨)이 못 견디게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창 밖에선 여전히 눈이 싸르르 내리고 있다. 저 막막한 거리거리에 내가 버리고 온 발자국이 흰 눈으로 덮여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누웠다. 회색과 분홍빛으로 된 천정을 격해 놓고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
여운이 느껴지게 마무리짓는 방법도 권장할 만하다. 독자에게 ‘생각하는 사람’의 멋진 포즈를 선사해 주는 방법이니까.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 씨의 ‘인연’의 결말 부분이다. 이 글은 여기서 끝났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는 표현이 덧붙어 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는 분명 군더더기일 터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임은 물론이요, 글 전체에서 받았던 감동의 여운을 곱씹게 해 주기까지 한다. 이렇게 여운을 느끼게 해 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특히 ‘돈강법(頓降法)’의 사용이 두드러지는 바, 돈강법에서는 흔히 ‘참신성’이 함께 드러나게 되어 그 표현 효과가 배가되는 것이 특징이다. 더구나 이 글의 첫머리는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어 글의 처음과 끝을 꽉 아물리게 하여 주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의 효과까지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체라도 홀랑 벗기고 나면 때로는 추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조금쯤은 가리워 둔 채로 은근슬쩍 엉뚱하다 싶은 말로 끝맺는 기법이란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런 것을 홍운탁월(烘雲托月)의 기법이라 했던가. 인용이나 생략법의 사용도 여운을 느끼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필자가 주로 쓰고 있는 마무리의 방법은 꽁트에서처럼 반전법과, 겸하여 자성적(自省的) 어조라 하겠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밋밋한 결말에서는 ‘느낌’ 이 없다. 평범한 글은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쓰지 않아도’ 될 글을 왜 ‘내가’ 쓰는가. 그런 글은 공해일 뿐이다. 필자는 밋밋한 결말이 싫어서 한 번 비틀어 보이기를 즐기는 편이다. 그런 표현은 ‘남다른 느낌’, 곧 강한 인상을 주는 데 효과적이다. 아울러 여운을 느끼게도 해 줄 수 있다. 소설로 친다면 절정과 결말을 아우른 표현이 더욱 좋다. ‘자성적’인 표현은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단, 주의할 점은 그 ‘자성’이 ‘교훈’이나 ‘설득’으로 느껴져서는 안 되고, 그 ‘자성’이 ‘억지 자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교훈’은 짜증스럽고, ‘설득’은 건방지고, ‘억지 자성’은 위선으로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최근 작품 둘을 예로 들어 보겠다.
그제야 나는 그 여인이 사진 속의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요새 아이들이 너무 감각적인 것만 추구한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이들은 살아있는 생명을 중시했던 것이다. 살아있음. 그것이 가장 귀한 것이고 가장 미적(美的)인 것이라는 점을 나는 아들에게서 배웠다. (‘살아있는 것의 아름다움’에서)
이 작품은 기실 결말보다도 본문에서의 묘사력에 치중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러한 묘사에 의한 표현이 묘사로만 그쳐서는 아직 ‘데생’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의미 없는 작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특히 끝 문장에서 마무리의 중요성을 십분 지각하면서 썼다.
그러나, 그 고약한 냄새의 진원지는 ‘똥이 많아서…’ 가지고는 해결이 되질 않았다. 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신부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거지란 얻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기실 거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나는 여태껏 그것을 모르고 지냈었다. 냄새의 진원지, 그곳은 정말 말하고 싶지 않다. 나의 마음, 내가 이제껏 깨끗하다고 믿고 있었던 나의 마음, 역한 냄새는 바로 그것이 썩는 냄새였던 것이다.(‘꽃동네’에서)
이 글 역시 끝 두 문장에다가 무게를 둔 작품이다. 이 글은 서두의 첫 문장 “꽃동네에는 꽃이 없었다.”에 비중을 실은 글이지만, 마무리에도 고심을 한 작품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글쓰기에서 어느 부분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는 ‘정답이 없다’. 덧붙일 것은 바로 이 글의 제목으로 사용한 말, “남다른 ‘느낌’을 주어야…”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일단 발표된 글은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독자들에 의해서 평가된다. ‘남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은 그 글을 다 읽고 난 다음, 독자들의 ‘평가’에서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란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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