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성적과 좌석 배치와의 상관관계
이 웅 재
대학시절의 얘기다. 그때 나는 무척이나 가난했다. 대학생이 된다는 건 사실 ‘언감생심’, 하지만 나는 일대 결단을 내린다. 모든 노력을 동원해서 입학금만 마련해서 대학생이 되자고.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어도 ‘명색이 대학 중퇴’가 되지 않느냐고.
‘3・8따라지’에겐 친척도 별로 없다. 하지만, 온갖 친척들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입학금은 마련했다. 그래서 명색이 대학생이 되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라고 했던가? 경마는 원래 ‘견마(牽馬)’다. 따라서 ‘경마 잡히다’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타고 있는 말을 몰고 가게 한다는 뜻이다. 욕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속담이다. 나도 ‘경마를 잡히고 싶었다.’ 다시 말해서 대학을 온전하게 졸업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학비를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결과 다행히 학내(學內)의 ‘자조장학회(自助獎學會)’에 들어가서 학비를 벌기 시작했다. ‘자조장학회’란 학내에서의 모든 인쇄 및 복사물을 서비스하는 업무를 대행하는 학생들의 아르바이트 기관이었다. 뼈 빠지게 노력하면 겨우 등록금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단체였다. 하지만, 거기에서의 아르바이트는 정상적인 대학생활은 정말로 ‘언감생심’, 포기해야만 했다. 주문 받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늘 수업시간 따위는 빼먹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시험기간이 되었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때 ‘태산’이란 말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았다. 얼마나 높은 산이기에, ‘태산이 높다 하되….’와 같은 시조까지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말인가? 알고 보니 1,532m였는데….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아마 100m였다고 하더라도 ‘태산이 높다 하되….’를 되뇌었을 터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이던가? 방법이 없었다. 낙제는 면해야 최소한도의 체면은 유지될 것이 아닌가? 스스로 벌어서 공부하겠다는 ‘자조장학회’의 취지를 보아서도 학점 하나 제대로 따지 못하는 대학생이란 아무래도 ‘자조장학회’의 이름과는 걸맞을 것 같지는 못한 일이리라.
수업시간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주제에 제대로 된 시험을 치를 수 있을 것인가? 해서 난 꼼수를 쓰기로 결정했다. 시험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시험장소로 가서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맨 뒷자리에 앉았다. 이 정도 자리라면, 더러 다른 학생의 시험지를 슬쩍 엿볼 수도 있겠고, 더군다나 몇 명에게는 SOS까지도 쳐놓은 처지였으니 걱정은 붙들어 매어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국문학개론’이었던가? 교수님은 당대의 석학 김동○ 교수님, 교수님께서는 시험지를 나누어주셨다. 백지였다. 학생들이 시험지를 다 받은 것을 확인하시고는 실내를 일별하시었다. 그러더니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웅재, 여기 맨 앞자리로 나와!”
이런 걸 ‘청천의 벽력’이라고 하던가! 그러나 어쩌랴? 모든 걸 포기하고 교수님의 말씀을 좇았다. 맨 앞자리, 교수님은 내가 착석하는 것을 보고서야 칠판에다가 시험문제를 쓰시기 시작했다.
‘1번. 무엇무엇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시오.’
눈앞이 캄캄한 나는 그 ‘무엇무엇’에 대하여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이 꽉 막혀 버렸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쥐어짜고 쥐어짜고 하다 보니 한 가닥 실마리가 잡혔다. 그 실마리를 잡아당겼다. 머릿속에서 엉켰던 실타래가 솔솔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그 피어오르는 생각대로 열심히 연필을 놀렸다. 그럭저럭 1번 문제를 다 풀었다.
“자아, 이젠 2번이다.”
교수님은 2번 문제를 칠판에다 쓰시기 시작했다. ‘그래, 자신의 견해를 쓰라고 했으니 정답이 따로 있는 건 아니잖아?’ 나는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기로 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되살아났다. 나는 애써서 2번 문제도 풀었다.
“이웅재, 다 썼나? 그러면 이젠 3번이다!”
교수님은 내 답안지를 흘낏 쳐다보고 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내 답이 다 씌어지면 다음 문제를 내시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답안 작성에 필요한 배정 시간을 내 답안지에 맞추시는 것이었다. 학생마다 답안 작성에 필요한 시간은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을 내게 맞추었으니 이건 내게 대 횡재가 아닐 것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더니, 나에게 그 ‘솟아날 구멍’을 만들어 주시는 교수님.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것다! 차츰 나는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면 된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 것이었는지, 3번 문제도 억지로 억지로 풀 수가 있었다.
“다음은 4번!”
웬 시험문제가 그렇게나 많담? 허나. 이젠 걱정 같은 건 골동품 가게로나 보내버리면 만사 OK! 잠시 시험문제를 곰곰이 분석하고 나서는 곧바로 답안 작성으로 돌입하였다. 이렇게 술술 풀릴 수가? 무기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시험을 치르면서 또 하나의 인생을 배우고 있었다. 매사 맞닥뜨리는 일 앞에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
“마지막 문제, 5번이다!”
그렇게 하여 시험시간 종료 벨이 울릴 때에야 내 답안은 완료되었다. 태산 같은 걱정에서 하늘을 날아올라 갈 듯한 가뿐한 마음으로 시험을 마쳤다. 강의실 밖으로 나온 나는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 몇 점이 여유롭게 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기분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 가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시험 성적은 좌석 배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니, 아니다. 교수님의 시험문제 제시 방법이 어렵게 학비를 벌어 공부하고 있는 나를 위한 배려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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