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이야기자리'에서 발표될 글입니다.
선생을 곤경에 빠뜨린 신돈
이 웅 재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부모와 자식 간의 만남, 스승과 제자, 친구와 친구, 남자와 여자, 직장 동료, 이웃과의 만남 등등…. 우리의 삶은 수많은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만남은 관계를 형성한다. 그 관계는 대등할 때도 있고, 종속적일 때도 있고, 꼭 필요한 관계일 때도 있고, 별 의미가 없을 때도 있어서, 만남이 항상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만남은 관계를 맺게 하고, 관계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둔촌(遁村) 선생과 신돈(辛旽)의 만남은 없었어야 했다.
신돈은 옥천사(玉川寺) 여종의 아들이었다. 공민왕의 꿈에 어떤 사람이 칼을 빼어 자기를 찌르는데 어느 중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이튿날 신돈을 보게 되자 그 용모가 닮았으므로, 그를 가까이 하여 높은 벼슬을 주게 되었다. 신돈은 늘 간음을 일삼는 등 행실이 좋지 않았는데, 왕을 뵌 후로는 거짓 꾸미기에 힘써 왕의 신임을 얻게 되어 국정을 농단하게 되었다. 그러자 뜻있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말하기를, “국가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이리라.”하고 말하였다. 둔촌 선생도 그를 요승(妖僧)이라고 비방하는 바람에 목숨이 위태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둔촌 선생을 곤경에 빠뜨린 신돈은 어떤 사람이었나를 알아보는 것도 선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듯싶어 이 글을 쓴다.
신돈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열전「45」에 나와 있는 것뿐인데, 그 전반적인 내용은 광주이씨대종회에서 나온 『여명(黎明)』에 나와 있기에 여기서는 이존오(李存吾)의 「논 신돈 소(論辛旽疏)」의 내용을 요약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존오는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좌천되었다. 그 뒤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31세의 나이로 요절한 고려의 충신이다.
신등(臣等)이 삼가 보오니, 3월 18일 궁전 안에서 문수회(文殊會: 호국법회)가 열렸을 때에, 영도첨의(領都僉議: 수상 급) 신돈(辛旽)이 재상의 반열에 앉아 있지 않고 감히 전하와 더불어 나란히 앉아 그 거리가 몇 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두렵고 놀라워 흉흉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대체 예란 상하의 계급을 구별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인데, 진실로 예법이 없다면 무엇으로 군신이 되며, 무엇으로 부자가 되며, 무엇으로 국가를 다스리겠습니까? 성인이 예법을 마련하여 상하의 명분을 엄격하게 한 것은 그 도모하는 바가 깊고 그 뜻이 원대한 것이었습니다.
적이 보옵건대 신돈은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서 나라의 정사를 제멋대로 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당초 영도첨의로서 감찰을 맡았을 때, 명령이 내리던 날, 예법으로서는 의당히 조복을 차리고 나아가 은혜를 사례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달이 되어도 나오지 않더니, 급기야 대궐의 뜰에 들어와서는 그 무릎을 조금도 굽히지 않은 채 늘 말을 탄 채로 홍문(紅門: 홍살문)을 출입하고 전하와 함께 나란히 호상(胡床: 중국식 걸상)에 앉으며, 그 집에 있을 때에는 재상들이 그 뜰아래에서 절을 하였으나 모두 앉아서 접대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최항(崔沆)ㆍ김인준(金仁俊)ㆍ임연(林衍)의 소행에서도 또한 이러한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옛적에는 승려인 만큼 의당히 치지도외하여 반드시 그 무례함을 책망할 필요가 없었지마는, 이젠 재상이 되어 명분과 지위가 이미 정해졌으니, 감히 예법을 어기고 강상을 훼손시키기를 이와 같이 할 수가 있습니까? 그 근본이 되는 이유를 따진다면 반드시 사부(師傅)라는 이름에 의탁하겠지마는, 유승단(兪升旦)은 고왕(高王: 고종)의 스승이요, 정가신(鄭可臣)은 덕릉(德陵: 충선왕)의 스승이었으나, 신등은 그 두 사람이 감히 이런 일을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자겸(李資謙)은 인왕(仁王: 인종)의 외조부였으므로 인왕께서 겸양하여 조손(祖孫)의 예로써 상견하려 하였으나 공론이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군신의 명분이란 본디부터 정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법은 군신이 생긴 이래로 만고를 지나면서도 바꾸어지지 않은 것이니, 신돈과 전하께서 사사로이 고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돈이 어떠한 사람이건대, 감히 스스로 높이기를 이처럼 하고 있습니까?…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은 말하기를, “기강이 서지 않아 간웅(奸雄)이 좋지 못한 마음을 품는다면 예법은 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습성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만일 전하께서 반드시 이 사람을 공경하면서도 만백성에게 재해가 없게 하려면, 그의 머리를 깎고 그의 옷을 물들이고 그의 벼슬을 삭탈하여 사원에다 두고서 공경할 것이요, 반드시 이 사람을 써야만 국가가 평강하겠다면, 그 권력을 제재하여 상하의 예를 엄하게 하고서 부리어 써야지만 백성의 마음이 안정될 것이요, 나라의 어려움도 풀어질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신돈을 어진이라 한다면, 신돈이 일을 맡은 이래로 음양이 때를 잃어서 겨울철에 우레가 일고 누른 안개가 사방을 막아버리는 듯하며, 열흘이 넘도록 날이 컴컴하고 한밤중에 붉은 기운이 돌고 천구성(天狗星: 평범한 유성[流星]보다 훨씬 밝은 유성)이 땅에 떨어지며, 목빙(木冰: 비, 눈, 서리 등이 나무에 엉겨 붙어 결빙한 것)이 지나치게 심하고, 청명(淸明)이 지난 뒤에도 우박과 찬바람이 일어나는 등 하늘의 기후가 여러 차례 변하고, 산새와 들짐승이 백주에 성중으로 날아들어 달리고 있으니, 신돈에게 내린 논도섭리공신(論道燮理功臣: ‘섭리’란 음양을 고르게 다스림을 의미함)의 호가 과연 천지와 조종(祖宗)의 뜻에 합치하는 것입니까?
신등은 직책이 사간원(司諫院)에 있으므로, (신돈이) 전하를 아끼는 재상으로서 그 자격이 미흡하여 장차 사방에 웃음거리가 되며, 만세에 기롱(譏弄)의 대상이 될까 보아서 부득이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책망을 면하려고 하는 바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는지라, 대답하심이 있기를 삼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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