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미립

할머니는 뭐 낼 거야?

거북이3 2009. 5. 21. 19:55

 

 

이상한 가위바위보.hwp

 

이상한 가위바위보

                                                                 이  웅  재


 병원엘 가면 멀쩡한 사람도 공연히 어딘가가 아픈 것 같다.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위해서 선호하는 그 흰색도 왠지 차갑게 느껴진다. 

 흰색은 깨끗하고 순수한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쌀쌀하다. 싸늘하다. 냉기가 느껴지는 색깔이다. ‘잡됨’이 없는 빛깔이긴 하지만, 그 ‘잡됨’을 침범하지 못하게 지켜야 하는 일은 사실, 매우 피곤한 일이다. 흰 빛 위에다가는 어느 빛깔로라도 칠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 그걸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 것이랴?

 일산병원엘 갔었다. 어느 분이, 옛날 같으면 천수를 다했다고도 할 연세로 돌아가셨고, 나는, ‘그래, 호상이야, 호상.’이라는 기분으로 문상을 갔었다. 상주는 울고 있었고, 덩달아 나도 슬퍼졌다. 이상했다. 왜 내가 슬퍼지는가? 슬픔이란 전염성이 매우 강한 모양이었다. 내가 거기서 슬퍼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평상시에 상주가 나와 각별히 가까웠던 사이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 돌아가신 양반을 알지 못한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상주도 뒤늦게 직장동료로 편입된 양반, 그래서 그저 직장 예의상 행했던 문상이었다.

 나는 그렇게 공연히 피곤하고 아픈 것 같아지고, 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뚜렷하게 슬퍼해야 할 일도 없으면서 어정쩡한 슬픔에 감염된 채 늦은 점심 겸 상갓집에서 제공하는 밥을 먹은 후, 심드렁한 마음으로 문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시간마저도 어정쩡한 시간이라서 지하철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썰렁한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내 앞쪽 자리에는 어디를 가나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의 할머니 한 분과 열 살 내외쯤으로 보이는 손자인 듯한 아이가 있었다.

 지하철을 타면 늘 그러하듯이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눈 가는 대로 그 두 사람에게 무심한 눈길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눈을 감기도 하면서 오후의 느릿느릿 움직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떴다 감았다, 다시 감았다 떴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할머니와 손자, 그들은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앞에는 그림이 인쇄되어 있는 딱지를 놓아두고서…. 그러니까 그냥 하는 ‘가위바위보’가 아니었다. 딱지 따먹기 내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놀이에는 '즐거움'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정해진 목표를 이루어내기까지의 긴장감,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었을 때 느끼게 되는 성취감, 다시 성취감에 따르는 보상으로서의 '즐거움'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놀이는 그네나 널뛰기, 썰매타기 등과 같이 일반적으로 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없는, 단순히 기분전환을 위한 여가 활동으로서의 놀이가 아니었다. 승자가 있고 또 패자도 있기 마련인 ‘내기’였던 것이다. 서양식 개념으로 말하면 게임(game)이었다.

 단순한 놀이에서도 구경꾼은 있기 마련인데, 하물며 게임인 경우이랴? 게임은 구경꾼들에게도 그 ‘즐거움’이 배분되기 때문에 관전료까지 내가면서 야구, 농구, 축구 경기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던가? 물에 물 탄 듯한 내 그 밍밍하던 시간이 갑자기 팽팽하게 긴장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차츰 그들의 게임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가위 바위 보!’

 할머니가 이겼다. 손자의 딱지 하나가 할머니에게로 건네진다.

 ‘가위 바위 보!’

 이번에는 손자가 이겼다. 할머니의 딱지 하나가 손자의 손으로 넘어간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그런데 차츰 이상한 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딱지는 어떤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어 버릴 것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한쪽의 딱지가 좀 적어진다 싶으면, 딱지의 이동 경로가 달라지곤 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이제는 그 할머니와 손자보다도 내가 더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정쩡하던 슬픔도, 썰렁하던 심사도 어느덧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알쏭달쏭하게 느껴지는 다른 사람들의 게임을 보여주는 치료 방법은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왜 그럴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 목덜미 위로 손자의 말 한 마디가 날아와 꽂힌다.

 “할머니는 뭐 낼 거야?”

 “가위!” 

 그리고…, 할머니는 가위를 내었다. 아하, 그거로구나! 그래서 딱지 소유의 형평이 계속 유지될 수가 있었구나.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흥분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대수로울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었다. 기껏 딱지 소유의 형평에서만 유효한 것이라면 크게 대수로울 것이 못 되지 않는가? 할머니는 손자의 딱지가 바닥이 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생각을 한번 비틀기로 했다. 그래, 그건 할머니의 또 다른 배려가 돋보이는 일이었다. ‘가위’를 내겠다는 할머니가 ‘보자기’를 내었다면? 끔찍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가위’를 이기기 위해 ‘주먹’을 낼 손자를 지게 만드는 일이라서 끔찍하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끔찍’하다고 하는가?

 끔찍하다, 끔찍하다, 그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다. 그것이 끔찍한 이유는 바로 손자의 ‘믿음’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믿음이 깨어지는 소리는 기실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 때 나는 소리보다도 훨씬 더 큰 소리일 것이다. 그건 일본의 고베나 중국의 쓰촨 성 대지진 때의 모든 것이 함께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보다도 더욱 참혹한 소리일 것이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할머니가 있는 한 우리들 삶의 세계는 한번쯤 살아볼 만한 세상이 아닐까?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할머니의 딱지가 바닥이 나게 되었다. 이제 손자가 한 번만 더 이기면 게임은 끝난다. 나는 어느덧 손자를 응원하고 있었다. 내려야 할 곳이 가까워서였을까? 손자가 다시 물었다.

 “할머니는 뭐 낼 거야?”

 “바위!”

 나는 맘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게임은 끝난다. 게임은 끝난다.

 그런데 그럴 수가, 그럴 수가? 손자는 ‘가위’를 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깨우쳤다. 믿음, 믿음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할며니는 손자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었고, 손자는 그 믿음을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할머니와 손자는 믿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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