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최미아의 작품세계)
이 웅 재
부천대학 민충환 교수의 전화 한 통화가 거북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를 일주일간 꼼짝 못하게 했다. ‘복사골문학회’를 이끌어가는 민교수 자신이 써도 될 텐데, 굳이 내게 부탁한 것은 아마도 자신이 아끼는 분의 글을 좀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평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생각하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글 한 꼭지 한 꼭지를 읽어나갈 때마다, 오랜만에 대하기 힘든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민교수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한 마디로 최미아 씨의 모든 글에서는 고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속의 자연풍경이나, 그곳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곳에서 지내며 겪었던 이런저런 얘기들이 살가운 전라도 사투리와 더불어 우리가 잊고 지내던, 소중했던 과거의 시간들을 되살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미의 글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내용적인 면으로는 무엇보다도 사라져가는 옛것에 대해 애틋한 그리움을 그려냈다는 점이요, 기교적인 면에서는 결말 부분의 처리가 거의 완벽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것은 첫 번째 작품인 ‘기제사’에서부터 찾아볼 수가 있다.
삼 년 탈상한 후로 처음 참석한 제사다. 아이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멀다는 이유로 오지 못했다. 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유난히도 좋아하셨던 아버지. 손자손녀들까지 이렇게 많이 왔는데 오늘밤만이라도, 아니 잠시만이라도 우리 곁으로 오실 수는 없을까.
우리들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한 쪽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가 혼잣말하듯
“그 길은 뭔 놈의 길이 한번 가면 못 오끄나. 이리 다 왔응께 오고 잡기도 할 것이요만.” 하셨다.
다음날, 바다는 잔잔했다.
요동치던 바다였었는데, ‘다음날, 바다는 잠잠했다’는 말 한 마디로, 지은이는 마음속에서 아버지가 왔다 가셨을 것으로 믿고 있음을 무언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작품 ‘별은 총총’에서도 멋진 결말 처리를 만날 수가 있다.
“야는 잠들어 부렀네. 야 좀 안아사 쓰것소.”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다. 아부지가 나를 안는다. 자는 척 가만히 있다. 아부지의 어깨 너머 별들이 쏟아질 듯 총총하다.
자는 척하면서 아버지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지은이는, 이젠 어린아이가 아닌 다 자란 어른이면서도 ‘아부지의 어깨 너머 별들이 쏟아질 듯 총총하다’고 슬쩍 과거의 시간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녀’의 끝 대목을 보자.
“엄마, 갑자기 죽는 얘기는 왜 하요. 딸네 집에서 돌아가시면 아들들이 섭섭하지.”
눙치듯이 한 마디 하고 앞선 어머니를 바라보니 쪽진 머리에 꽂혀 있는 핀이 노을빛에 곱게 물들어 있다.
죽는 얘기와 고운 노을빛이 이루어내기 힘든 조화를 역설적으로 곱게 물들이고 있다고 하겠다. 역전 드라마를 이룬 친구 집에 몇몇 친구와 함께 놀러갔던 ‘역전(逆轉)’에서는 또 어떤가?
다른 친구 남편들과 아이들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연신 핸드폰들이 울렸다. …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더라도 집 떠나 멀리 여행을 왔는데 궁금하지도 않단 말인가…
김포공항에 내리니 끄느름하다. 저녁이라도 먹고 헤어질까 하다가 더 늦기 전에 그냥 집으로들 가자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저만치 남편이 무심하니 서 있다.
김포공항으로 마중까지 나온 남편을 핸드폰 따위나 뻔찔나게 해대는 친구 남편들과 대비시켜 ‘무심하니 서 있다’고 능청을 떠는 지은이에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역전’이란 제목이 연출하는 ‘역전’ 드라마라고나 할까?
제1부 ‘별은 총총’에서는 지은이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물씬 느껴진다.
‘눈 오는 밤’에서는 화투를 치러 가서 밤 늦게까지 돌아오시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얘기가 나온다.
화투방으로 쫓아가지도 못하고 긴 밤 내내 바느질로 속을 삭이셨을 어머니. 나이 사십이 넘은 이제야 어머니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왔나 보다. 손에 혹 무엇이 들려있지 않으려나.
화투방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봉지. 긴 밤 내내 속을 삭이셨을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기대감을, 나이 사십이 넘은 지금은 남편에게서 느껴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아버지의 짤막한 ‘편지’에서 절절하게 느껴진다. 오랜 세월 동안 갈색으로 변한 아버지의 편지. 그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막내딸 美娥야
不必多言하고 要幸의 極致로구나.
高官이면 무엇하고 社長이면 무엇할까. 사람이 기쁠 때에 感激의 눈물이 나온다는것을 이번에 처음 체험하얏다. 그 동안 마음 고생 이제 모두 안개 걷듯 거치고 明快한 햇빛이 빛이는구나. 아기자기한 多情한 막내 恒常 안쓰런 마음으로 보고 싶다.
父書
부럽다. 아버지에게서 그처럼 다정스런 편지를 받아보았던 지은이를 나는 한없이 선망한다. 핸드폰에, 컴퓨터의 이메일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이 고귀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편지가 아니던가?
사람들은 말한다. 수필은 지나치게 개인적이라서 문학성이 뒤진다고. 나와 무관한 남의 가계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캐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독자들로서는 쉽게 식상하게 마련인데, 최미아 씨의 글은 도리어 읽을수록 새록새록 그 가정사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게 되는 데에서, 오래 묵은 된장으로 끓인 찌개에서처럼 푸근한 정을 느끼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는 작자의 필력이 범상치 않은 때문일 것이다.
결혼 후에는 별로 화투를 해보지 못했다. 시댁 식구들이 모이면 가끔씩 화투를 하지만 막내며느리인 내가 낄 자리는 없다. 그냥 패 읽기에 서투른 남편 뒤에서 고수의 눈으로 그윽하게 바라볼 뿐이다.
‘화투’에 나오는 말이다. 속내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한편으로 슬그머니 눙치는 말에서 우리는 작자에게 한 걸음 다가서게 됨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눈물 사는 여자’에서 볼 수 있는 “이러다 감정마저 무뎌져 마음까지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릴까봐 겁이 났다”든가, “오늘밤, 후북이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다”는 표현에서도 우리는 그미의 필력과 다시 한 번 맞닥뜨리게 된다.
‘탁상시계’, ‘열녀각 앞에서’, ‘옛집’은 어머니와 관련된 얘기라서 편차에서의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불만스러움도 없지 않다.
다시 최미아 씨의 글을 차근차근 읽어 보자. 그미의 글에서는 우리가 흔히 대할 수 없는 토박이말들도 여기저기 자연스레 등장하여 정겹다. ‘과수원집’의 ‘도사리’는 ‘다 익지 못한 채 저절로 떨어진 풋 실과’를 가리키는데, 요즈음 우리는 이 말을 쉽게 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적절한 의태어의 사용도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고물을 묻힌 인절미 하나를 입안에 넣으면 덜 빻아진 뭉얼뭉얼한 쌀들이 씹혔다.(‘꽃은 지면서 향기를 낸다’에서)
푹 묵은 팥을 식혀 물을 부어가면서 조물조물 체에 걸렀다.(‘동지팥죽’에서)
이러한 표현은 ‘바다 이야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큰바다는 집채만한 파도가 인다는데 우리집 앞 바다는 넓지 않으니 파도가 크지 않을 수밖에요. 뜨뜻한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 있으면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 안 들리는 듯 소살소살거리죠. 이런 날 운 좋게 함박눈이라도 내리면 얼마나 좋은지요. 너운너운 날려 바닷물로 빠지는 눈송이들을 보고 있으면 공주가 산다는 성도 부럽지 않죠.
아주 다정다감한 마음으로 대상과 교감을 하고 있는 작자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잖은가? 손때 묻은 옛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씨도 지나쳐 버릴 수 없다.
대청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섰다. 헌 이부자리며 옷가지들이 널려 있다. 어둠침침한 대청마루 한가운데 낡을 대로 낡은 어머니의 장롱이 놓여 있다. 시집올 때 외할아버지가 “니 평생 써도 암상토 안 할 것이다”면서 튼튼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장이다. 빛을 내던 자개도 손잡이들도 떨어져 나갔다. 늙어버린 어머니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다.(‘옛집’에서)
이에 덧붙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조건 과거형만 고집스레 쓰려하고 있는 데 비해 현재형을 적절하게 살려 쓰는 기교도 짚고 넘어갈 일이다.
봄이 되면 앞산은 진달래로 뒤덮이고 산자락 밭에는 노란색 크레용을 칠해놓은 듯 유채꽃이 만발하지요. 유채밭이 전부 바다에 빠진 듯 물 그림자를 만들어 놓은 고요한 바다에, 그림처럼 돛단배가 지나가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풍선이라고 하더군요. 바람이 없는 날은 시간이 멈춰 선 듯 느릿느릿 가죠. 한참을 바라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돛만 한들한들거리고 있어요. 잊어버리고 딴청을 부리다가 쳐다보면 언제 흘러갔는지 섬 모퉁이를 돌고 있습니다.(‘바다 이야기’에서)
오랜만에 찾은 고향. 거기서 바라보는 바다 이야기인데, 그 바다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자연스레 현재화되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최미아 씨의 글 여기저기에서 쉽게 만나볼 수가 있는 일이다.
전 4부의 글들 중에서도 제1부의 글이 가장 감칠맛이 있어 조금 길게 언급을 했다.
제2부는 주로 일상적인 얘기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는데, 여기서 우리는 보다 작자의 인간적인 면모와 만나게 된다.
‘찜’은 집에서 기르는 개 쵸코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작자는 “그래, 우리 편하자고 말 못하는 쵸코를 고자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지”하고 말하지만, 손님이 와서 잠깐 놔 둔 가방에도, 장 봐온 비닐봉투에도, 새로운 것이 있기만 하면 오줌을 싸서 찜해 놓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아이들 방에 들어가 책가방에도, 그리고 안방까지 접수하고 급기야 작은아이 등까지 따뜻하게 적셔놓게 되자, “참을 만큼 참아 보았지만 이젠 할 수 없다”고 병원에 가서 수술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으나, 축 쳐져버린 쵸코를 안고 돌아오면서 말한다. “이제는 우리가 쵸코를 찜할 차례다.” 작자의 여린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목소리’에서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아이들의 말에, “나도 파스텔 색의 목소리를 지니고 싶다”고 여성다운 속내를 비춰 보이기도 한다. 그미의 여성스러운 면모는 ‘쑥색 원피스’에서 절정을 이룬다,
펑펑한 임신복을 입어보는 것이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나만의 소원이었다. 남산만한 배를 내밀고 다니는 여자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은 가득했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려졌다. 임신복 매장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왜 그리 입덧하는 여자들이 자주 나오는지 슬그머니 리모콘을 눌러버리곤 했다. 그러면서 나도 아이만 생겨봐라 남편 앞에서 보란 듯이 헛구역질도 하고 예쁜 옷도 원 없이 사 입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토록 임신을 바라던 그미는 정작 임신을 하자 실제로는 단 한 벌도 멋진 옷을 사 입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어느 날 남편이 사다준 쑥색 원피스 하나로 행복해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시댁이 좋다’의 마무리 부분을 보자.
“여보, 나는 시댁식구들이 좋아. 다른 나라 가서 사는 것은 꿈도 못 꿀 것 같애.”
“핑계 좋네. 말이 안 되니까 못 가겠지.”
‘그러는 당신은 말이 돼?’ 튀어나오려는 말을 집어삼킨다.
이렇게 멋 없는 남편이지만 그냥 시댁 옆에서, 남편 옆에서, 아이들과 같이 살련다.
이 얼마나 사람다운 냄새가 나는 글인가? 그래서 우리는 최미아 씨의 글이 좋다.
제3부는 주로 도시생활을 소재로 하긴 했으나 역시 고향과 긴밀하게 맥이 닿아있는 글들이다. 아파트 입구 조그만 화단에 한 무더기 피어 있는 분꽃도 30년 전, 고향의 장독대 옆에 피었던 그 분꽃 그대로요(‘분꽃은 그대로 피는데’), 친정에서 가지고 온 호박에서 부모님과 오빠네 식구가 흘린 땀방울을 느끼고 고향의 숨길을 듣기도 한다(“호박”). ‘꽃은 지면서 향기를 낸다’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들어 주던 쑥떡이 등장하고, ‘가을걷이’에서는 친정어머니가 보내준 참기름, 고춧가루, 팥, 녹두 따위가 들어 있는 소포 얘기가 나온다. ‘동지 팥죽’을 쑤어 먹으면서도 옛날 고향생각에 젖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연근정과를 만들면서’와 같은 글에서는 호박떡, 무떡, 찹쌀엿, 양갱, 연사 그리고 연근정과 등을 만드는 법 등이 소상히 소개되어 있기까지 하다. 잊혀져 가는 우리 먹거리들에 대한 이런 기록은 후대를 위해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의 역할마저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더욱 반갑다.
지금 이런 걸 만들어 먹는 집은 드물다. 자로 잰 듯 반듯한 모양들로 꾸며져 있는 선물세트들은 많다. 하지만 수입농산물로 채워진 것이 대부분이다. 모양은 예쁘지만 먹어 보면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 입에서 사르르 녹아야 제맛이다. 추운 겨울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보면서 한 입씩 먹었던 그 맛이 오늘 따라 더욱 생각나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작자가 그리는 그 어머니의 모습은 어떨까? 시집올 때 올렸던 낭자머리를 아직까지 하고 계신 어머니. 그 어머니는 어떻게 말하자면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국보급의 보물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고 동백기름을 손바닥에 떨어뜨려 두 손을 비빈 다음 가르마 양 옆으로 다독거리면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들큰한 동백기름 냄새는 어머니의 나들이를 알리는 셈이었다. 지금도 어디서 구하는지 동백기름을 조금씩 덜어가지고 다니신다. (‘비녀’에서)
지은이는 그런 엄마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말다툼을 한다고 했다. 그런 대목을 읽노라면 그미의 삶이야말로 진실로 삶 같은 삶이란 생각이 든다. 서로 간에 티격태격할 수 없는 사이라면, 그것은 벌써 서로가 상대에 대해 무간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잘 가셨어요?”
가방과 보따리가 기차역 계단을 오르내리기에 수월치 않았으리라.
“뭐하러 전화는 했냐. 으뜬 학생이 짐 다 들어주고 택시까지 잡아줘서 타고 왔다. 애기들 잘 켜라. 니 할 일은 그것이 제일 큰일인께. 안 죽고 살믄 또 은제 갈랑가 모르것다.”
어젯밤 앙금은 하나도 없는 고향의 편안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다. (‘또 언제 오실지’)
어머니의 말씀은 ‘고향의 편안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4부의 ‘당치 않은 꿈’은 앞의 1․2․3부의 글들을 휘갑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점차 사라져 가는 것들, 하나씩둘씩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애착이 옛것을 하찮게 여기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새삼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미의 글은 그대로 어떤 글보다도 더한 문명비판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편리해지는 시대, 모든 것이 대형화되는 시대, 재래의 동네 슈퍼가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린 ‘우리 동네 슈퍼’는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 동안 씁쓰레하게 만들어 준다. 한때는 아르바이트 아줌마를 두 명이나 둘 정도로 번창했던 슈퍼가, 가까운 곳에 백화점이 문을 열게 되자 살아남기 위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가는 모습은, 어찌 보면 우리 사회의 생활사의 변천을 아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글이라고도 하겠다.
냉장시설을 갖추고 생선을 팔다가, 어느 날 밑반찬으로 바뀌고, 백화점보다 더 싸다는 대형 할인매장들이 속속 생겨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부녀회에서 하는 알뜰장이 단지 안에 서게 되자 드디어는 ‘유환천숯불갈비’로 바뀌더니, 갈비탕을 비롯하여 탕이란 탕 종류는 전부, 김치찌개를 비롯하여 찌개 종류가 모조리 씌어지다가, ‘홍길동해장국’으로 바뀌고, 또 얼마 안 가서 ‘남원추어탕’으로 변경되더라는 얘기는 기실 그 슈퍼의 변모과정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서는 쓸 수가 없는 얘기였다. 지은이는 그만큼 나만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본다는 말이겠다.
그 가게는 다시 실내골프연습장으로 바뀌고 있다. 어떻게 보면 동네 슈퍼의 주인은 시세에 따라 발 빠른 변신을 거듭하고 있지만, 결국은 또다시 ‘초대형 실내골프장 입점 확정’이라는 현수막이 펄럭거리게 되고 만다. 이쯤에서 지은이는 마지막으로 저 가슴 속 밑바닥에서부터 참고 참았던 말을 울먹이면서 내뱉고 있다. “이제는 우리 동네 슈퍼의 변신을 그만 보고 싶다.” 진정 이 말은 우리 모두가 하고 싶었으면서도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우리 대신 힘겹게 발설하고 있는, 그미의, 하고 싶었던 말, 할 수밖에 없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버리면서 살고 싶다’에서는, 이사를 가면서 남편이 이것저것 다 버리는 것을 보고 “살림의 반은 거덜이 나 버린 것 같은 기분”에서 “살면서 아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니 그때 두고보자 단단히 벼르던 마음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고 하던 지은이였는데, 그런데 그미는 말한다. “얼른 밖에 나가봐야 한다. 오늘은 재활용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니까”라고. 또다른 재활용품을 골라 오겠다는 말이다. 그미와 같은 여인만 있다면 아마도 ‘이혼’이라는 말 따위는 우리나라의 사전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다.
새로운 것, 편리한 것에 대한 일종의 반어라고나 할까? 문명에 대한 그미의 역설적인 표현은 ‘어둠은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절정을 이룬다.
“2시, 한밤중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거실로 나온 그미는 VTR, 오디오, 비디오폰, 김치냉장고, 전자레인지, 냉온수기, 가스차단기, 전화기 등의 불빛들이 뺀질뺀질한 상판때기를 내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의 반은 어둠이고 반은 밝음인데 어둠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밤중이어도 많은 불빛들이 우리를 비추고 있다…. 어딘가에 칠흑같은 어둠이 있기나 할까. 한 발 앞도 보이지 않아 눈 뜬 봉사가 되어 버리고, 반질반질한 어둠만이 하나 가득한 밤이. 그래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안에 엄마 품과 같은 포근함과 넉넉함이 있었다. 그 어둠이 그립다.
‘어둠이 그립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미에게는 어둠마저도 멀리할 수 없는 우리의 이웃인 것이다. 그래서 그미의 ‘당치 않은 꿈’은 당치 않은 말로 여겨진다. 그미의 문학세계가 ‘과부하’되기에는 아직도 많은 지성과 감성의 여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미의 문학적 역량에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앞으로 많은 감칠맛 나는 글들이 씌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이하의 부분은 참고로만 하고 빼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철필을 보내주신 것 매우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옥에 티’를 골라보자.
그미의 글에는 주어 생략이 너무 많아 어색하게 느껴진다든가 의미가 모호해지는 폐단이 느껴진다. ‘바다 이야기’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쯤이면, 지나가기만 하던 돛단배가 집 앞에 닻을 내릴 때도 있다고 했다. 그 배 위에는 가득 옹기가 실려 있다면서 반질반질 윤이 나는 갖가지 옹기들이 차곡차곡 폼을 잡고 있다는 말을 하고는, 느닷없이 “빌린 달구지에 옹기를 싣고 이 마을 저 마을 돌면서 팔고 다닙니다”하는 말이 이어진다. 주어가 없기에 누가 그러는지 얼핏 감이 잡히지 않는다.
주어의 생략과 아울러 지나친 조사의 생략도 티라고 하겠다.
시숙님 연세 66세시다. (‘해는 다시 뜨고’)
처음 시댁에 왔을 때 생각이 났다. (‘과수원집’)
앞의 것은 실수로 보이지만, 가끔 그와 유사한 표현이 눈에 띠기도 해서 예로 들었고, 뒤의 것은 ‘때→때의’가 되어야 의미가 확실해질 것 같아 거론하는 것이다. ‘왔을 때 생각이 났다’와 ‘왔을 때의 생각이 났다’는 현격한 의미의 차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주어나 조사의 생략은 조금이라도 문장의 길이를 단축해 주기에 때에 따라서는 글 자체에 속도감을 준다든가, 문장 자체에 대해 깔끔한 맛을 주는 경우가 있어 바람직할 수도 있으나, 어떤 때는 위의 예와 같이 문제성을 내포할 수도 있기에, 항상 조심해야 할 일이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만연체 문장에서의 묘미도 살릴 줄 알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 편의 작품 길이에서도 유효한 말이다. 수필이라면 통상 원고지 15매 내외의 글이라는 생각들이 상식화된 성싶은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일상적 관념은 깨뜨리면 오히려 참신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우도 가끔 경험할 수 있지 않은가?. 20매 이상의 수필, 5매 정도의 수필도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최미아 씨의 글에서는 문장과 문장의 연결에서 인과성이 약화된 표현이라든가 문장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표현도 더러 보인다.
‘탁상시계’에서의 “내가 일등을 한 처음의 기억이다”와 같은 문장은, ‘내가 일등을 했던 첫 번째(또는 유일무이한) 기억이다’쯤으로 고쳐 써야 의미가 잘 통하지 않을까? 같은 글에는 “빠른 걸음걸이를 옮기고 있었다”는 표현도 나온다. 이것도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또는 ‘빠른 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로 써야 순편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시제(時制)의 사용에도 좀더 주의를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같은 글 속에는 “온 가족이 모여 풀어 본 상자 속에서 동그란 탁상시계가 나왔다. 처음 본 것이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여기서 ‘처음 본’은 ‘처음 보는’으로 고쳐주어야 자연스러울 것으로 여겨진다.
가끔 보이는 구어체 문장도 눈에 거슬린다. “몇 등 했냐고 물어보는 아빠에게…”(‘달리기’)와 같은 표현은 여러 곳에서 산견되는데, ‘했냐’는 표현은 대화를 직접 인용한 말이 아니므로 ‘했느냐’로 씀이 좋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겪은 것처럼 쓴 문장들도 주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하겠다. ‘꽃은 지면서 향기를 낸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차근차근 읽어보면 무엇이 잘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마당 한 쪽에 큰일 치를 때나 쓰는 가스레인지가 있는데 자주 쓰지 않으니까 잘 켜지지 않았나 보다. 몇 번을 해도 안 돼 신문지에 불을 붙여 가스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조금씩 새어 나왔던 가스에 확 불길이 일었다. 엉겁결에 바가지로 물을 퍼다 불을 끄고 나자 얼굴이 따끔거리고 달아올랐다. 거울을 보니까 얼굴에 달걀만한 물집이 여기저기 생겨 있었다. (나는 처음) 쑥을 삶다가 다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못되게도 ‘지금 쑥떡(을) 해 먹으면 참 맛있는(→맛있을) 철이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조금만 주의를 하면 쉽게 고쳐질 수 있는 문제들이라 최미아 씨 글의 품격을 크게 해치는 것들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 가지 욕심이라면, 이제는 고향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래야지만 소재나 주제를 좀더 다양화시키고 확대 심화시키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다시 한 번 계속 좋은 글쓰기를 바란다.
(잔잔한 시하바다. 산과 들. 2005년 4월. pp.211-227.)
*약력;
현재 동원대학 출판미디어과 교수
한국수필문학가협회 행사분과 회장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이사
맥문학동인회 이사
분당문학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운영위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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