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35) [문체 ③건조체와 화려체]
이 웅 재
다음으로는 수식의 정도에 따른 문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건조체(乾燥體): 미사여구(美詞麗句)와는 절연(絶緣)으로 다만 의사를 전달하면 그만이다. 학술(學術), 기사(記事), 규칙서(規則書) 등 이해(理解) 본위(本位), 실용(實用) 본위(本位)의 문체다. 문예문장(文藝文章)으로는 부당(不當)하다. (李泰俊, 增訂 文章講話, 博文出版社, 1947, p.288)
공허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피하고 정확한 의미 전달에만 집중하는 문체라서 무미건조(無味乾燥)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평명체(平明體)라고도 한다. 이태준(李泰俊)은 홍명희의 ‘온돌(溫突)과 백의(白衣)’, 정인보의 ‘고산자(古山子)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예문으로 들었다.
♣온돌(溫突)과 백의(白衣), 홍명희(洪命熹)
온돌(溫突)
우리 조선 가정의 온돌 제도는 인조조(仁祖朝) 이후로 전국에 보편되었다. 그전에는 한절(寒節)이라도 큰 병풍(屛風)과 두터운 자리로 마루 위에서 거처하고 노인과 병자를 위하여 혹 온돌 한두 간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고 한다.
인조 때 서울 사산(四山)에 송엽(松葉)이 퇴적(堆積)하여 화재가 잦으므로, 김자점(金自點)이 꾀를 내어 인조께 품(稟)하고 오부(五部) 인민에게 명령하여 모다 온돌(溫突)을 설치하게 하였다. 따뜻하고 배부른 것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라, 오부의 받은 명령을 일국(一國)이 봉행하게 되어 송엽(松葉)을 처치하려던 것이 송목(松木)까지 처치하게 되었다.
온돌 제도가 일반으로 행한 후에 큰 폐해가 두 가지 생기었으니, 하나는 울창하던 산림이 차차로 동탁(童濯)하게 된 것이요, 또 하나는 건장하던 국민이 취약(脆弱)하게 된 것이다.
전일(前日)에는 서울 안에 있는 구가고택(舊家故宅)에서 왕석(往昔) 습속의 자취를 살필 수 있었으니 큰집이건만 지금 소위 방(房)이란 것의 수가 적고 마루가 대중없다 할 만큼 많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자취도 찾을 곳이 없다.
백의(白衣)
우리 의복 제도는 역대로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변하여 온 것이니,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에 남자 의복을 당제(唐制)로 변개(變改)하고, 문무왕(文武王) 때에 여자 의상도 당제(唐制)로 개혁하였다 하고, 고려조에 신라 제도와 많이 같았으나, 중엽 이후에 원제(元制)를 모방하고, 말엽에 이르러 명제(明制)를 습용(襲用)한 것이라고 한다.
의복에 백색(白色)을 숭상하는 습관은 최근에 와서 심하였다. 하나, 역사상으로 보면 전래한 지가 자못 오래다 할 것이다. 한서(漢書)에 “弁辰, 衣服潔淸(변진 의복결청)”이라 하니, 결청(潔淸)이란 형용사를 붙이려면 백색(白色)이라야 적당하다 할 것이요, 송사(宋史)에 “高麗士女, 服尙素(고려사녀, 복상소)”라 하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衣皆素白而布縷麂(의개소백이포루추)”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인민의 복색말이요, 왕공귀인(王公貴人)은 금수오채(錦繡五采)를 입었는데 그 의복의 색채로 관등(官等)의 존비(尊卑)를 알게 한 일이 있고, 서민(庶民)은 강자색(絳紫色) 의복을 입지 못하게 금한 일도 있다.
주인 이하 모든 계급이 보통으로 백색(白色)을 상복(常服)하기는 정조(正祖) 때부터 시작한 일이니, 이는 정조가 그 부친 장조(莊祖)를 사모하시는 마음이 많으셔서 종신거상(終身居喪)하신 것처럼 색채 의복을 입으시지 않은 까닭이라 한다. 상중의(喪中衣) 순백(純白)은 우리의 전래하는 속(俗)이다.
온돌(溫突)과 백의(白衣)의 유래를 감정의 개입이 없이 담담히 서술한 글로서, 의미 전달에만 전심(專心)한 글이다. 다음은 ‘고산자의 대동여지도’를 보자.
♣고산자(古山子)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정인보(鄭寅普)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2첩(帖) 부(附) 목록(目錄) 1첩(帖) 합(合)23첩(帖)은 고산자(古山子)의 만든 것이니, 조선인(朝鮮人)의 손으로 된 저선의 지례(地例)—이에 이르러 대성(大成)을 집(集)하였다 할 것이다. 도사(圖寫)의 대례(大例)로 말하면, 온성(穩城)으로부터 제주(濟州)까지 22층(層)을 나누워가지고 1층(層)으로 1첩(帖)을 만든 것이니, 맞후어놓으면 조선(朝鮮) 전형(全形)이 고대로 되고, 떼어놓으면 각층(各層)마다 거기 있는 주군현(州郡縣)이 형세 간편하게 장상(掌上)에 요연(瞭然)하게 되었다. 형(形)이 개사(槪似)하다 하더라도 원근의 척도—실적(實積)과 틀릴 것 같으면 오히려 실용에 맞지 아니하는 것인데 이 도본(圖本)은 그렇지 아니하여 접책 한장 한쪽 면이 종(縱)으로 120여 리, 횡(橫)으로 80리에 당(當)하게 하여 가지고 경위선(經緯線)을 괘화(罫畵)하여 매방(每方)에 10리 됨을 표정(表定)하였다. 이같이 실적(實積)의 진(眞)에 의하여 배포(排布)한 도사(圖寫)인지라, 어디든지 떠들어만 보면 산천의 위치와 정리(程里)의 소밀(踈密)이 대치(大致)를 잃지 아니하게 되었다. …
뜻의 전달에만 충실할 뿐이다. 앞의 글 ‘온돌(溫突)과 백의(白衣)’보다도 더욱 건조한 느낌이다. 다음은 화려체를 보도록 하자.
♣화려체(華麗體): 건조체(乾燥體)와 반대로 건조체가 이지적(理智的)이라면 화려체(華麗體)는 감정적(感情的)이다. 일어일구(一語一句)에 현란(絢爛)한 채색적(彩色的) 수식(修飾)과 음악적(音樂的) 운율(韻律)을 갖는 문체다. 자칫하면 천속(賤俗)해질 위험성이 있다.
‘나는 그믐달을 좋아한다. 그믐달은 요염(妖艶)하고 가련(可憐)하다.’
하면, 그냥 간결(簡潔)한 글이다.
‘나는 그믐달을 사랑한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妖艶)하여 감히 손을 댈 수가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어여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可憐)한 달이다.’(羅稻香의 ‘그믐달’의 一部)
하면, 화려체(華麗體)라 할 것이다. (李泰俊, 增訂 文章講話, 博文出版社, 1947, pp.288-289)
수식어가 풍부하고 다양한 비유어가 등장하여 회화적인 묘사 등으로 실제의 대상을 지나치게 미화시킴으로써 공허한 느낌을 가져올 수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먼저 나도향의 ‘그믐달’을 보자.
♣그믐달, 나도향(羅稻香)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도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럽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女王)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치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恨)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이 머리를 풀엇드리고 우는 청상(靑孀)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쇠 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치어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恨)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 주정군과 놀음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적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情)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恨)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여나고 싶다.
얼마나 화사(華奢)한 느낌인가? 화려체의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면, 그는 문장도(文章道)에 통달한 글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화려체를 쓰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마는, 문장 수련을 위해서는 연애편지라도 쓰듯 화려체에 대한 연습 정도는 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대표적 화려체 문장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정비석의 ‘산정무한’을 보기로 하자.
♣산정무한(山情無限), 정비석(鄭飛石)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은 몸이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靈峯)들을 대면(對面)하려고 새댁 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峻峯)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容易)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밋밋하게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野山)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氣稟)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조반(朝飯) 후 단장(短杖) 짚고 험난한 전정(前程)을 웃음경삼아 탐승(探勝)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원근(遠近) 산악이 열병식(閱兵式)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萬山)의 색소는 홍(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山色)은 붉은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錄)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橙)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朱紅)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색(色)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다기(多岐)하다. 혹은 깎은 듯이 준초(峻痒)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溫厚)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凡俗)이 아니다.
산의 품평회(品評會)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無窮無盡)이다. 장안사(長安寺)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鬱鬱蒼蒼) 우거진 것은 다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二等邊三角形)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茶禮塔)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禮佛床)만으로는 미흡(未洽)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千萬不當)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物慾)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溪流)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峽谷)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찻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 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紙面)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明鏡臺)! 부앙(俯仰)하여 천지에 참괴(慙愧)함이 없는 공명(公明)한 심경을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惡心)을 여기서만은 정(淨)하게 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黃泉潭)을 발밑에 굽어보며 반공(半空)에 외연(巍然)히 솟은 절벽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화장경(化粧鏡) 그대로였다. 옛날에 죄의 유무(有無)를 이 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影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日常)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可驚)할 일인가?
신라조(新羅朝) 최후의 왕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 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송(念誦)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業罪)를 명경(明鏡)에 영조(暎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운상기품(雲上氣稟)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登極)하실 몸에 마의(麻衣)를 감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佛法)이 말하는 전생의 연(緣)일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 나가니, 앞으로 염마(閻魔)처럼 막아서는 웅자(雄姿)가 석가봉(釋迦峯)! 뒤로 맹호(猛虎)같이 덮누르는 신용(神容)이 천진봉(天眞峯)! 전후좌우를 살펴봐야 협착(狹窄)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협곡(狹谷)!
몸에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黃泉江)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유래담(由來談)을 길잡이에게 들어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동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深海)같이 유수(幽邃)한 수목(樹木)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至賤)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 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산 전체가 요원(燎原) 같은 화원(花園)이요, 벽공(碧空)에 외연(巍然)히 솟은 봉봉(峯峯)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난만(百花爛漫)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不意)의 신화(神火)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眞珠紅)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海綿)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 고운 줄은 몰랐다. 김 형(金兄)은 몇 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畵幅)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蓮花潭) 수렴폭(垂簾瀑)을 완상(玩賞)하며, 몇십 굽이의 석계(石階)와 목잔(木棧)과 철삭(鐵索)을 답파(踏破)하고 나니, 문득 눈앞에 막아서는 무려 3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5천 척의 망군대(望軍隊)―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廣闊)하고 웅장(雄壯)하고 숭엄(崇嚴)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白馬峯)은 바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毘盧峯)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밖에도, 유상무상(有象無象)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戰時)에 할거(割據)하는 군웅(群雄)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밑은 천인단애(千仞斷崖), 무한제(無限際)로 뚝 떨어진 황천계곡(黃泉溪谷)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단장(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마하연(摩詞衍)의 여사(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歡待)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旅裝)을 풀고 마하연함(摩詞衍庵)을 찾아갔다. 여기는 선원(禪院)이어서,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 수는 실로 30명은 됨직하다. 이런 심산(深山)에 웬 중이 그렇게도 많을까?
한 없는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無限淸山行欲盡]
흰 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白雲深處老僧多]
옛 글 그대로다.
노독(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동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溫故之情)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동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落花) 송이 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소린가 했더니 물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는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은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春香)이 태형(苔刑) 맞으며 백(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陋名) 쓴 장화(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告祝)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定配)가는 카추샤의 뒤를 네프 백작(伯爵)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갔다.
자꾸 깊은 산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군소봉(群小峯)이 발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옥하고 음산(陰散)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은제(銀梯), 금제(金梯)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연무(煙霧)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우장(雨裝)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일진 광풍(一陣狂風)이 어디서 불어 왔는지, 휙 소리를 내며 운무(雲霧)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 폭 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 가며 짜 놓은 비단결 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는 꽃보다 단풍이 배승(倍勝)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를수록 우세(雨勢)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濃霧) 속에서 홀현홀몰(忽顯忽沒)하는 영봉(靈峯)을 영송(迎送)하는 것도 과히 장관(壯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주(暴注)로 내리붓는다. 만 이천 봉을 단박에 창해(滄海)로 변해 버리려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絶頂)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童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객(先着客)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뒤집히는 듯하다. 용호(龍虎)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로(大怒)하신 것일까? 경천동지(驚天動地)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지, 이렇게 만상(萬象)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장(肝腸)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진다. 변환(變幻)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최고점(最古點)이라는 암상(巖上)에 올라 사방을 조망(眺望)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뿐,—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 외․ 해(內外海) 삼 금강(三金剛)을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 육천 척에 다시 신장 오 척을 가하고 오연(傲然)히 저립(佇立)해서, 만학천봉(萬壑千峯)을 발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千軍萬馬)에 군림하는 쾌승 장군(快勝將軍)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樹中公主)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 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서경(敍景)도 서정(抒情)도 모두가 화려한 수식으로 점철되었다. 필력(筆力)이 평상을 훌쩍 넘어섰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글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坡)도 ‘원생고려국 일견금강산(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이라고 했다는 금강산, 그 금강산을 직접 가보는 것보다도 더욱 실감 있게 묘사하고 감상한 화려체의 대표적인 명문장이다. (09.9.28. 원고지 61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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