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국내)

나사못 하나가 대한민국을 살리다

거북이3 2009. 5. 17.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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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못 하나가 대한민국을 살리다

                                                               이   웅   재


 물이 빠지면 하나요, 물이 차면 둘인 섬, 그 둘이었을 적에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여덟 팔(八)자로 보인다 해서 팔미도(八尾島)는 예로부터 ‘팔미귀선(八尾歸船)’이라 하여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혔던 해상 경승지였다. 행정구역상 인천시 중구 무의동 산 372번지이다. 수도 서울과는 32km의 가까운 거리, 인천에서 바닷길로 13㎞ 정도 떨어진 곳이다. 면적 2만3천 평에 해안선 길이가 1.4㎞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으로 2∼3백 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와 무궁화, 칡, 담쟁이넝쿨, 패랭이꽃 등이 섬 전체를 덮고 있는 경관이 빼어난 섬이다. 청정구역 팔미도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다.

 내 친구 김 선생은 과태료 4만 원을 내고 그 금기 사항을 깨뜨려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팔미도에 입도(入島)하고서는 이와 같이 깨끗한 섬에서 어찌 담배연기를 피울 수가 있을까보냐면서 골초로서는 보기 드문 인내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누구는 백령도의 두무진에 비교하기도 하고 누구는 베트남의 하롱베이의 축소판 같다고 하기도 하는 팔미도, 백사장이 고왔다.

 등대에 올라서면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이 한눈에 들어오고 맑은 날이면 멀리 강화도 마니산도 손에 잡힐 듯하다고 한다. 팔미도는 독도나 마찬가지로 무인도이면서도 무인도가 아닌 섬이기도 하다. 현재 팔미도에는 해상관측을 위한 군부대와 3명의 등대지기들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조그만 섬 팔미도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잊어서는 안 될 섬이기도 하다. 팔미도에 우뚝 솟아 있는 하얀 등대, 인천항 입출항 선박들의 안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이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라는 점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03년 6월 1일, 높이 7.9m, 지름 2m의 팔미도 등탑이 대리석과 콘크리트를 혼용하여 건립되었다. 당시로서는 이와 같은 대형 콘크리트건축물 자체가 초유의 일이기도 하였다. 등대가 건립되기까지의 우여곡절도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당시 강화도조약(1876년)으로 쇄국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조선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선박 입출항이 잦아지자 등대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등대 하나 세우기에도 조선의 국고는 넉넉지 못했다. 그러나 대륙침략을 위해 군수물자 수송로 확보가 시급했던 일본은 막무가내로 조선에 압력을 가해, 억지로 등대를 건립하게끔 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조선으로 몰려오는 세계열강의 등쌀로 조선의 개방을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었다.

 이러한 팔미도 등대가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을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준 아주 소중한 건축물이 되었으니 역사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닌가 보다. 팔미도 등대는 인천상륙작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내었던 것이다. 흔히 ‘켈로 부대’라고 알려진 KLO 부대는 1948년 무렵 대북한 정보수집과 북파공작 전문 첩보부대였다. 정식명칭은 ‘미 극동군 사령부 주한연락처’(Korean Liaison Office)’였다. 창설 당시에는 미국인 5명과 한국인 6명이 전부였고, 책임자는 미 24군단 공작과장 런치 대위였고, 한국인으로는 최규봉이 대장으로 있었다.

 1950년 8월 10일 당시, 대구에서 방어전을 펴고 있던 KLO 부대원에게, 부산으로 가서 백구호를 타라.’는 극비명령이 떨어졌다. 덕적도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 이유를 몰라 궁금해 하던 부대원은 클라크 대위에게서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다.’는 언질을 받았다. 그리고 9월 10일,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인천을 통해 연합군이 상륙할 수 있는 시기를 정확히 알리기 위해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음 총으로 무장한 KLO 부대원 25명은 그날 밤 북한군을 사살하고 등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 개시 전까지 5일 동안 KLO 부대원과 북한군 사이에는 등대를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는데, D-1일인 14일 오후 7시 ‘15일 0시 40분을 기해 팔미도 등대의 등불을 켜라.’는 최후 명령을 받았을 때에는 인민군의 손아귀에 있었다.

 KLO 부대원들은 전원 목숨을 내건 탈환전에 나섰다. 빗발치듯 쏘아대는 적군의 따발총 공세를 뚫고 등대를 되찾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불을 밝혀야 할 등대는 총격전, 육탄전의 와중에 망가져 있었다. 꼭 필요한 나사, 나사못 하나가 빠져버려서 도저히 점화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작전을 지휘하던 최규봉 대장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지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뭔가가 손끝에 잡혔다. 그건 바로 그토록 찾던 나사였다.

 5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팔미도 등대에 불이 켜졌다. 정해진 시각보다 1시간 40분 늦은 2시 20분이었다. 역사상 1시간 40분이 그토록 긴 시간이었을 때는 아마도 이때가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팔미도 등대를 애타게 바라보던 7개국 261척의 연합군 함대는 등불을 신호로 인천항을 향해 돌진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확률 1/5000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지금도 등대 옆에는 KLO 8240부대의 6.25 참전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나사못 하나가 대한민국을 존재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팔미도 등대 이후 등대가 계속 늘어서 지금 국내에는 총 641개의 등대가 서 있다. 팔미도 등대는 이제 지난 106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인천시 지방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그 자리를 지키며 보존되고 있다. 현재의 팔미도 등대는 위성항법보정시스템(DGPS) 등의 최첨단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2003년 12월에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등대이다. 등명기(燈明器) 불빛은 국내기술로 개발된 프리즘렌즈 대형 회전식 등명기로 50km까지 비추며, 10초에 한 번씩 백섬광을 번쩍거린다고 한다.

 근처에는 영화 “천국의 계단” 촬영지인 무의도와 역시 영화 “실미도”로 이름난 실미도가 있다. 팔미도가 공개적으로 개방되기 이전에는 무의도를 거쳐 뱃길로 20여 분간 가야 했지만, 금년 들어 등대 건립 100여 년 만에 직접 팔미도로 가는 유람선이 운항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최근 인기를 끌었던 “꽃보다 남자”의 촬영지라서 요즘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다. 소요 시간은 50여 분 간. 운항 도중에는 중국 우즈베크 벨리댄스 캉캉이나 기예단의 기예 공연 등을 비롯하여, 싱싱한 생선회도 있어 소주 한 잔을 하면서 선상의 낭만을 즐기다 보면 지루함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09.5.16. 원고지 17매)

                  

    (앞 쪽의 것이 최초의 등대, 뒤의 것은 최신 시설의 등대이다. 사진 출처: www.partyboa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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