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68) 의상(儀像) 제작의 전문가였던 천문학자 김돈(金墩)

거북이3 2013. 6. 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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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인물열전 (68)

                   의상(儀像) 제작의 전문가였던 천문학자 김돈(金墩)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김돈(金墩:1385-1440)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천문학자로 본관은 안동이며, 고려 원종 때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고 왜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던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김후(金厚), 아버지는 목은(牧隱) 이색과 동문수학한 군사공(郡事公; ‘郡事’란 현 郡守에 해당) 강은(康隱) 김칠양(金七陽)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쓰더니, 1417년(태종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28년(세종10) 왕명으로 《서한이하 역대보계도(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찬진(撰進)하였다. 1434년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으로 재임할 때 본인이 직접 쓴 글씨로 글씨체가 예쁘기로 알려진 동활자(銅活字)인 갑인자(甲寅字)의 주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집현전부제학으로 불교의 폐단을 왕에게 상소하고, 그 뒤 부승지가 되었다.

세종(世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그가 사양하고 가지 않았더니, 과거에 급제하여 합격을 발표할 때,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말씀하기를, “내가 경(卿)을 보고자 하였는데 경이 문득 나를 피하더니 이제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고 뽑아서 집현전(集賢殿)에 들게 하고 항상 경연(經筵)을 겸직하게 하였다.

1438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어머니가 강진(康津)에 있다고 하여 여러 번 지방관직으로 나가기를 요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역마(驛馬)를 내려주어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봉양할 수 있도록 하여줄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여, 사림(士林)에서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그는 또한 의상(儀像: 渾天儀와 같은 천문관측기구)을 만드는 데에도 정교하여 세종의 명으로 김조(金銚)와 함께 내전의 왕의 침실인 강녕전(康寧殿) 서편 뜰에다 천문기구를 설치해 놓는 흠경각(欽敬閣)을 창설하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 자 되게 하고, 또 그 안에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는데, 매우 정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산의 사방에는 사시(四時)의 경물(景物)과 사람의 형상, 온갖 동식물들을 만들어 절후에 맞게 배열해 놓아 백성이 농경의 어려움을 알도록 하였다.

또, 경회루 남쪽에 장영실(蔣英實) 등이 만든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설치하고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고 하였다. 보루각에는 삼신(三神)을 설치하였는데, 시간을 알릴 때에는 종을 울리게 하고, 경(更:하루밤은 다섯 경임)을 가리킬 때에는 북, 점(點: 한 경은 다섯 점임)을 알려줄 때에는 징을 울리게 만들었다. 경회루 북쪽의 천문관측기구인 간의대(簡儀臺: 觀天臺라고도 함)를 제작할 때에도 참여하였다. 그가 쓴 흠경각, 보루각, 간의대의 기문(記文)이 『동국여지승람』제1권 경도(京都) 상(上) 궁궐의 「경복궁」조에 자세히 실려 있다.

한때 귀양 가는 이숙번(李叔蕃)이 순금 띠를 주면서 자신의 구출을 의뢰하자, 여러 방법으로 구출을 모색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집현전 출신으로 7년 동안이나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논변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며, 병이 들자 관직을 승격시켜 인수 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요즘 내무부 장관에 해당되는 정2품 이조 판서(吏曹判書)에까지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1년(1439) 6월 21일(정유) 3번째 기사를 보면, 강무(講武: 왕의 親臨下에 수렵을 통해 군사를 훈련시키는 행사)를 세자에게 위임하기 위한 논의를 하는 대목에서 김돈이 세종의 주 논의 대상자로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

세종이 김돈에게 말한다.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파서 10여 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浮腫)으로 아픈 적이 오래되었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하여 그 고통을 이루 참을 수가 없다. 지난 계축년 봄에 온정(溫井)에 목욕하고자 하였으나, 대간(臺諫)에서 폐가 백성에게 미친다고 말하고, 대신도 그 불가함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두세 사람의 청하는 바에 힘입어 온정에서 목욕하였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 뒤 간혹 다시 발병할 때가 있으나, 그 아픔은 전보다 덜하였다.

또 소갈증(消渴症)도 열서너 해가 되었으나 이제는 역시 조금 나았다. 지난해 여름에는 또 임질(淋疾)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지난봄 강무(講武)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인하여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은 알겠으나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지난봄에 강무한 것을 후회한다.

한 가지 병이 간신히 나으면 또 한 가지 병이 생기매 쇠로(衰老)함이 심한 듯하다. 해서 큰일만 처결하고 작은일은 세자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너희들과 대신들이 모두 말리기에 내가 다시 생각하매, 내가 비록 병이 많을지라도 나이가 아직 늙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가볍게 말을 낸 것을 후회한다. 다만 강무(講武)는 나라의 큰일이고 조종께서 이미 세우신 법이다.…”

이에 김돈이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세자는 군부(君父)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신이 지난번에 아뢰기를, ‘현시로써 말하오면, 세자가 비록 삼군(三軍)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 나라에 행할지라도 누가 의심하고 다른 마음을 가지는 자가 있겠사옵니까마는 후세에 예사로 삼아 행한다면 반드시 소인이 있어 이간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오매,…여러 승지가 모두 아뢰기를,

“진실로 돈의 아뢴 바와 같습니다.”

하였다.… (2013.6.2.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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