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문화

황진이 땜에 사람이 죽은 곳 송암정(松岩亭)

거북이3 2013. 1. 3. 12:15

 

 

황진이 땜에 사람이 죽은 곳 송암정.hwp

         

            황진이 땜에 사람이 죽은 곳 송암정(松岩亭)                                                    

                                                                                                                                   이 웅 재

 

 

한 해도 저무는 12월 27일, 사목회(四木會)에서 남한산성엘 올랐다. 느지막하게 11시에 산성역에 모여서 9번 버스를 탔더니, 이놈도 뒤질세라 느긋하였다. 산성역에서 조금만 더 직진하면 남한산성 오르는 길인데, 무슨 심보로 그 길은 못 본 체 다시 내리막길로 은행동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가 말이다. 어? 이거 잘못 탔나보네 했더니, 친구 왈, 아니야, 이거 세월이 좀 먹나 하면서 가는 만고강산 유람형 버스야, 라는 것이다. 별 수 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니, 은행동 산성유원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빙글빙글 돌아서 간다.

그래, 뭐 백수가 급할 게 있겠느냐, 생각하면서 남한산성 주차장에 이르니, 웬걸, 배에서 는 벌써 쪼르륵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우리, 순대부터 채웁시다! 민주주의를 착실히 배운 사람들이라서 이런 건 쉽게 만장일치가 된다. 중앙주차장 옆으로 가노라니 저쪽 앞에서 해공(海公) 선생 동상이 반긴다. 잠시 망설인다. ‘오복순두부’로 갈까, '산성순두부'로 갈까? 민주주의를 성실하게 배운 사람들은 이런 때에도 쉽게 의견 일치를 본다. ‘산성’엘 왔으니까 ‘산성으로’ 정했다. 물론 ‘오복’은 2층집이요, ‘산성’은 단층집이라는 점도 은연중 참작이 되었을 것이다. 순두부가 심심할 것 같아서 감자전 하나를 추가하였더니, 얼씨구, 곡차 한 잔 생각도 빠지지 않고 참례하는 바람에 함께 점심을 먹고 나니 얼큰하고 불콰해져서 세상이 돈짝만 해 보인다.

모처럼 산성엘 왔으니 최근에 복원된 행궁(行宮)을 안 볼 수가 있으랴, 매표소 앞으로 가서 현신(現身)하니, 한 사람만 표를 사란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라서 시키는 대로 할밖에. 이것저것 볼 것은 그런대로 많았지만 중언부언 늘어놓는 것은 ‘점잔’에 누가 되니, 간략하게 두어 가지만 말해 두자.

하궁(下宮)은 공적인 집무실이요, 상궁(上宮)은 침전 등 사적 생활공간이다. 상, 하궁의 기둥은 둥글고 광주유수가 지내던 공간 이하의 모든 건물의 기둥은 네모진 형태다. 바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사고방식의 현현(顯現)인 것이다. 행궁 바깥쪽에 전시되어 있는 한 개에 18kg이나 된다는 통일신라시대의 커다란 기와를 보면서 저렇게 무겁고 큰 기와를 어디에 썼을까가 궁금했다. 그 아래쪽으로는 누군가가 돌 의자 위에 마주 보고 있는 조그마하고 앙증스런 눈사람 두 개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포근해진다.

일행은 망월사 탐방 길에 올랐다. 망월사는 태조가 서울에 있던 장의사(藏義社, 壯義寺)를 옮겨 지은 절로, 남한산성 내에 있다는 9개의 절 중 그 건축연대가 가장 오래된 절이다. 특색이라면 인도의 간디에게서 얻어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해 둔 적멸보궁이 있다는 점과 아주 리얼한 남녀의 정사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 부조(浮彫)가 있다는 점, 그리고 호랑이를 탄 신선 2위가 모셔져 있는, 절의 맨 위쪽에 위치한 인조(人造) 동굴로 만들어 놓은 산신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망월사를 둘러본 후, 다른 일행 세 사람은 먼저 내려가고, S씨와 둘이서 송암정(松岩亭)을 찾아보려고 장경사(長慶寺) 쪽으로 가다가 장경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반대쪽으로 꼬부라져 성곽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전에는 그곳에 안내판이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 그런대로 한참을 내려갔지만 송암정은 나타나지 않아, 한 때 포기할까도 생각했으나, 어차피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동문(東門)이 나올 터이므로 계속 전진하였다. 이 길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라서 쌓인 눈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약간은 험하기도 하여 매우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곤 하느라고 힘이 좀 들었다. 하지만, 뽀드득뽀드득 경쾌하게 들리는 눈 밟는 소리는 들을 만했고, 다른 사람들이 보아주지 않아서 약간은 외로웠을 성싶게 느껴지는 잡목들이 눈꽃을 피운 채로 반겨주는 모습 또한 보아줄 만하였다.

성곽의 담장 곧 성가퀴[여장(女墻)]를 짚으면서 내려가다 생각하니 그 위를 덮고 있는 디새(‘기와’의 옛 명칭)가 낯익었다. 그랬다. 아까 행궁 쪽에 전시되어 있던 커다란 기와의 용처(用處)가 궁금했었는데, 바로 이런 데에 사용했던 옥개전(屋蓋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돌로 되어 있는 경우는 옥개석(屋蓋石)이 되겠는데, 평소에는 지붕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적들이 성벽을 타고 오르려고 할 때면 이것을 굴려 떨어뜨려 적을 방어하는 무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 동안 내려가다가 보니 성곽 밖으로 삼면은 낭떠러지로 된 약간 평평한 공터가 나왔다. 넓이로 보아 딱 정자 하나쯤은 세울 수 있을 만한 곳이었다. 그 앞쪽에 붙여져 있는 안내판을 보니, 그곳이 바로 ‘송암정 터’였다. 목적 달성을 해서 기뻤다. 안내문의 내용을 옮긴다.

송암정은 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술에 취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 곳에서 노래 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 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고 부르는 소나무이다.”

‘소주라도 한 병 들고 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오늘 밤에 내 꿈 속으로 찾아오면 몇 달 전에 앞 베란다에다 담가 놓은 오디주와 오미자주를 가지고 권커니 잣커니 하며 취해 본들 어떨 것인가? 이태백은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거배요명월(擧盃邀明月: 술잔 들어 밝은 달님 맞이하니), 대영성삼인(對影成三人: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어라)”라고 하였거니, ‘對影成三人’을 ‘대진성삼인(對眞成三人)’으로 바꾸어 그림자 대신 황진이를 합석시키면 어떨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잠깐 해 본다. 어쨌든 정철(鄭澈)의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처럼 “ 잔(盞) 먹새근여 또  잔 먹새근여 곳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근여”, 노래라도 부르며 실컷 취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남한산성은 오늘 나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2013.1.3. 원고지 16.3매)

 

*"망월사는 태조가 서울에 있던 장의사(藏義社, 壯義寺)를 옮겨 지은 절로, 남한산성 내에 있다는 9개의 절 중 그 건축연대가 가장 오래된 절이다. 특색이라면 인도의 간디에게서 얻어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해 둔 적멸보궁이 있다는 점과 아주 리얼한 남녀의 정사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 부조(浮彫)가 있다는 점,"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그런 조각이 없다면서 글의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댓글이 달렸었던 것 같은데, 없어졌네요.

*참고로 다음 카페 "아름다운황혼열차(黃昏列車)"의 ‘하나는 내꺼 또 하나는’에 나오는 “석조 조각물의 정사 장면 (남한산성 내 망월사)”을 보면, “석조물들의 우아하고 섬세한 노출 표현, 여기 남한산성내에 이토록 고풍적인 석조물이 즐비하게 전시 되어 있습니다.”

현이 된 여러 장의 사진을 올리고 있습니다.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2014.4.22.) 이 웅 재.

*그런데 최근(14.6.16.) 다시 가서 확인하니 그런 부조는 없었음. 아마도 다른 불교적 부조물로 교체해 놓은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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