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40) [현재 지향적인 글쓰기]
이 웅 재
우리는 늘 ‘현재’를 살고 있다. 과거는 ‘살았었고’, 미래는 ‘살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늘 ‘현재’밖에는 없다. 그런데 그 ‘현재’란 어떠한 것인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시간(時間)’이란 ‘때의 흐름’이라 풀이되어 있고, ‘현재(現在)’는 ‘지금의 시간’이라고 하였다. 위키 백과에서는 ‘현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경계선인 '현재'는 그 크기가 0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차’ 하는 사이에 과거가 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으며, 물리학에서 '현재' 라는 개념을 배제하고 과거와 미래만 가지고 실험을 하여도 큰 문제가 없다는 점에서도 유추해 낼 수 있다.”고 하였다. 현재란 ‘그 크기가 0’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현재란 ‘계량화할 수 없는 시간’,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는 시간’이라는 말이겠다. 말하자면 우리는 늘 ‘현재’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 현재는 늘 우리를 배반하고 떠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 ‘시간’ 자체의 ‘현재’는 잡아둘 수가 없다. ‘미래’로부터 슬금슬금 다가오는 현재는 눈 깜빡할 사이에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지나가 버리고 만다. ‘늘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면서도, 또한 우리 모두는 결코 ‘현재’와는 오랜 사귐을 할 수가 없다. 현재란 잡아둘 수가 없는 ‘바람둥이’라고나 할까? ‘노름쟁이 남편은 마누라 팔아먹지만, 바람둥이 남편은 옷이라도 남는다.’고 했다던가? 그래서인지 ‘현재’란 매우 가까이 느껴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손목 한번 잡아보는 일이 없이 가버리고 마는 존재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야말로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입을 모아 칭송하는 것은 아닌지?
현재란 늘 흘러가는 것, 잠시도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 그래서 늘 우리는 현재와 함께 하면서도 또한 현재와 함께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 콧대 높은 ‘현재’를 꼼짝 못하게 붙잡아둘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순간 포착’밖에는 없다고 여겨진다. ‘순간포착’이 가능한 것, 그것은 아마도 ‘사진’으로 찍어두는 일,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도 싶다.
사람들은 사진 찍히기를 좋아한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능한 한 오래 남기고자 하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는데, 어디 그 이름을 남기기가 쉬운 일이겠는가? 이름을 남길 만큼 사회적 명성을 얻는다는 일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름은 못 남긴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모습이 나마 남겨 놓자는 것인지?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100일 사진, 1년 지나 돌 사진, 입학 기념, 졸업 기념, 여행에서는 여행 기념, 그리고 허구많은 무슨?―식?자가 붙는 자리에서마다 사진은 필수적으로 찍히는 것이다. 요즘엔 아예 태어나기 전 뱃속에서의 태아사진까지도 찍고 또 찍는다. 그때 그 당시의 ‘현재’를 기념하자는 것이다.
왜들 그렇게 찍히기를 좋아하는가? 찍어주는 일보다 찍히기를 좋아한다는 것, 능동적인 일보다 피동적인 일에 그렇게 관심들을 표현하는 일은, 다른 일에서라면 아마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V’ 자를 좋아하게 되고, 한국인들인 경우에는 ‘김치’를 먹는 일 이외에 발음하는 일로서도 매우 중요시하게 되어 버렸다.
사진 찍히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일은 사진이야말로 ‘현재’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어서, 그 자리에(그 현장, 그 시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정치 신인들이 유명 정치인들과 어떻게 해서라도 사진 한 장을 남기려고 하는 안쓰러울 정도의 노력은 ‘친분과시용’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라서 응당 그럴 수 있는 일로 여길 수가 있을 것인데, 반대로 유명 정치인들은 아예 무명인들과의 사진을 찍어 서민적인 인상을 남기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사진을 남기려는 중고등학생들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들에게는 ‘현재’ 그 상대와 ‘함께’ 지냈다는 것이 무척이나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현재’를 가장 꾸밈없이 붙잡아둘 수 있는 사진, 그런 사진을 우리는 흔히 ‘스냅 사진’이라고 부른다. ‘스냅 사진’이야말로 우리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이 라고들 생각한다.
이제는 사진술도 많이 발달하여 예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하겠다. ‘사진술’이라는 단어에 ‘술(術)’ 자가 들어 있는 것만 보아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리라. 그러다 보니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포착하는 것’이 아닌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사진관을 지나가면서 보라. 거기에 걸려 있는 수많은 사진들 중에서는 소위 ‘예술 사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진들도 상당수 진열되어 있고, 그러한 사진들을 보면, 불필요한 부분들은 극도로 생략되고, 주제와 관련되는 대상만이, 있는 그대로의 객관이 아닌 주관적인 의미를 말하면서 걸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물 사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진 속의 주인공을 부각시키는 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마이너스가 되는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시켜 버린다. 이렇게 볼 때, 요사이의 사진은 ‘어떻게 있는 대로의 모습을 찍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어떻게 불필요한 부분을 생략시켜 버리느냐??하는 것이 그 기술이라고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사진의 용도도 따라서 많이 변모하였다고 하겠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오랫동안 보존하겠다던 의도에서부터, 사회적으로 널리 알리자는 광고나 선전으로서의 사진, 신문 기사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진, 또는 그저 의례적으로 사용되는 사진들도 있지 않은가?
주로 정치가나 연예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사진이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횟수로서 그 사람의 비중 및 인기의 척도로 삼을 수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무명 인사들에게서는 사진이 기사화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을 때도 있다. 고리키의 ‘이탈리아 이야기’ 속에 나오는 명언은 그러한 상황을 매우 잘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의 사진이 신문에 나오는 것은 범죄를 범했을 때에 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신문에 사진이라도 한번 나 보았으면…하는 생각은 무의미한 생각, 아니 잘못하다간 큰일 날 생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와는 약간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오래 전 남산에 있었던 ‘뉴남산관광호텔’ 화재 발생 시의 경우를 들어 보자. 생과 사의 갈림길을 카메라로 담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본의 아니게 사진을 찍히게 된 장본인의 입장으로서는 그리 달가운 사진은 아닐 것이다. 달갑기는커녕 어쩌다가 그런 사진이 신문 지상에까지 나 버리고 말았는가 하고 두고두고 한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진이라고 해서 무조건 많이 찍히는 것만이 좋은 일은 아니다.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될 만한 내밀스런 시간이 찰칵 카메라에 담겨졌을 때의 곤혹감이나, 국가의 기밀이 스파이들에 의해 필름에 담겨졌을 때 느끼는 절박감 등은 사진 찍히는 것이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주 여실히 느끼게 해 주는 일들일 것이다.
전장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연연해 들여다보는 어머님 사진이나 애인의 사진은 오히려 숭고한 느낌과 순박한 인간성을 느낄 수가 있으나, 수사관의 물증으로서 제시된 현장 사진이나 시체의 사진에서는 비정한 싸늘한 맛을 느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는 신비의 인물로 더욱 신화 속의 주인공으로 군림하게 되는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범법자의 경우에는 집에 남아 있는 사진 한 장으로 전국에 수배되어 옴치고 뛸 수 없는 처절한 입장에 몰리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에야 별로 많은 일이 아니나, 사진 한 장으로 자기와 평생을 함께 해로할 배우자를 선택하던 것도 그리 먼 옛날의 얘기는 아니었다.
한 장의 사진 ― 그 속에는 수많은 사연이 숨어들어 있는 것이니, 너무 가볍게 대하지는 말자. 나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진이라도 그 장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예컨대, 결혼식장에서의 사진을 생각해 보자. 한껏 축하하며 축하받으며 모여서 찍은 사진이 아주 엉망으로 현상이 되었을 때 당사자들이 느끼는 분노며, 일껏 정성들여 모여 서서 찍었더니 그만 깜빡 필름을 넣지 않고 찍었다거나, 혹은 렌즈의 뚜껑을 닫은 채로 찍었다든가 하게 되면, 그 얼마나 허망한 일이랴!
?여보세요!?
?어이, 김 선생!?
야외에 놀러 나갔을 때, 맥주라도 몇 잔 마시고 거나해진 채, 으슥한 곳을 찾아 한참 신나게 배설의 쾌감을 맛보고 있을 때에, 느닷없이 사람을 불러 놓고는, 웬 일인가 싶어 얼굴을 돌려보니 짓궂은 셔터가 찰카닥! ― 차라리 그런 사진은 애교가 있어 좋다고나 해 둘까?
열심히, 열심히 포즈 잡고 찍었더니, 웬 걸, 주인공은 엑스트라로 되어버리고, 뚱딴지같이 옆에 서 있던 사람이나 지나가던 사람이 클로즈업되어 화면을 덮어 버렸을 때의 주객전도는 또 어떤가?
사진도 잘 받는 사람이 있고, 잘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 보기에는 그렇게 예쁘거나 그럴 듯하지 못해도 사진에서만은 멋지게 나오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내가 항상 부러워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나는 우선적으로 멋지게 생겼을 리는 없다는 얘기이고, 생기지나 못했으면 사진이라도 잘 나온다면 괜찮겠는데, 미안스럽게 사진발도 잘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별로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지 않고, 따라서 이것이 내로라고 내놓고 떠들만한 사진도 별로 없는 형편이다.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럴 듯하게 한 장 사진이라도 찍어준다면, 그 이후부터는 나도 사진 예찬론을 쓸 수 있겠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글을 써 버리고 말았는가 보다.
‘현재’를 붙잡아두는 일은 사진 말고도 ‘녹음’이 있을 수도 있다. 사진은 ‘시각적’인 현재 보존 방법이라고 한다면, ‘녹음’은 ‘청각적’인 현재 보존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따져 보자. 분명 그것들이 ‘현재’라는 시간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가 있는가를….
사진이나 녹음, 그건 분명 ‘기록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시간, 곧 ‘과거’의 어느 ‘순간’을 보관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지고 본다면, 그것은 이미 ‘과거’에 대한 증거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은 ‘현재’를 ‘현재’로 보관하는 일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시간은 흐르는 속성을 지녔다. 그것을 멈추게 하거나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빛보다도 빠른 비행기가 탄생되면 어제의 ‘현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들 하던데, 글쎄, 그럴 수가 있을까? 그 어제로 되돌아가서 과수원의 사과 하나를 따먹는다면, 오늘 그 과수원에서 수확하여 시장에 나온 사과 하나가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인가? 이미 그 사과를 사 간 사람은? 아니, 그걸 사다가 먹어버린 사람은? 그 모든 것이 어제로 되돌아간다면, 사과를 사 간 사람도, 그걸 먹어버린 사람도 다 함께 어제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늘이 갑자기 어제가 된다. 그렇다면 어제도 느닷없이 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게 다시 오랜 옛날로 되돌아가게 되어버리고 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인가?
우리는 가끔 외국여행을 하면서 같은 날을 두 번 사는 수가 있다. 소위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 생기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상 계산하는 날짜를 중복하여 살아갈 뿐인 것이다. 똑같은 날짜를 산다고 해서 어제 9시에 먹은 밥을 오늘 9시에 또 먹게 되지는 않는다. 시간은 분명 흘러가 버렸다. 단지 그것을 계산하는 물리적인 방법에서의 중복된 시간을 살게 되는 일일 뿐인 것이다.
‘현재’란 그러니까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미래는 곧 현재가 되어버리고, 현재는 곧 과거가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너무 현재에 매달리지 말자.
나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존재하지 않는 내가 존재하는 것은 순간순간일 뿐이다. 그 순간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일진대,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붙잡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저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나가는 것만이 그나마 나를 온전히 지키는 일이 아닐까?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서 가장 긴 시간은 아마도 ‘영겁(永劫)’일 것이다. ‘겁(劫)’이란 천상에서 100년에 한 번씩 선녀가 하강하여 그가 입은 하늘하늘한 천의(天衣)로서 집채 만한 바위에 스쳐 아주 작은 모래알 하나 정도씩 마모시키기를 반복하여, 그 바위가 다 없어질 때까지를 ‘1겁’이라고 한단다. 그렇게 ‘겁(劫)’ 자체가 무한한 시간인데 거기에 ‘영(永)’ 자가 덧붙은 것이다. 그러니 그 시간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 상대는 ‘찰나(刹那)’이다. 억지로 말해서 1초의 1/75라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찰나에도 ‘500생멸(生滅)’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하루살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짧은 일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반대로 우리 인간의 수명 따위를 ‘영겁’의 세월 속에서 바라볼 때는 그저 ‘찰나’나 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영겁’의 시간에서 볼 때에는 아등바등 살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찰나’의 시간에서 생각하면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삶을 계획하여야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주어진 삶,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시간을 만물 중의 가장 귀중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낭비하는 것은 최대의 낭비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B. 프랭클린은 말했다. 아무리 찰나적인 시간이라도 우리는 그것을 아껴야 한다. 글을 쓸 때에도 바로 그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현재를 ‘요즈음’이나 ‘오늘날’ 정도로 확대하여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이 순간을 아껴가면서 보고 듣고 느낀 일들을 열심히 쓰는 일,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09.11.29. 원고지 3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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