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講 22. [현대 걸작 기행선]1 明沙十里 東海遊記.hwp
고전강독 22[현대 걸작 기행선]1
☆明沙十里
(蘇在英 編, 한국걸작기행문 23선 백두산근참기, 朝鮮日報社, 1969에서. 이하 같음.)
韓龍雲
경성역의 기적일성(汽笛一聲), 모든 방면으로 시끄럽고 성가시던 경성을 뒤로 두고 동양에서 유명한 해수욕장인 명사십리(明沙十里)를 향하여 떠나게 된 것은 8월 5일 오전 8시 50분이었다.
차중(車中)은 승객의 복잡으로 인하여 주위의 공기가 불결하고 더위도 비교적 더하여 모든 사람은 벌써 우울을 느낀다. 그러나 증염(蒸炎), 열뇨(熱鬧), 번민(煩悶), 고뇌(苦惱) 등등의 도회를 떠나서 만리 창명(滄溟)의 서늘한 맛을 한 주먹으로 움킬 수 있는 천하 명구(名區)의 명사십리로 해수욕을 가는 나로서는, 보일보(步一步) 기차의 속력을 따라서 일선의 정감이 동해에 가득히 실린 무량(無量)한 양미(凉味)를 통하여 각일각(刻一刻) 접근하여지므로 그다지 열뇌(熱惱)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천산만수(千山萬水)를 격(隔)하여 있는 천애(天涯)의 양미(凉味)를 취하려는 미래의 공상으로 차중의 현실 즉 열뇌(熱惱)를 정복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이른바 일체유심(一切唯心)이다. 만일 그것이 유심(唯心)의 표현이 아니라면 유물(唯物)의 반현(反現)이라고 할는지도 모른다.
나는 갈마(葛麻)역에서 명사십리로 갔다. 명사십리는 문자와 같이 가늘고 흰 모래가 소만(小灣)을 연(沿)하여 약 10리를 평포(平鋪)하고, 만내(灣內)에는 참치부제(參差不齊)한 대여섯의 작은 섬이 점점이 놓여 있어서 풍경이 명미(明媚)하고 조망(眺望)이 극가(極佳)하며 욕장(浴場)은 해안으로부터 약 5,60보(步) 거리, 수심은 대개 균등하여 4척 내외에 불과하고 동해에는 조석(潮汐)의 출입이 거의 없으므로 모든 점으로 보아 해수욕장으로는 이상적이다.
해안의 남쪽에는 서양인의 별장 수십 호가 있는데, 해수욕의 절기에는 조선 내에 있는 사람은 물론 동경, 상해, 북경 등지에 있는 사람들까지 와서 피서를 한다 하니 그로만 미루어 보더라도 명사십리가 얼마나 명구(名區)인 것을 알 수가 있다. 허락지 않는 다소의 사정을 불고(不顧)하고 반 천 리(半千里)의 산하를 일기(一氣)로 답파(踏破)하여 만부 일적(萬夫一的) 단순한 해수욕만을 위하여 온 나로서는 명사십리의 수려한 풍물과 해수욕장의 이상적 천자(天姿)에 만족치 아니할 수 없었다. 목적이 해수욕인지라 옷을 벗고 바다로 들어갔다. 그 상쾌한 것은 말로 형언할 배 아니다. 얼마든지 오래하고 싶었지마는 욕의(浴衣)를 입지 아니한지라 나체로 입욕함은 욕장의 예의상 불가하므로 땀만 대강 씻고 나와서 모래 위에 앉았다가 돌아보니, 김군은 욕의 기타를 사가지고 돌아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7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보니 일기가 흐리었다.
7시경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였으나 계속적으로 오는 것이 대단치 아니하였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바다에 갈 욕심으로 비가 개이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개이지 않는다.
11시경 비가 조금 멈추기에 해수욕하는 데는 비를 맞아도 관계치 않겠다는 생각으로 나섰다. 얼마 아니 가서 비가 쏟아지는 데 할 수 없이 쫓기어 들어왔다. 신문이 왔기에 대강 보고 나니 원산(元山)의 오포(午砲) 소리가 들린다. 시계를 교정하여 가지고 나서니 비가 개이기 시작한다. 맨발에 짚신을 신고 노동모를 쓰고 나섰다. 진 길에 짚신이 불어서 단단하여지매 발이 아프다. 짚신을 벗어 들고 맨발로 가는데 비가 그쳐서 길이 반은 물이요, 반은 흙이다. 맨발로 밟기에 자연스러운 쾌감을 얻었다. 더구나 명사십리에 들어서서 가늘고 보드라운 모래를 밟기에는 너무도 다정스러워서 맨발이 둘뿐인 것이 부족하였다.
해수욕장에 다다르니 마침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목욕을 하는데 남녀노유(男女老幼)가 한데 섞여서 활발하게 수영도 하고 유희도 한다. 혼자 온 것은 나 하나뿐이다. 나는 그들 목욕하는데서 조금 떨어져서 바다에 들어가 실컷 뛰고 놀았다. 여간 상쾌하지 않다. 조금 쉬기 위하여 나와서 모래 위에 앉았다. 이때에 모든 것은 신청(新晴)의 상징뿐이다.
쪽같이 푸른 바다는
잔잔하면서 움직인다.
돌아오는 돛대들은
개인 빛을 배불리 받아서
젖은 돛폭을 쪼이면서
가벼웁게 돌아온다.
걷히는 구름을 따라서
여기저기 나타나는
조그만씩한 바다 하늘은
어찌도 그리 푸르냐.
멀고 가깝고 작고 큰 섬들은
어디로 날아가려느냐.
발 적여 디디고 오똑 서서
쫓다 잡을 수가 없구나.
얼마 동안 앉았다가 다시 바다로 들어가서 할 줄 모르는 헤엄도 쳐보고 머리를 물속에 거꾸로 잠가도 보고 마음 나는 대로 활발하게 놀았다. 다시 나와서 몸을 사안(沙岸)에 의지하여 발을 물에 잠기었다.
모래를 파서 샘을 만드니
샘 위에는 뫼가 된다.
어여쁜 물결은
소리도 없이 가만히 와서
한 손으로 샘을 메우고
또 한 손으로 뫼를 짓는다.
모래를 모아 뫼를 만드니
뫼 아래에 샘이 된다.
짓궂은 물결은
해죽해죽 웃으면서
한 발로 뫼를 차고
한 발로 샘을 짓는다.
다시 목욕을 하고 나서 맨발로 모래를 갈면서 배회하는데, 석양이 가까워서 저녁놀은 물들기 시작한다. 산 그림자는 어촌의 작은 집들에 따뜻이 쪼이는데, 바닷물은 푸르러서 돌아오는 돛대를 물들인다. 흰 고기는 누워서 뛰고 갈매기는 옆으로 날은다. 목욕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높아지고 저녁연기를 지음친 나무빛은 옅어진다. 나도 석양을 따라서 돌아왔다.
9일은 우편국에 소관이 있어서 원산에 갔다. 볼 일을 보고 송도원(松濤園)으로 갔다. 천연의 풍물로 말하면 명사십리의 비교가 아니나 해수욕장으로서의 시설은 비교적 상당하다. 해수욕을 잠깐하고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고 송림(松林) 사이에서 조금 배회하다가 다시 원산을 경유하여 여사(旅舍)에 돌아와 조금 쉬고 명사십리에 가 또 해수욕을 하였다. 행보(行步)를 한 까닭인지 조금 피로한 듯하여 곧 돌아왔다.
10일엔 신문이 오기를 기다려서 보고 나니 11시 반이 되었다. 곧 해수욕장으로 나가서 목욕을 하고 사장에 누웠으니 풍일(風日)이 아름답고 바닥 작은 물결이 움직인다. 발을 모래에다 묻었다가 파내고 파내었다가 다시 묻으며, 손가락으로 아무 구상(構想)이나 목적이 없이 함부로 모래를 긋다가 손바닥으로 지워 버리고 다시 긋는다. 그리하다가 홀연히 명상(冥想)에 들어갔다. 멀리 날아오는 해조(海鳥)의 소리는 나를 깨웠다.
어여쁜 바다새야
너 어디로 날아오나.
공중의 어느 곳이
너의 길이 아니련만,
길이라 다 못 오리라.
잠든 나를 깨워라.
갈매기 가는 곳에
나도 같이 가고 지고.
가다가 못 가거든
달 아래서 자고 가자.
둘의 꿈 깊은 때야
네나 내나 다르리.
해수욕장에 범선(帆船)이 하나 매였다.
그 배 밑에 가서,
"이게 무슨 배요?"
선인(船人): "애들 놀잇배요."
나: "그러면 이것이 누구의 배요?"
선인: "아니요, 다른 사람의 배요."
나는 배에 올라가서 자세히 물은즉 그 배는 해수욕하는 데 소용되는 배인데, 배에 올라가서 물에 뛰어 내리기도 하고 혹은 그 배를 타고 선유(船遊)도 하는 배다. 1개월에 95원(圓)을 받고 삯을 파는 배로, 매일 오전 9시경에 와서 오후 5시에 가는데, 선원은 다섯 사람이라 한다. 95원을 5인에 분배하면 매일 매일 60여 전인데, 그 중에서 선세(船貰)를 제하면 대단히 박한 임금이다. 여기에서도 그들의 생활난을 볼 수가 있다. 오후 4시경에 여사에 돌아왔다.
11일 상오 11시경에 해수욕장으로 나오는데, 그 동리 솔밭 속에 있는 참외막 아래에 서너 사람의 부로(父老)들이 앉아서 바람을 쐬며 이야기들을 한다. 나도 그 자리에 참례하였다. 이 날이 마침 음력으로 칠석(七夕)날이므로 견우성이 장가를 드느니 직녀성이 시집을 가느니 하였다. 나는 칠석에 대한 토속(土俗)을 물었는데 별로 지적하여 말할 것이 없다고 한다.
(『半島山河』, 삼천리사, 1944)
♣지은이 韓龍雲: 승려ㆍ시인ㆍ독립운동가(1879~1944). 忠南 洪城 출생. 俗名은 貞玉. 兒名은 裕天. 法號는 萬海(卍海). 龍雲은 法名. 1908년 明進學校, 지금의 東國大學校 卒業. 28세에 雪嶽山 百潭寺에서 佛門에 歸依. 3ㆍ1 운동 때의 民族 代表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 독립의 書」 외에, 시집 『님의 침묵』, 소설 『흑방비곡』이 있고, 著書에 『조선 불교 유신론』등이 있다.
일제에 대한 抵抗 精神으로 집도 朝鮮總督府 反對 方向인 北向으로 지었고, 食糧 配給도 拒否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有名하다. 또한, 變節한 親日派 崔南善이 韓龍雲과 가까운 사이임을 自處하자, 韓龍雲은 "'崔南善'이라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이미 葬禮를 치러서 당신은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東海遊記
文一平
암석미의 극치—구름 밖의 사선봉(四仙峰)
일찌기 조선일보 주최로 통천(通川)을 비롯하여 장전(長箭)과 내금강(內金剛) 말휘리(末輝里)와 금성(金城) 및 철원(鐵原)의 5개소를 순회강연하게 된 바, 왕반(往返) 13일을 비로 해서 금강산 탐승도 뜻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틈틈이 구경한 명승과 아울러 그 동안 경험한 운치 있는 일을 대강 적어내어 오로지 독자 일신(一哂)의 자(資)를 삼으려고 한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총석정(叢石亭)은 일찌기 노래를 통해서 여러 번 듣기도 하였고 또한 그림을 통해서 여러 번 보기도 하였으나 실경을 목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총석정은 해금강의 입구이다. 금강의 한 줄기가 벽해로 뛰어들어 기다(幾多)의 석주를 일으켜 용궁의 수정문처럼 해상에 나열하였음은 시의 세계, 전설의 왕국 그대로이다.
요새 속세의 과학은 이 시의 세계를 물들이려고 분석의 메스를 써 그것이 현무암의 정육각주(正六角柱)니 고(高)가 70척이니 하여 좀스러운 숫자적 설명을 붙이나, 이 기절(奇絶)한 암석미를 그대로 완상함만 같지 못하다.
여러 돌을 묶어 거주(巨柱)를 이룬 기이하고도 정제하게 된 그 형상은 총석이란 이름이 생긴 연유를 스스로 밝히는 바이거니와, 석주의 군상이 혹은 파도 위에 섰기도 하고 혹은 앉았기도 하고 또 혹은 누웠기도 하여 그 모양이 제각기 다르므로 입총(立叢), 좌총(坐叢), 와총(臥叢)의 구별이 있다.
다시 말하면 강상(岡上)에서 해상에 향하여 바라볼 때 오른편에 좌총이 있고 왼편에 와총이 있고 그 두 사이에 입총이 있어, 서로 다투어 특수한 기관을 드린다.
그러나 총석을 강상에서 완상하는 것보다 해상에서 관망하는 것이 더욱 훌륭하니, 그는 강상에서 볼 수 없는 총석정의 진면목을 해상에서 비로소 볼 수 있음이다.
강상에서만 보고 해상에서는 보지 못한 나로서는 총석의 전면을 말할 자격조차 없는지는 모르되, 그래도 억지로 언권을 허한다면 입총이 제일 기관(奇觀)이다. 벽해에 백장(百丈) 석주를 깎아 세운 입총이야말로 조화의 신부(神斧)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암석미의 극치이며, 운소(雲霄)에 솟은 사선봉은 선인(仙人) 전설의 보금자리 됨이 마땅하도다.
그날 동행한 모군의 호의로 입총에서 사진을 찍고 좌총에서 관란(觀瀾)을 하고 와총에서 맥주를 부어 반일의 행락을 극하였으나, 무엇보다도 장쾌한 것은 관란이었다.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오는 창해의 물결이 총석 밑에 부딪칠 때마다 흩어지는 무량수(無量數)의 비말(飛沫)과 함께 대지를 울리는 우렁찬 노도 소리는 참으로 장쾌하였다.
요새 산업전선에서 용약하는 해녀군(海女群)은 이 근해에까지 진출하여 청일(晴日)이면 흔히 이 해상에서 전복을 따는데 이것이 또한 총석정의 새로 풍취를 더하게 된 것이다.
감벽(紺碧)의 장전만상(長箭灣上) 엽주(葉舟)에 청풍을 싣고
통천과 장전 사이는 80리니 기차로 한 시간 걸린다. 나는 통천에서 강연을 마치는 그날 밤으로 장전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연선(沿線)의 해안미는 어둠의 장막에 덮여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장전은 지형상 외금강의 입문이니만큼 육(陸)으로 해(海)로 모여드는 외금강의 탐승객은 장전을 거치게 되므로, 설비를 잘만 하면 오늘날 온정리(溫井里)와 경쟁할 수 있다 한다.
장전의 풍치는 외금강을 배경으로 감벽(紺碧)한 장전만을 포옹한 데 있으니, 수심이 깊고 파도가 고요한 이 만에서 반일의 선유를 하게 된 것은 이번 여행 중의 일 쾌사이다.
이 날은 아침부터 아주 청명하여 드물게 보는 호천기(好天氣)이었는데, 어느 친지의 오찬 향응을 받아 오래간만에 포식하고 당지 유지의 주선으로 어업조합의 목선 1척을 얻어다가 이미 준비하여 두었던 약간의 주과를 싣고 일동 7인이 그 배에 타게 되었다.
동승자 중에는 일찍 경성의전(京城醫專) 강사로 있다가 장전에 와서 개업하게 된 의학사(醫學士) 정민택(鄭民澤) 군과 그 처매(妻妹)로서 당지에 피서 왔던 손계숙(孫桂淑) 양이 섞여 있은 것이 한 이채이었다.
배는 4시 반경에 선교(船橋)를 떠나 평온한 경면(鏡面) 같은 만상을 저어 가 약 30분 만에 그 건너 무명의 석도(石島)에 이르러, 배를 매고 우리는 발을 벗은 채로 성큼성큼 해빈(海濱)의 암석으로 걸어 올라가 일동이 촬영까지 하였다. 이 저녁에 또 강연의 약속이 있으므로 시간 관계상 오래 머무를 수 없게 되어 다시 뱃머리를 돌렸더니, 이때 나는 장전만의 전경을 한눈에 거두었다.
사면이 산악으로 둘린 감벽의 장전만은 만보다도 호(湖)라 하는 것이 차라리 적칭(適稱)일지 모른다. 저녁의 맑은 연파(煙派)를 깨뜨리고 고요히 행진하는 목선 위에 앉은 우리 일행은 모두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외금강의 산용(山容)은 일말의 운무 속에 가리었다 벗어졌다 하는 것도 일종 풍취이었으나, 장전만구(長箭灣口)의 수천(水天) 방불한 곳에 오락가락하는 기다의 편범(片帆)은 감벽의 만수(灣水)와 서로 어울리어 한 폭의 활화(活畫)를 그대로 현출하였다. 평생을 두고도 드물게 보는 이 산해미(山海美)에 어린 나의 심경은 한참 동안 이른바 물아구망(物我俱忘)이 되었다.
영경(靈境)을 짓밟는 운명의 장난
장전만의 뱃놀이가 있은 그 다음날 온정리로 가게 되었다. 이곳은 외금강의 청려한 소읍으로 벽계가 흐르고 영산이 둘러싼, 그리고 또 라듐 온천이 솟는 관동의 명구(名區)이다.
총석정에서 물결 소리를 듣고 장전만에 뱃놀이를 하던 나는 지금 다시 온정리의 온천에 몸을 담그게 되니 그 유쾌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수정봉(水晶峰)의 아침 해와 저녁 빛에 변환(變幻)하여 다함이 없는 그 광경이야말로 온정리의 가장 볼 만한 자랑거리의 하나이다.
나는 여기 간 지 3일 만에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으슥한 한하(寒霞)의 청계(淸溪)를 끼고서 좌우에 삭립(削立)한 천인기봉(千仞奇峰)의 사이로 뚫고 나아가 육화정(六花亭)과 만상계(萬相溪)를 차례로 지나 마침내 만상정(萬相亭)에 이르니, 온정리에서 여기까지 오는 25리에 그 대부분은 신작로가 되어 육화정 이하는 바로 자동차가 통한다. 오늘날 문명의 혜택으로 조도(鳥道)를 깎아 인도를 만들고 인도를 깎아 차도를 만들어 교통이 아주 편리하여졌으나, 그만큼 영경이 속화한 것만은 앙탈할 수 없는 일이며, 더구나 신작로로 해서 문주담(文珠潭) 같은 절승의 면목이 손상되었음은 반갑지 않은 일이다.
만상정에서 한참 휴식하고 천천히 걸어 구만물(舊萬物)에 반등(攀登)하여 벽공을 찌를 듯이 우죽비죽하게 솟은 신만물(新萬物)과 오만물(奧萬物)의 절승을 바라보매, 꿈결에 천당에 올라간 것 같아서 너무나 엄청난 대자연미에 어리어 무엇이라고 명장(名狀)할 수 없었으며, 이 만물상의 기절을 본 뒤에 비로소 금강의 위용이 평일에 상상한 것보다도 오히려 초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강의 1만 2천 봉, 36계곡을 낱낱이 탐승하려면 한이 없지마는, 짧은 시일에 일별하는 방법은 외금강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만물상과 구룡연(九龍淵)을 보면 고만이요, 내금강에 있어서는 대표적으로 만폭동(萬瀑洞)과 명경대(明鏡臺)를 보면 고만이다.
이미 만물상에서 산악미의 극치를 경탄하게 된 나는 다시 그 다음날 구룡연에서 폭포미의 극치를 완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연방 퍼붓는 비 때문에 부질없이 여관에서 낮잠과 온천의 입욕으로 겨우 고적을 자위할 뿐이다.
여기 온천은 면(面)으로 경영하는 공동 욕장이 있는데 7천 원을 들이여 목조 3층을 세웠으며 욕실은 가족탕과 보통탕의 구별이 있으나, 온도가 얕고 광선이 비치지 않는 것이 얼마쯤 결점이었다. 나는 여관에서 온천으로 온천에서 다시 상점으로 배회하는 것이 상례이었으니, 여기 상점은 금강의 회화와 목기 기타 단장의 유를 판매하며 그의 대개는 일본인의 제조라 한다.
구름 깊은 화엄각(華嚴閣)에 찬하거사(餐霞居士) 심방
20년 동안 별러서 금강산을 찾았더니 호사다마(好事多魔)로 장마비에 걸려 옴짝꼼짝 못하고 외금강 신계사(神溪寺)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기연(機緣)이 되어 찬하거사(餐霞居士) 최기남(崔基南) 씨를 보광암(普光庵)에서 만나게 된 것은 의외의 수확으로, 얼마 전에 죽었다고 전하던 그가 오늘날 살아 있다.
노학(老鶴)처럼 수골(瘦骨)이 능릉(稜稜)하고 쟁충 큰 찬하거사는 비를 맞으면서 찾아간 우리 일행에게 대하여 미소로 맞아준다. 날카롭고 높은 코, 번쩍이는 그 두 눈동자, 일자로 다문 그 입, 어디로 보든지 이지와 아울러 의지의 인임을 표시한다.
내 양식은 곳곳에 쌓여 모두 부족함 없이
많은 산에 솔잎이 저렇게 풍성하구나.
부자집 생활과는 이같이 거리가 멀거늘
어쩌다 사람들은 오곡(五穀)으로만 살려 드는가(편자[소재영] 역)
到處貯糧亦不窮
萬山松葉眼前豐
大家生活長如此
豈在人間五穀中
(곳곳에 양식을 쌓아두어 궁함이 없음은
바라보면 산마다 솔잎이 풍성함이로다.
부자집 생활은 늘 이와 같거늘
어찌 사람들은 오곡으로만 살려 하는가: 이웅재 역)
이것은 일찍 찬하거사가 지은 한시로 그의 생활을 자서한 것이거니와, 그는 17개년 동안 벽곡(辟穀)하고 오직 송엽과 송피로 연명하여 왔었다.
그가 현주한 보광암의 화엄각은 맨 처음 그의 6년 고행하던 수도실인데, 최종선정(最終禪定)에는 삼동(三冬) 겹옷으로 냉돌 위에 백일장좌(百日長坐)하였었다 하며, 그 후 백두산정(白頭山頂)에서 50일 동안 정좌(靜坐)를 한 적도 있었고, 얼마 전에 해금강의 송도석상(松島石上)에서 3주 동안 공기 흡취를 한 적도 있었고, 오늘날은 다시 최초 수도하던 화엄각으로 돌아와 선인(仙人) 생활을 하고 있더라.
그는 관북(關北) 경성(鏡城) 태생으로 본관은 강릉 최씨(江陵崔氏)라, 조세(早歲)에 유(儒)를 배우다가 그 뒤에 어떤 동기로 선불(仙佛)로 변하게 된 바, 그의 말을 들으면 불․법․승(佛法僧)의 삼보 정진을 위해서 일찍 천불(千佛)을 새기셨고 또 대불자(大佛子)를 썼었고, 5백 나한(羅漢)과 18나한을 만드셨는데, 천불은 광주(廣州) 봉은(奉恩)에, 5백 나한은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 18나한은 외금강 보광암에 각기 봉안하였고, 대불자(大佛子)는 역시 광주 봉은사에 진장(珍臧)하게 된바, 놀라지 말라, 그 글자의 장(長)이 61척 5촌이요 광(廣)이 30척이요, 획의 크기가 3척 3촌이며, 이것을 쓸 때 목피(木皮) 피켓으로 만든 1장 5척의 거필(巨筆)을 가져 4개 대통(大桶)의 묵수(墨水)를 기울여 광목 5필에 가득차게 썼다고 한다.
그는 더욱 조불(彫佛)에 뜻을 두어 지장보살미타삼존(地藏菩薩彌陀三尊)과 사천왕(四天王) 및 시왕(十王)을 조성하려고 방금 성진(城津) 곱돌을 주문 중에 있다고 하며, 이로부터 아주 절식하고 세계 유람을 떠나 보겠다고 하더라. 이럭저럭 한담에 시간이 많이 갔으므로 인하여 고별하고 여사로 돌아오려 할새, 그는 한시 1장과 선서(仙書) 1권을 나에게 주었다. 그를 방문하여 반일 동안 신선놀이를 한 것은 진계(塵界)애 시달리던 나로서는 실로 분외(分外)의 청복(淸福)이었다.
비에 씻겨 더 밝은 외금강문(外金剛門) 야월(夜月)
신계사의 체재는 지리한 중에도 위자(慰藉)가 있으니 첫날밤은 이곳서 뜻밖에 만나게 된 구구 H군의 바이올린 연주로, 다음날 밤은 나의 옛말로, 그 다음날은 찬하거사의 왕방(往訪)으로 이럭저럭 소견(消遣)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사정이 이곳에서도 또 하룻밤을 지체할 수 없게 되어, 비를 맞으면서 일행 3인이 구룡연을 목표로 출발하였다.
져서는 오고 져서는 오는 금강산 비는 연일을 두고 그칠 줄을 모른다. 신계사 앞에 솟은 집선봉(集仙峰)은 구름 속에 잠겨 그 영자(靈姿)를 바라볼 수 없고 사위는 캄캄하여 전로를 분별할 수 없는데, 모진 비에 젖고 젖어 전신에서 물이 주르르 흐르는 우리네는 영을 넘고 시내를 건너 간신히 외금강문에 이르니, 신계사에서 여기까지가 겨우 5리에 지나지 못하나 우천험로(雨天險路)이므로 곤란이 막심하였다.
비는 퍼내리고 더 갈 수 없어 부득이 이곳 여막(旅幕)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하고 젖은 옷을 끌렀다. 석반 후 눈이 스르르 감겨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본즉, 벌써 창문이 하얗게 밝았기에 새벽인가 놀라서 창문을 열치고 뛰어나가 보니 어느덧 비는 개고 달이 뜬 것인데 밤은 아직 11시를 겨우 넘었다.
외금강문의 달빛! 이것이 우후월색(雨後月色)이니만큼 어찌나 반가운지 알 수 없다. 벽공은 물같이 맑아 한 점의 운예(雲翳)가 없으며 거기 뜬 달은 마치 정인철사(正人哲士)가 천하의 공로로 활보하듯이 거침없이 걸어온다.
그러나 그 앞에 가로막힌 석문암(石門岩)의 높은 봉우리를 돌아옴에는 거의 1시간이 걸렸으니, 11시경에 뜬 달이 12시경에야 비로소 외금강의 전 계곡을 골고루 비추었다.
달이 처음 석문암에 걸렸을 때는 계곡의 반면이 암흑에 싸였더니 이윽고 달이 석문암을 돌아서 계곡의 전면에 그 광명을 던질 때는 외금강문 일대를 들어 월세계를 이루었다. 산에 비친 달, 시내에 비친 달, 울창한 참천수목(參天樹木)에 비친 달, 뜰에 비친 달, 어느 것이 달이 아니리오마는, 그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딜러 말하면 계월(溪月)이었다.
우후 외금강문의 중계(衆溪)는 온통 폭포로 변하여 일대 기관을 들인다. 산악을 움직이는 듯한 요란한 그 물소리, 암석에 부딪쳐 하얀 꽃으로 흩어지는 그 물거품, 이 물거품의 방울마다 달빛이 비쳐 영롱(玲瓏) 무수의 조그만 야광주(夜光珠)가 되는 것이야말로 이날 밤의 계월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러나 외금강문의 달은 계월만을 따로 분리시켜 볼 수 없고, 산과 계와 수목 내지 암석을 전체로 하여 거기 비친 달빛을 완상할 때 더욱 장엄미를 발견할 것이다. 나는 외금강문의 달을 뜰에서 거닐면서 밤새도록 탄상하여 마지않았다.
표현을 경멸하는 산수미(山水美)의 위엄
금강의 달도 좋으나 금강의 쾌청한 날도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명려한 특성을 지녔다. 우리 일행은 기쁨이 넘쳐 아침 일찍 구룡연을 향하여 떠났다. 시내의 다리를 건너고 비탈의 바위를 돌아서 유수한 협곡으로 들어갈새, 가다가 막다른 곳에 닥쳐 이제는 응당 다 왔겠거니 하면 좁은 길이 산비탈로 실오리같이 열리었다.
어쨌든지 구룡연에 들어가는 협곡은 갈수록 기절유절(奇絶幽節)한 수석의 별구(別區)가 벌어졌으니, 수석의 미로는 금강 제일의 칭이 있는 옥류동(玉流洞)도 이 역로(歷路)에 배포된 승경인데 어느 일본인 예술가는 옥류동을 보고 다시 금강을 더 볼 필요가 없다 하고 돌아갔다 하거니와, 사면에 병풍처럼 둘린 산악의 미에 계곡의 미를 겸한, 말하자면 금강의 금강이다. 옥류동을 지나서 다시 더 가노라면 봉세계형(峰勢溪形)이 유출유기(愈出愈奇)하며 연주담(連珠潭), 수렴폭(水簾瀑), 비봉폭(飛鳳瀑)의 승경도 모두 이 역로에 있다. 얼마쯤 더 심미안을 노려보면서 위경험로(危徑險路)를 걸어가 최후에 다다른 곳이 구룡연이다.
구룡연은 깍곱선 암벽에 내려붓는 2백여 척의 폭포로서 그 웅대하고 장엄한 것이 사람을 압도하여 형용할 수 없는 위협의 감을 주었다. 나는 일찍 박연폭포를 보았지만 박연폭이 비록 기승하다고 하나 열 박연을 가지고도 한 구룡을 대적할 것인가. 그러나 구룡연은 하나로써 마치는 것이 아니요, 이밖에 상팔담(上八潭)이란 것이 있어서 대자연미를 이 위에는 더할 수 없어 아주 구족(具足)하게 만들어 놓은 조화의 기적이다.
만일 이 상팔담을 연장한다면 구룡연이 엄청나게 길 것이니 생각만 해도 놀랄 일이다. 그러나 구룡연의 폭포미는 숫자의 장(長)이나 광(廣)에 있는 것보다도 전체로서의 그 배포(排布)와 조화가 실로 절특기이하여 인간의 의장(意匠)에 뛰어남이 있다.
내외금강에 연담계폭(淵潭溪瀑)이 몇천백으로 헤일 수 있으나, 오직 구룡연으로써 폭포미의 극치를 삼는 것이 마땅하니, 이것이 금강뿐 아니라 세계적 절승이 될 것이다. 아마 모르면 모르지만 저 일본의 화엄폭과 중국의 여산폭(廬山瀑) 같은 것도 도저히 이와 견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구룡연은 다만 폭포의 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얽힌 전설의 미가 있으니 이것을 보고 저것을 생각할 때 신응형석(神凝形釋)하여 어느덧 나도 구룡연 그것의 일부 자연이 되어 버렸다. 한번 이 구룡연을 보면 10년 장유(壯遊)한 것보다 오히려 나은 영감이 생긴다. 예로부터 명산 대천에 순례함으로써 수양의 중요한 과목을 삼던 화랑도의 심법을 생각함과 함께, 언제나 산 수양은 이러한 대자연 속에서 하여야 될 것을 깨달았다.
굽어보니 동해수(東海水), 발 아래는 일만 봉(一萬峰)
구룡연으로부터 길이 강파르게 되어 비사문(毘沙門)에 다다르매 더욱 깍곱아서 쳐다보면 까맣고 굽어보면 아찔아찔하며, 거기 쇠사닥다리가 놓여 있는데 그것을 붙잡고 올라간즉 그 위에 또 쇠사닥다리가 있으므로 다시 애를 써서 디디고 올라가 조그만 암혈문(巖穴門)으로 나아가니, 이것이 비사문이며 이로부터는 길이 적이 평탄하여졌다.
울창한 태고의 삼림을 호아서 가면 갈수록 기봉괴장(奇峰怪嶂)이 아니면 비폭급단(飛瀑急湍)뿐으로 암만 가도 끝이 없더니 그래도 가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필경 최고 절정인 비로봉(毘盧峰)에 올라섰다. 비로봉은 5천4백여 척의 금강산 중의 대왕봉(大王峰)으로 1만 2천여 봉이 모두 군신과 같이 슬하에 굴복하였으며, 그 앞에 열린 일망무제한 벽해는 마치 수궁에 걸린 거울 셈으로 이 대왕봉의 웅자를 멀리 비쳐줄 듯도 하다.
동해지동갱무동(東海之東更無東)으로 대지의 진두(盡頭)인 이곳에서 해가 돋고 바람이 움직이고 구름이 일어나 1일에도 몇 번이나 풍운 변화가 생긴다.
장풍(長風)이 불지 않으면 밀운(密雲)에 싸이는 비로의 신비한 봉우리가 이날만은 아주 쾌청하여 구름 한 점 없고 바람조차 적었으며, 비로봉의 덕분에 5천4백여 척의 거인(巨人)이 된 나는 처지를 따라 마음도 커져 눈 아래 보이는 금강제봉을 한 주먹으로 깨칠 듯도 하고 동해바다 물은 한 모금에 들여마실 듯도 하여 대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욕을 극도로 발휘하려고 한다.
그러나 비로봉의 아침해를 맞이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니 금강산 비에 시달리고 또 금강산 달에 수희(隨喜)하던 나로서는 정작 금강산 명물인 비로봉의 아침해를 보지 못한 것이 어찌 유감이 아니냐.
석양이 늦어 가매 하염없이 단장을 끌고 내금강을 향하여 내려올새, 깍곱은 석경으로 벌벌 떨면서 발을 디디는 것도 퍽 취미 있는 일이었다.
심산(深山)에 속삭이는 정애(情愛)의 풍류화
금강산은 산악미의 정화일 뿐 아니라 식물학의 보고이다. 어느 전문가의 조사에 거하면 금강산에 있는 식물이 무려 7, 8백 종이 되는데 단풍만 해도 12종에 달하여 조선에 있는 단풍치고는 금강산에 그 전부가 다 있으며, 금강산의 미는 신록의 하절과 단풍의 추절이 제일 좋다 하거니와, 나는 이 두 때에 미치지 못한 것이 한사(恨事)이다. 금강산의 탐승은 내금강으로부터 시작하여 외금강에 이르러야 할 것이거늘, 나는 외금강으로부터 내금강에 오게 된 때문에 먼저 만물상과 구룡연에 잔뜩 배부른 안목을 가지고 만폭동의 수십 리 계곡미를 볼 때 그리 기절장절(奇絶壯絶)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야 아무렇든 만폭동이 내금강의 대표적 절경이니만큼 금강의 중미(衆美)를 집성한 자로 금강의 금강이다. 그러나 만폭동의 팔담(八潭)을 가져 옥류동의 팔담에 견준다면 제각기 특색이 있어 용이히 우열을 말할 수 없으나 나는 아침해가 비칠 때에 상쾌한 마음으로 옥류동을 보았고 저녁빛이 꺼질 때에 피곤한 눈으로 만폭동을 보았으므로 광선과 심리의 관계도 있겠지만 오늘날까지 머리 속에는 만폭동보다도 옥류동의 미가 더 깊이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
외금강문으로 비로봉을 넘어 장안사(長安寺)까지 산로 60리를 1일에 답파하게 된 나로서는, 기실은 금강산을 볼 새도 없었으니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 여행 중에 있어서 만폭동이라면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일어났으니 그는 하마터면 죽게 된 인명이 살게 된 로맨스이었다.
그날 아침에 외금강 도상에서 어떤 일본 남자가 조선 여자하고 서로 애(愛)를 속삭이는 것을 발견하였더니, 그날 저녁에 내금강 노중에서 또다시 어떤 조선 남자가 일본 여자하고 서로 애(愛)를 속삭이는 것을 발견하였으므로 껄껄 웃으면서 금강산에도 시대상이 반영하였구나 이렇게 말하였었다.
조물(造物)도 그네를 시샘했던지 일본 여자하고 속삭이던 조선 남자가 우리와 함께 만폭동 위로 건너오다가 그만 급류에 쓸려 떠내려가게 되었다. 방인(傍人)이 모두 멀거니 보고만 있을 때에 어떤 한 사람이 달려들어 빠진 이를 건져내 주었다. 그의 의로운 행동에 감복되어 성명을 물은즉 그는 그곳에 사는 자유노동자인 조병섭(趙炳燮)으로 천생 순진한 호인이더라.
한(恨)을 천고에 남긴 개골산(皆骨山)의 일배토(一杯土)
금강산에서 마의태자능(麻衣太子陵)을 뵈올 때 나는 한참 동안 회고의 감에 잠겼었다. 한웅큼의 거친 흙 속에 오늘날도 오히려 그 어른의 피자취를 찾아보면 분명히 있으리라.
지금부터 천여 년 전 일이다. 경주에 서울 둔 신라조가 아주 쇠미하여져 개성에 서울 둔 신흥한 고려조에 대하여 무조건으로 항복하게 되어 국가 최후의 운명이 결정될 때 신라의 군신이 모두 고려의 푸른 서슬을 저어하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판에, 마의태자 한 분이 홀로 일어나 반대하였으되, 나라를 들어 남에게 가볍게 내줄 수 없으니 마땅히 우리는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워 의에 죽을 뿐이다 하고 역설하였지만, 그 주장이 물거품으로 돌아감을 보게 된 마의태자는 비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디어 개골산에 들어가 마의초식(麻衣草食)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한다. 이것은 정사에 적힌 개의(槪意)이었다.
그러나 전설에 나타난 마의태자는 정사와는 반대로 금강산 중에서 광복 운동을 꾀한 것으로 내외금강의 여러 지명에서도 그 편영을 짐작할 것이 얼마든지 있다. 혹은 곡필로 쓰게 된 관사(官史)보다 도리어 여항(閭巷)의 전설이 사실을 전해주는 예도 없는 것은 아닌즉, 이로 보면 마의태자는 죽을 때까지 회천(回天)의 위업을 실현하려고 무척 애를 쓴 것이 아닌가. 어쨌든지 나운(羅運)이 장종(將終)할 때 마의 1인이 눈에 띈다. 기울어지는 큰 집을 나무 하나로 버티기 어렵다 하나, 그만큼 비장한 의거가 마의태자에게 의하여 꾀하게 된 것만은 신라 멸망시의 한 이채가 됨을 잃지 않으리가.
금강산에는 고운(孤雲)과 봉래(蓬萊) 같은 선인의 수택(手澤)도 있고 서산(西山)과 사명(四溟) 같은 걸승(傑僧)의 유적도 있고, 또는 율곡(栗谷) 같은 유현의 유적(遊跡)도 있고 기타 고금 명류(名流)의 자취가 많으나 마의태자의 행적처럼 비통한 것은 없다.
우리는 갈 길이 바빠서 외금강에서 그의 능묘(陵墓)만 뵈옵고 내금강에서 그의 집터를 가보지 못하였으니 금강산 유행 중에 있 우리의 마음을 많이 끌고 있는 것은 이 마의태자이었었다. 나는 말 되지 않는 오언절구를 지었으니
신라의 운이 쇠하여 망하려 할 때
오히려 마의태자 안 사람 있었네.
천운을 돌이키진 못했건만
그 정신 길이 남으리(편자 역)
羅運將終夕/ 麻衣有一人/ 回天雖不得/ 百世見精神
이것을 도중에서 불러 서로 웃고 말았다.
녹음 우거진 속에 반일(半日)의 어인(漁人) 생활
이번 유기(遊記)는 총석정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북창강(北倉江)에서 그물질하는 것으로 끝막았다.
북창강은 내금강 말휘리에 흐르는 일대(一大)청천(淸川)으로 멀리 단발령(斷髮嶺)이 까맣게 보이고 가까이는 이름 없는 청산들이 둘리고 수백 호가 넘는 즐비한 시가는 바로 이 강 옆에 전개되었으나 나체로 그물질하는 데는 조금도 구애되지 않을이만큼 강이 으늑하게 놓여 있더라.
더구나 이날 하려던 강연이 하루 뒤로 물러갔기 때문에 하루 동안을 온통 차지하게 된 나는 소일의 한 방법으로서의 가장 재미있는 놀이를 선택한 것이 곧 그물질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압록강 가에서 낚시질하기와 그물질하기를 즐겨하였으므로, 그때 일을 걸핏하면 생각하여 낚시질과 그물질을 아주 아름답게 그리게 되는 버릇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부는 나뿐 아니라 동양 정조의 유한(悠閑)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종래 동양화는 일엽편주 위에 장간(長竿)을 가진 어부를 그리는 것이 일종 하이칼라의 운치이었다. 어쨌든지 동양화의 진선완미(盡善完美)한 천성(天成)의 이상적 표본인 금강산을 보고 온 나에게는 유한한 동양 정조가 넘치는 강상청풍(江上淸風)에 그물질하는 어부놀이를 하는 것도 여흥으로서는 그럴 듯한 일이다.
종일토록 천렵하되 낚시나 그물에 고기 하나 걸리지 아니한 것은 기술의 졸렬함인지 혹은 다른 까닭인지 알 수 없으나 일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천렵의 덕분으로 해서 맑은 공기를 잘 마시고 일광욕을 실컷 했다. 그뿐 아니라 당지 유지인 강구정(姜具楨) 군의 호의로 시장했던 차에 부계죽(敷鷄粥)에 배를 불리고 나니, 그제야 삼공불환 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의 흥치 있는 노래가 나오려고 들먹거린다.
1일 뒤에 내금강 지국장 김중배(金重培) 씨의 주선으로 당지 예배당에서 예정의 강연을 마치고 그 익일은 금성에서 또 그 익일은 철원에서 강연을 하였다. 그런데 철원에서 이열(李洌) 군을 만나 한화(閒話)로 유쾌히 일석(一夕)을 보내게 되니 군은 곧 구한말에 헤이그[海牙]에서 돌아간 이준(李儁) 씨의 영손(令孫)이다.
그리고 이번 여행 중에 외금강으로부터 내금강에까지 나를 안내 주선하여 준 온정 지국장 김유경(金遊卿), 장전 지국 총무 백문덕(白文德) 양군의 심후(深厚)한 우의에 대하여 특히 명사(鳴謝)한다.
(『湖岩全集』, 朝光社, 1939)
♣지은이 문일평(文一平): 사학자ㆍ언론인(1888~1936). 호는 湖巖. 平北 義州 출생. 日本 明治學院 등에서 공부하고(李光洙와 同級生) 中國의 新聞社에서 勤務하였으며 朝鮮日報社의 編輯 顧問으로 일하였다. 國史를 專攻하여 많은 史論과 作品을 남겼다. 著書에 『湖岩全集』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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