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문화

어르신문화프로그램 <성남문화해설사 양성과정> 제12강 (2012. 8.22.)

거북이3 2012. 5. 31. 22:06

 

고전문학 속의 성남.hwp

 

어르신문화프로그램 <성남문화해설사 양성과정> 제12강 (2012. 8.22.)

     고전문학 속의 성남

                                                                                이웅재(전 동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수필가)

 

 

1. 남한산성은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성남시의 역사는 일천하다. 따라서 고전문학 작품 속에서 성남시가 등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의 성남시에 해당하는 지역이 고전 속에 등장할 수는 있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남한산성이라고 하겠다. 이제껏 남한산성은 패전의 병자호란을 겪은 곳이라고 하여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우세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자.

먼저 남한산성은 신라의 경주, 고구려의 평양성과 아울러 솥발같이 삼국시대를 이루어 지내던 온조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터전이라는 점부터 인식하자. 한 발 양보하더라도 남한산성은 신라가 백제를 병합한 뒤 문무왕(文武王)이 쌓은 주장산성(晝長山城) 일명 일장산성(日長山城)으로 그 역사가 유구하다.

그런가 하면, 남한산은 남성적인 북한산과 짝을 이루는 여성성, 모성성을 지니며 서울을 보비하고 있는 중요한 산이다.

더욱 자랑스러운 점은 남한산성은 한 번도 외적에 의하여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라는 점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은 삼전도(三田渡)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 병자호란의 실상을 좀더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하여, 고전 작품은 아니지만,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의 「남한산성」이라는 역사기행문의 몇 부분을 살펴보자.

 

…때마침 조선에는 왕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가 승하하신 때라 만주에서는 그해 2월에 국상을 조표(吊表)한다 표명하고 사자 용골대(龍骨大) 부장 마보태(馬保太)는 종졸(從卒) 290여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나왔다.…

여태껏 청국은 일개 …오랑캐로 태조, 태종 이래에 여러 번 조공을 들어왔던 하잘 것 없는 눈 아래 보던 무리였던 것이다.…

인조대왕도 마침내 여론에 휩쓸려 사서(使書)는 받지 않고 조제(吊祭)만은 아니 받을 수 없다 하여 금교(禁橋)에 헛장막을 치게 하고 허위로 조상을 받게 하였다.…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절을 하면서도 잔뜩 의심을 품고 있는 중에 바람에 펄떡 장(帳)자락이 움직이매 장막 뒤에는 무기를 가진 도부수(刀斧手)들이 매복하여 있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던 청사 용골대는 그대로 곧 자기네를 죽이려 한 줄 직각하고 올리는 술잔을 동댕이치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달아나기 시작했다.…만주는 조선의 결의를 알자 일거에 조선을 정벌하기로 된 것이다.…

해시(亥時)가 지난 뒤에야 겨우 남한산성에 도달했다. 비참하다. 이때 호종한 신하는 겨우 열 명뿐이다.…산성 안에 저장되어 있는 물품은 백미와 피잡곡 얼러서…1만3,4천 명 사람이 겨우 한 달 남짓 먹을 만한 곡식이다.…

농성 격전 4,5일에 드디어 상감은…만고한을 품으신 채 삼전도(三田渡) 호진(胡陣)에 나아가 항서(降書)를 올리시니 실로 조선사에 처음 되는 천고의 굴욕이었다.

 

2. 남한산성이 배경으로 나오는 고전 작품들

이제 구체적인 고전 작품 속의 성남(남한산성)을 찾아가 보도록 한다.

ⓛ『박씨전(朴氏傳)』

조선 숙종 조에 발간된 작자 미상의 소설로 대표적인 군담소설이다. 『박씨부인전(朴氏夫人傳)』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다수의 독자를 확보한 고전소설은 대체로 방각본(국가기관이 아닌 私家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간행한 목판본 책) 형태의 이본들이 많은데, 이 『박씨전』은 방각본 없이 70여 종의 필사본만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주 독자가 규방(閨房) 그것도 상류층의 규방에서 읽혀졌던 소설이라는 점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조선 인조 때, 홍문관 부제학 이득춘(李得春) 결혼한 지 40년이 되어서야 아들 이시백(李時白)을 얻었다. 그는 강원 감사로 부임할 때에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금강산에 사는 박 처사의 딸과 혼인을 시켰다. 시백은 첫날밤에 박씨가 천하에 박색임을 알고 실망하여 그날 후로는 박씨를 돌보지 않았다. 박 소저는 시아버지께 후원에다 피화당(避禍堂)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홀로 거처하였다. 박 소저는 비루(피부가 헐고 털이 빠지는 병)먹은 말을 사서 백 배 이윤을 남기고 시백이 과거를 보러 갈 때 백옥 연적을 주어 과거에 장원 급제하도록 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시집온 지 삼년이 된 어느 날 박씨는 시아버지에게 친정에 다녀올 것을 청하여 구름을 타고서 사흘 만에 다녀온다. 박 처사는 딸의 액운이 다하였다면서 도술로써 딸의 허물을 벗겨주니, 박씨는 일순간에 절세미인으로 변한다.

 한편, 호왕은 조선을 침공하기에 앞서 임경업과 시백을 죽이려고 공주 기룡대를 보낸다. 그러나 박씨가 기룡대의 정체를 밝히고 혼을 내어 쫓아버린다. 두 장군의 암살에 실패한 호왕은 용골대 형제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조선을 치게 한다.

호국 세력이 강성해짐을 안 박씨는 시백을 통하여  왕에게 호병이 침공하였으니 남한산성으로 피란 갈 것을 청했다. 왕은 남한산성에서 적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나 피해가 너무 커서 박씨의 의견을 좇아 호국과 화친을 한다. 왕대비전과 세자, 대군을 데리고 도성에 도착한 용골대는 그의 동생 용홀대가 박씨에게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 박씨를 찾아갔으나 박씨의 도술을 이기지 못해 겨우 목숨을 보존한 채 퇴군하던 용골대는 그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임경업을 만났다. 임경업은 후일을 기약하자는 내용이 담긴 박씨의 편지를 받고 용골대 부대를 호국으로 돌려보낸다. 인조는 박씨 부인의 지략을 칭송하여 정경부인에 봉한다.

 

이 소설은 실재 인물이었던 인조대왕, 이시백, 임경업 및 호장(胡將) 용골대 등을 등장시키는 한편 박씨라는 가공인물을 등장시켜 병자호란의 쓰라린 패배를 정신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존여비 시대에 여성의 능력을 우위에 놓은 독특한 작품이기도 하다. 게다가 외모 지상주의의 남성 위주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측면도 보이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변신 모티프를 사용함으로써 당대 사회 통념을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고 보인다.

 

②박지원의 『허생(許生)』

1780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조선 시대의 사회적 병폐와 당시의 시대상, 양반들의 헛된 명분론을 풍자하고, 이상향을 제시해 주기도 한 풍자 소설이다.

 

허생은 10년 계획을 세우고 글공부에 몰두한다. 7년째 되는 어느 날 ‘장인 노릇도 못하고 장사도 못 한다면 도둑질이라도 하라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다. 이에 허생은 장안의 갑부인 변씨를 찾아가서 만 냥의 돈을 빌린다. 허생은 그것으로 매점매석을 하여 큰돈을 벌면서 무역이 잘 되지 않는 현실을 탄식한다. 그는 도둑떼들을 회유하여 이상향으로 보이는 섬나라를 세운다. 그리고는 혼자서 돌아와서 변씨에게 돈을 갚는다.

 

변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사대부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게 당했던 치욕을 씻어 보자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선비가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 우선,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같은 분은 적국(敵國)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었건만 베잠방이로 늙어 죽었고, 반계거사(磻溪居士) 유형원(柳馨遠) 같은 분은 군량(軍糧)을 조달할 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저 바닷가에서 소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 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구왕(九王)의 머리를 살 만하였으되 바닷속에 던져 버리고 돌아온 것은, 도대체 쓸 곳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변씨는 허생에게 이완(李浣)이라는 정승을 소개시켜 북벌론을 의논한다. 허생이 이완에게 3가지 방책을 제시하였지만 이완은 모두 해결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에 허생은 이완을 꾸짖으며 칼로 찔러 죽이려 하자 이완은 도망쳐 나온다. 그 다음날 이완이 다시 허생의 집을 찾아갔으나 허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③『임경업전(林慶業傳)』

18세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작자 미상의 군담소설이며 영웅소설이다. 민중적 영웅 임경업의 비극적 일생과 박씨전과 마찬가지로 청(淸)나라에 대한 정신적 승리감을 보여주어 당시 위축된 우리 민족의 사기를 진작시켜준 작품이다. 『님장군전』,『림경업전』,『임충신전』 등 목판본과 활자본의 여러 이본이 있다. 정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임경업 관련 자료집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에 민간설화가 더해져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임경업은 비범한 인물로서 무과에 급제한다. 사신 이시백(李時白)의 무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가달(可達)의 침입을 받은 호국이 명에 구원병을 청하자, 명군을 이끌고 출전, 호국을 구하고 귀국한다.

호국이 힘을 길러 조선을 침략하려 하자, 임경업이 의주 부윤으로 나가 방어하니, 호국군은 임경업을 두려워하여 의주를 피하고, 바다를 통해 조선을 침범하였다. 임경업만 믿고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은 조선은 하루아침에 궁궐을 빼앗기고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고 마침내는 항복 문서를 쓰게 되었다. 임경업은 조선왕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는 호군을 치고자 했으나, 인질로 잡혀 가는 왕자들 때문에 포기한다.

호왕은 임경업을 없애고자 그에게 명나라를 치도록 요구한다. 임경업은 명과 내통하여 거짓 항복을 받고 귀국하는데, 이를 알게 된 호왕이 그를 잡아들이려 한다. 임경업은 명나라로 도망하여 명군과 함께 호국을 치려고 하다가 독보(獨步)라는 중의 배반으로 잡혀간다. 호왕은 임경업의 당당한 태도에 감복하여 인질로 잡았던 왕자들과 함께 조선으로 돌려보내 준다.

조선의 김자점(金自點)이 자신의 역모에 방해가 될까 하여 그를 살해한다. 임금은 임경업의 억울한 죽음을 알고 김자점을 죽인 다음, 임경업의 충의를 포상한다. 자손들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낙향하였다.

 

④『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몽유록계 소설은 환몽구조를 통해 사회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로 창작되는데, 그 중 현실비판 의식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한문본『강도몽유록』이다. 지은이, 연대 미상이다. 주로 여성들이 등장하여 남성들을 비판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적멸사(寂滅寺)의 청허선사(淸虛禪師)가 강도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연미정(燕尾亭) 기슭에 움막을 짓고 지낸다. 그는 꿈에, 열다섯 여인의 혼령이 나와 각각의 울분을 토로하는 대화를 엿듣는다. 첫 번째 부인은 당시 영의정을 지내고 체찰사로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모시던 영의정 김류(金瑬)의 아내이자 강화검찰사 김경징(金慶徵)의 어머니인 유씨(柳氏)일 것으로 추정된다. 남편이 능력 없는 아들 김경징(金慶徵)에게 강도 수비의 책임을 맡겼고, 아들은 술과 계집에 파묻혀 강도가 쉽게 함락되게 하였다며, 남편과 아들을 함께 비난한다.… 열다섯 번째 여인은 기생으로서, 뒤늦게 정절을 지키려 하였으나 전쟁을 만나 목숨을 버렸다는 얘기를 하면서, 전쟁 중에 절의 있는 충신은 하나도 없고, 정절은 오직 여인들만이 보여 주었다고 개탄한다. 여인들의 통곡소리에 청허선사는 꿈에서 깬다.

 

⑤『산성일기(山城日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당한 치욕의 역사는 주로 ‘일기’라는 형태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의 대표적인 작품이 어느 궁녀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필사본『산성일기』다. 병자호란 당시의 사실을 객관적 관점에서 기록한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면서, 『계축일기(癸丑日記)』와 함께 국문학사상 내간체 일기의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항복하기까지 약 50여 일 간의 사실이 사적인 내용은 하나도 언급된 것이 없이 기록된 글이다. 작자는 문장에도 매우 능하여 유려한 필체로 박진감 있게 표현하고 있어 문학적 가치가 더욱 높은 작품이다.

 

십구 일의 남문 대쟝 구굉(具宏)이 발군하여 싸워 도적 이십 명을 죽이다. 대풍(大風)하고, 비 오려 하더니 김청음을 명하여 성황신께 제(祭)를 지내니, 바람이 즉시 그치고 비 아니 오더라.

 이십 일의 마장(馬將 : 청나라 장수 마부대를 가리킴)이 통사(通使 : 통역관) 정명수(鄭命壽: 병자호란 때 용골대, 마부대의 통역으로 온갖 만행을 저지른 사람)를 보내어 화친하기를 언약하므로, 셩문(城門)을 여지 아니하고 성 위에서 말을 전하게 하다. …

 이십이 일의 또 마부대 통사를 보내어 이르되, 이제는 동궁(東宮 : 昭顯世子)을 청하지 않으니, 만일 왕자 대신을 보내면 정하여 화친하자 하므로 상감이 오히려 허락하지 아니하시도다. …

 이십삼 일의 대우가 내리니, 성첩(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지킨 군사가 다 적시고 얼어 죽은 사람이 많으니, 상감께서 세자로 더불어 뜰 가운데 서서 하늘께 빌어 가로되, "금일 이에 이르기에는 우리 부자가 득죄하미니, 일성 군민(一城軍民)이 무슨 죄 있겠습니까. 천도(天道)가 우리 부자에게 화를 내리시고 원하옵건대 만민을 살려주옵소서."

 군신들이 들어가시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시더니, 미구에 비 그치고, 일기 차지 아니하니 성중인(城中人)이 감읍(感泣)하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⑥『병자일기(丙子日記)』

인조 때에 좌의정을 지낸 남이웅(南以雄)의 부인인 남평 조씨(南平曺氏)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체험한 생활주변의 이야기를 약 4년에 걸쳐서 기록한 대규모 한글 필사본 일기로 『숭정병자일기(崇禎丙子日記)』라고도 한다. 1989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에 고립돼 있을 때, 남평 조씨도 충청도 서산 인근 해안의 무인도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사적인 내용이 개입되지 않은 『산성일기』와는 반대로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불안감, 곤궁한 생활 모습, 그리고 헤어진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마음 등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돼 있는 일기이다. 날씨의 기록에서도 “아침에는 맑았다가 늦게는 흐려져서 저녁에는 비가 왔다”는 식인가 하면,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복귀한 다음 남편의 친구가 찾아왔을 때에는, 그날 방문자의 이름과 개인별 음주량까지 일일이 기록해 두는 치밀함을 보여주는 글이다.

 

대나무를 베어다가 연장도 없이 두 칸 길이의 문 하나 달린 제비둥지만 한 움집을 지으니, 댓잎을 깔고 엮어 세 댁 부녀자 열네 명이 그 안에 들어가 밤을 새웠다.… 바닷물에 대충 씻어 밥을 하나 그릇이 없으니 한 그릇 물도 못 얻어먹어 밤낮으로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싶구나. 마음을 달래어 날을 지내니 인생이 얼마나 질긴 것인가.

⑦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정사(正史)에 해당하는『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이외에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그의 아버지가 유배되었던 곳인 신지도(薪智島: 전남 莞島郡에 속한 섬)에서 42세 때부터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에 걸쳐 편찬한 야사(野史)에서도 병자호란과 관련되는 남한산성의 기록이 많이 나온다. 『연려실기술』은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로 매우 객관적이고도 중립적인 태도로 서술하고 있어 당시의 정황을 면밀하게 알아볼 수가 있다.

연려실기술 제25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 조(條)의 일부분을 보인다.

 

14일 밤에 눈이 내렸다.…

서울 가까운 곳에서 방어할 만한 땅은 남한산성 데가 없으니, 청컨대 전하께서는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나가 빨리 달려 산성에 들어가 일의 추이를 보소서.” 하였다.…

산 밑에 이르자 날은 이미 캄캄하고 이경에서야 비로소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임금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단지 5, 6명뿐이었다.…

이때 임금이 말을 타고 성을 나가서 강화도로 향하는데, 임금이 탄 말이 갑자기 벌벌 떨면서 땀을 흘리고 선 채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 말을 부리던 자가 채찍질을 해도 그래도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억지로 가서는 안 된다.” 하고, 고삐를 잡고 채찍을 돌리니, 말이 매우 빨리 달렸다.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뒤에 들으니, 오랑캐 장수가 임금이 반드시 강화도로 옮겨 들어갈 것이라고 짐작하고 매복하여 길에서 기다렸다 하니, 말이 가지 아니한 것도 하늘의 뜻이었다.

이 이외에도 인조 때 문신 나만갑(羅萬甲)이 쓴 한문본 『병자록(일명 병자일기· 병자남한일기․ 白登錄)』,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남한산성일기』등 많은 글에서도 작품의 배경으로 남한산성이 등장하고 있다.

3. 성남에 살았던 사람들이 쓴 고전작품들

①강정일당(姜靜一堂)의 한시

강정일당은 세조 때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진주 강씨 강희맹(姜希孟)의 10세손이고, 파평 윤씨(坡平尹氏) 윤광연(尹光演)의 부인이다. 어릴 적 이름은 지덕(至德)으로, “여기 지극한 덕을 갖춘 사람이 있으니 네게 부탁한다.”는 어머니의 태몽에서 따온 것이다. 어려서부터 여공 솜씨가 뛰어났으며, 여덟 살 때부터 ‘시경’ 등 경전을 배웠다. 정일당은 당호이다.

시댁은 아주 곤궁했으나 남편의 공부를 독려하며 집안을 혼자 이끄는 한편 자신도 공부에 매진한다. 그녀의 한시는 정감 위주가 아닌 학문, 수신 같은 유가적 세계의 지향이 주를 이룬다. 서화에도 능했으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묘역은 성남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유고집으로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가 있다.

 

밤에 홀로 앉아(한춘섭 역: 이하 같음)  夜坐

밤 깊어 모두 고요해지니, 夜久群動息

빈 뜰엔 달빛만 새하얗다. 庭空皓月明

마음은 씻긴 듯 맑아, 方寸凊如洗

홀연 성정이 드러난다. 豁然見性情

 

글공부를 시작하며(1798년) 始課(戊午)

서른이 되어 글을 읽기 시작하니, 三十始課讀

배움에 동서를 가리기 어렵네. 於學迷西東

이제라도 모름지기 노력만 하면, 及今須努力

아마, 옛사람의 경지에 가까워지겠지. 庶期古人同

 

내 집을 찾는 손님  客來

먼 데 사는 사람이 남편을 앙모하여, 遠人慕夫子

북관에서 찾아왔다고 하네. 云自北關來

집이 가난해 음식이 동났으니, 家貧曷飮食

오직 술 석 잔이 전부라오. 唯有酒三杯

 

②둔촌(遁村) 이집(李集)의 한시

이집은 여말의 학자로서 본관은 광주(廣州)로 광주이씨의 중시조이고,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永川)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는 문식(文飾)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평이한 작품이 많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강동구에 있는 둔촌동은 한때 그가 은거해 지내던 곳으로 붙은 명칭이다.

그의 손자인 이인손(李仁孫)이 세조 때 우의정에 올랐는데, 이인손의 다섯 아들과 그들의 4촌 형제 3명이(모두 ‘克’ 자 돌림) 조정 회의에 함께 참석하게 되어, 한때 ‘팔극조정(八克朝廷)’이란 말이 떠돌기도 했다. 유고집에 『둔촌유고(遁村遺稿)』가 있다. 강동구 둔촌동 일자산(一字山) 해맞이광장에 1994년에 세운 둔촌시비(遁村詩碑)가 있다. 다음 시는 거기에 새겨진 시이다.

  

우계로 근친가는 생원 이우를 보내며(이웅재 역: 이하 같음)  送李生員愚覲母羽溪

여러 해 떠돌이 생활 그것만도 서글픈데 流離數歲足憂傷하물며 연달아 부모상을 당했다오. 況復連年見二喪부럽기 그지없는 건 형제들과 함께 모여 堪羡君今兄弟具춘풍에 색동옷 입고 부모님 뵈러 가는 거라네. 春風綵服覲高堂 부친과 함께 경상도 영천(永川)으로 피신하여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우거해 있을 때 잇따라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 시는 이런 쓰라린 역경의 시기에 지은 듯하다.

 

스스로에게 自貽

늙마의 걸음걸이 점차 기우뚱기우뚱, 老來步步漸欹斜

행동거지는 차라리 상갓집 개 신세로다. 行止還如狗喪家

책상 위 문서는 장차 어디에 쓰려는고. 床上文書將底用

이제는 병들고 눈꽃마저 피었다오. 如今抱病眼昏花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대사구(大司寇)를 맡았다가 배척당해 노나라를 떠났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떠돌다가 정(鄭)나라로 갔다. 어떤 사람이 스승을 찾아다니는 자공(子貢)에게 자신이 본 공자의 모습을 두고 한 말이 ‘상가지구(喪家之狗)’인데, 둔촌은 만년의 자신이 그와 같다고 한탄한 것이다. 물론 자신을 공자에게 비유하는 은근한 자부심도 함께 느껴진다.

 

③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의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

이경석(李景奭)은 조선 중기의 종친이며 문신으로,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이다. 정묘호란 후 승지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항복하게 되면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등이 있다.

삼전도비(三田渡碑:大淸皇帝功德碑)는 청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처음,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비문을 짓게 했으나 모두 사양했다. 국왕이 다시 강권하자 세 신하가 마지못해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거칠게 지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했다. 청나라는 장유와 이경석의 글 중에서 이경석의 글을 고쳐 사용하라고 명했다.

비문을 쓴 대제학 이경석(李景奭)은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있다.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元年)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께서, 우리 편에서 먼저 화의를 깨뜨린 까닭에 처음으로 진노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곧바로 동쪽으로 공격하여 오니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는 남한산성에 계셨는데, 위태롭고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 얼음을 밟고 있으면서 밝은 햇볕을 기다리듯 하였다.

거의 50일이 지나자 동남쪽 여러 지방의 군사들은 잇따라 패해 무너지고, 서북쪽의 장수들은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였으며, 성안의 양식 또한 떨어져 갔다. 이러한 때에 황제께서 대군으로 성에 육박하시기를, 마치 서릿발 같은 바람이 가을 낙엽을 휘몰아 가는 것 같고, 화로의 이글거리는 불이 기러기의 깃털을 태워 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무예의 근본으로 삼고 오직 덕을 펴는 것을 앞세우셨다. 그리하여 곧 칙유(勅諭)를 내리어, “항복하여 내게로 오면 짐(朕)은 너희를 모두 온전하게 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도륙(屠戮)할 것이다.” 하셨다.…

마침내 임금께서는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군전(軍前)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는데, 황제께서는 이에 예로써 극진히 대우하고 은혜로써 가까이 하여, 한번 보고 심복(心腹)으로 허락하였으며, 물품을 하사하시는 은택이 따라온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황제께서는 곧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자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를 불러들여 서쪽으로 물러나게 하였으며, 백성들을 무마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 새떼처럼 흩어졌던 사람들을 모두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커다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께서 이미 대병(大兵)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다시 한 무리의 군대에게 명하여 먼저 강화도를 함락시켜 궁빈(宮嬪), 왕자 및 여러 신하의 가족들까지 무두 포로로 붙잡았는데, 황제께서는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떨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고, 시종하는 관리와 내시들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셨다.

또 크게 은전을 내리어 소방의 군신과 포로 된 권속들을 모두 옛집으로 돌려보내시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따뜻한 봄 햇볕이 되고, 가뭄이 단비가 된 듯, 나라가 거의 망했다가 다시 살아나고, 종묘사직이 거의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동쪽의 땅 수천리가 모두 살아나는 은택을 입었으니, 이는 만고에 드물게 보는 일이라 하겠다. 아아, 훌륭하도다.

한강의 상류 삼전도(三田渡)의 남쪽은 곧 황제께서 머물러 계시던 곳으로 제단이 있다. 우리 임금께서 수부(水府)에 명하시어 그 단을 더욱 높고 크게 하시고, 또 돌을 깎아 비석을 세워서, 황제의 공덕이 천지의 조화와 같이 흘러갈 것임을 후세에 길이 현창(顯彰)함이니, 어찌 우리 소방만이 대대로 그 힘을 입을 뿐이랴.…

 

4.마무리

성남시는 그 역사가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물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2010년 7월 성남문화원에서 발간한 『성남인물지(城南人物誌)』를 1년여 동안 집필하면서 놀란 점은,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성남에서 활동했던 종6품 이상의 관직(參上官. 증직포함)과 현저한 귀감되는 인물들만 대상으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상했던 바를 훨씬 뛰어넘어 연인원 842명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성남은 위대하다. 우리는 성남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밝혀지지 못한 성남의 자랑거리들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때로는 들추고 싶지 않은 역사도 보듬어야 한다. 그래야 내일이 풍요로워질 수가 있다. 백헌(白軒)의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찾아본 이유이다. 따지고 본다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는 저들의 관습이어서, 그들이 먼저 시행했던 일이기도 하다. 너무 자책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남한산성은 단 한 번도 외적에게 함락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고 자긍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아울러 우리는 성남의 새로운 자랑거리를 계속 만들어 나가기 위한 부단의 노력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성남에 살고 있는 우리가 마땅히 하여야 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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