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69) 고려사』와 『용비어천가』를 찬진(撰進)한 권제(權踶).hwp
경북 인물열전 (69)
『고려사』와 『용비어천가』를 찬진(撰進)한 권제(權踶)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권제(權踶:1387∼1445)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초명은 도(蹈), 자는 중의(仲義)·중안(仲安)이고, 호는 지재(止齋),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이며, 아버지는 예문관 대제학과 대사성 등을 지낸 양촌(陽村) 권근(權近), 어머니는 우정언 이존오(李存吾)의 딸이요, 부인은 판사(判事) 이휴(李携)의 딸이다.
처음 개국공신의 아들로서 음서(蔭敍) 제도로 관직에 나아가 경승부 주부(敬承府主簿)에 보직되었고, 여러 번 옮겨서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가 당시 대사헌과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하는 바람에 파면되었다.
그 후 친시(親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급제하기 전에 벗 민후생(閔厚生)ㆍ최문손(崔文孫)ㆍ최효손(崔孝孫)과 더불어 금천(衿川)의 삼성산(三聖山)에서 함께 글을 읽었는데, 네 사람이 서로 잇달아 과거에 급제하였다. 급제 후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에 임명된 이래, 병조정랑, 예문관 응교를 거쳐 성균 사예(成均司藝)에 임명되었다. 1418년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하고 세종을 세자로 임명하자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있다가 전사 소윤(典祀少尹) 겸 세자 좌문학(世子左文學)으로 임명되어 세자의 보도를 담당하였다.
세종 즉위 후 1419년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고, 사은사 경녕군 이비(敬寧君 李裶 : 태종의 제1서자)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승정원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이어 좌대원(左代言)에 올랐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했다.
그 뒤 3년상을 마치고 1423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제수되고, 예조 참판을 거쳐 대사헌, 함길도 도관찰사가 되었고,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432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동년 가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이조판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문한(文翰)을 맡고, 1437년 세종의 왕명으로 김종서, 신숙주,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를 찬진(撰進)하였으며, 1438년 명나라에 계품사(計稟使)가 파견될 때 계품사 혜령군 이지(李祉)의 부사인 계품부사로 임명되어 북경에 가서 칙서를 받들고 돌아오니, 토지와 종을 하사받고,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예문관 대제학으로 있을 때 사직을 청하여 아뢰었다.
“신은 어려서부터 병이 많았는데, 이제 50이 넘어서 몸이 쇠약하고 피곤함이 더욱 심하옵니다. 지난여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로 병을 무릅쓰고 직무에 봉사하였사오나, 또 식상(食傷)하는 병을 얻어 증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매, 의원에게 명하시와 약을 내려 주시고 여러 가지로 구료(救療)하게 하시어 평안함을 얻었사옵니다. 출사한 지 사날 만에 또다시 발작하여 이같이 하기를 두세 번 거듭하기에 이르러, 병세가 점점 더 악화되어 온전히 먹지를 못하옵고 날로 더욱 노곤하와, 매우 고치기 어려울까 두렵사옵니다. 청하옵건대, 신의 관직을 파면하옵시와, 안심하고 약과 음식을 먹게 하여 길이 성상의 은덕을 입게 하옵소서.”
그러나 상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439년 겨울, 조카 권담(權聃)이 이혼한 전처의 딸에게 노비를 나누어 줄 때 증인이 된 것이 문제가 되어 원주(原州)목사로 폄출되었다가 수개월 뒤 내직으로 돌아와,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오르고, 1443년 의정부 좌참찬 등을 거쳐, 이듬해 우찬성(지금의 부총리급)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3월에 종병(瘇病: 수중다리)을 앓게 되었는데, 임금이 날마다 내의(內醫)를 보내어 문병하게 하며, 병이 위독하여지자, 특별히 맏아들 권지(權摯)에게 한 계급을 건너뛰어 벼슬을 제수하였다.
오래 병석에 누워 있다가 59세로 사망하였다. 세종은 이틀 동안이나 조시(朝市: 조정의 모임)를 정지했고 관에서 장사를 도와주게 했다.
우찬성으로 있을 때,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다. 『용비어천가』는 악장(樂章)의 하나로,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작품이다.
총명 박학했고, 오랜 동안 문형(文衡 : 대제학의 다른 이름)을 역임했으며, 저서에『지재집(止齋集)』,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상ㆍ하편 등이 있다. 상편은 중조(中朝: 중국), 하편은 동국(東國: 우리나라)을 읊은 것이다.
『동문선』 제55권 주의(奏議)에는 그의 글 「청 정 천명당 서(請停遷明堂書)」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선(揚善)이 상서하온 일…경복궁(景福宮)은…거기에 만약 궁실을 짓지 않고 상인(常人)을 거처하게 한다면 지덕(地德)을 타고 혹 호걸이 날지도 모르니 이는 사직(社稷)에 이로움이 되지 못한다.…
풍수설은 주공과 공자가 말씀하지 않았고 온공(溫公)과 문공(文公)이 취하지 않은 것이오니 허망하고 신용할 수 없다 함은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옵니다.…
대저 창업(創業)하여 수통(垂統: 훌륭한 사업을 여러 대에 걸쳐 전함)하신 임금께서는 그 견식이 원대하고 그 사려가 심원하옵니다. 우리 태조(太祖)의 신모(神謀)와 예산(睿算: 임금의 나이를 높여 이르는 말)은 같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었사오며 신민의 위에 가는 것이었사옵니다. 비록 호령(號令) 하나를 발하시더라도 결코 가볍게 처리하신 적이 없사옵니다. 하물며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짓는 큰일에 있어서야 어찌 아무 상고(詳考) 없이 마음대로 정하셨을 것이옵니까?…
전기(傳紀: 人物考)가 있은 이래로 어느 제왕도 그 탄생된 곳이 길(吉)해서 제왕이 되었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사옵니다. 가령 그러한 이치가 있다 하더라도 호걸이 엎드린 곳은 한이 없는 것이니, 천하의 길지(吉地)를 모두 누르고 막을 수가 있사오리까?…
(2013.8.14.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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