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실 씨의 시세계
이 웅 재
어느 날, 최봉실 씨가 간곡히 청해 왔다. 삶의 길목에서 잠깐씩 쉬는 틈틈이 100여 편의 시를 썼는데, 그냥 묵혀두기 아까워 묶어서 책으로 내고 싶은데 한번 보아 달라고.
나는 원래 시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사양할까도 해 보았으나 모처럼 해온 부탁인데다가 그의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는 터수라서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승낙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최봉실 씨. 이름은 얼핏 여성스럽지만, 그는 건장한 사내이다. 그는 얼굴 표정이야말로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는 제1의 소중한 것, 찌푸리고 있는 표정으로는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상하게 만드는 것이니, 항상 웃으면서 지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고 밸도 없이 허허 웃고만 지내는 무골호인(無骨好人)은 아니다. 호오(好惡)의 감정이 분명한, 때로는 시비선악의 구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명확함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갈 수 있는 지도자적인 성품의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선인들은 이름이 사람을 지배한다고 여겨 왔으니까 말이다. 봉새 봉(鳳) 자에 열매 실(實) 자. 봉실(鳳實)이란 봉황이 먹는 열매라는 의미일까? 『장자』에 따르면 봉황새는 오동나무[桐] 가지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非梧枝不棲 非竹實不食 非醴泉不飮]고 했다.
대나무 열매,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열매는 못 보았지만, 꽃은 본 적이 있다. 경남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에 있는 장금정 씨의 ‘새미골 가마’ 터에 갔을 때, 생전 처음 대나무 꽃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 때의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보면, 지리산 자락에서는 대나무 열매가 여는 일이 가끔 있었다고 하지만, 대나무 열매란 정말로 보기 어려운 것이라 여겨진다. 대나무는 수명이 보통 20년인데, 대나무 열매는 60년이나 100년 만에 맺는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 열매가 맺히는 일은 아주 특수한 사례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봉실 씨는 바로 그러한 특수한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최봉실 씨가 『빨강 그네』라는 시집을 상재(上梓)한다. 표제작 ‘빨강 그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둠이 깔리는 어두운 밤에
온통 세상은 별천지다. 큰 별과 작은
별들이 모여 세상에 어렵고 힘들며
꿈과 희망을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그들을 위하여 만찬을 한다고 노래한다.
그대와 나 수많은 이들이 함께 모여서
무지갯빛 줄과 빨강 의자로 만들어진
그네 타고
그 만찬장으로 매일 간다.”
어찌 보면 조금은 어설픈 듯한 표현이지만, 가만히 음미해 보면 많은 의미를 전달해 주는 시구이다. 그는 장애인이다. 그와 그가 돌보는 많은 장애인들은 ‘빨강 그네’를 타고 싶어한다. 그 그네를 타고 꿈과 희망을 차려놓은 만찬장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우리들은 그들을 위하여 만찬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시 100여 편을 분석해 보니, 제일 많은 것이 ‘인생과 삶’에 관한 것(18편)이었다. 그 다음이 ‘꽃’(12편), 다음은 ‘수덕사’ 등 사찰이나 ‘북한산’ 등의 기행시(11편), 그리고 네 번째에 해당하는 시편들은 ‘세월’과 ‘장애’(각 8편), 여섯 번째가 ‘그리움’, 비(물), 길(각 7편), 아홉 번째가 ‘사랑’(7편), 열 번째가 ‘희망’(5편)이었다.
이는 결국 그의 뇌리에는 인생이나 삶에 대한 문제들이 가장 많이 떠올랐던 문제였다는 실증일 것이며, 많은 시인들이 즐겨 읊는 사랑과 희망 등이 비교적 하위권에 멈춰 있다는 점은, 그만큼 삶의 무게가 무거워서 상대적으로 낭만적인 쪽과는 약간 거리를 두면서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여 매우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지친 오늘이 숨 쉬고 있지만
내일은 붉은 태양이 떠올라
많은 희망을 만들어 주겠지”(‘희망’에서)
그 열 가지 테마 중 중간쯤에 들어있는 것이 세월과 장애였다는 점도 의미심장한 결과라고 하겠다. 그는 ‘절름발이’가 싫다. 그래서 그 말은 줄인다. “나의 삶 절름발 길 그래도 간다.”(‘삶의 진리’) 그 길 밖에서는 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울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악문다. “내 마음 속에서 내리는 마음의 비는 먼 훗날 마음속에 새싹이 돋는 비다”(‘무제’)라고 하면서. 그에게서는 이처럼 모든 고난도 밝음으로 환치된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그는 오히려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굳센 의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노래한다.
“몰라도 살아가는 우리 인생길”(‘밀물’)에서 “말 한 마디 못한 멍든 가슴”(‘내 사랑에게’)으로 살아가도 “꽃향기 아낌없이 다 뿌려놓고”(‘목련꽃 연정’) “그 속에서 행복이 영글어간다”(‘생과 자전’)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인고를 겪어야 했다.
“아픈 가슴 깊이깊이 파고드는 푸른 꽃”(‘푸른 꽃’)이라든가,
“창공을 날으는 새도 상처가 없는 새가
하나도 없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살면서 상처 없고
슬픈 고통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무제’에서)
라는 자조적인 독백과 함께,
“아프게 파인 상처 하도나 많은 사연
몇십 년을 털어내고 내다 버렸는데도
아픈 상처 아직도 못다 아물고
남은 사연들도 못다 지우고
조용히 되씹으며 삼키는 눈물”(‘아픈 상처 그 사연’에서)
이라고 피맺힌 절규도 하여 본다.
그러나 그는 자칫 자학으로 빠질 수도 있는 자신을 붙들어 세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정의 시간에도 가끔씩은 깨어있어야 한다.
“창 밖의 어둠 속에 별빛이 졸고 있다
이제 조용히 찾아드는 여명은
새 아침에 새 희망을 꽃피우겠지“(‘자정’에서)
꽃은 피어야 한다. 그는 지는 꽃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꽃 지는 그날은 오지 말아라.”(‘꽃망울 봄꽃’)라고 노래한다. 그러면서 부단히 자신을 변화시키려 노력한다.
“어제는 변했고
오늘도 또 변하고 있으며
내일은 더 많이 변하는 것이며
모레는 더욱더 많이 변하리라“ (‘수덕사’에서)
라며 변하고자, 변하고자, 변하고자 노력을 한다.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얼굴도, 마음도, 걸음걸이도
심지어 웃는 모습부터 몸짓 하나하나
모두가 변했지요“ (‘용문산에서’에서)
그러나 변하는 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중심을 잡았기에 그는 우뚝 설 수가 있었다.
“산다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모두 같은 것 하나다“ (‘덕웅산’에서)
그러한 노력이 그를 죽실(竹實)만 먹는 봉황(鳳凰)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는 다짐한다.
“미워하지 말자
싫어하지 말자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하며 살아갈까
자신, 자신만 더욱 괴로워질 뿐이다“ (‘참회’에서)
그는 그래서 연을 날린다.
“연아 날아라 저 먼 곳으로 저 높은 곳으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하염없이 날아라
나는 비록 가지 못하고 잔디 위에서 다리를 뻗고 있지만
나의 꿈을 향해 멀리멀리 날아서
내 마음속에 있는 한 많은 사연 전해다오“ (‘노병’에서)
그는 연을 날리면서 한 많은 사연을 함께 날려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 ‘한 많은 사연’이란 주로 ‘장애’와 관련된 것일 터이다. 그는 ‘장애’를 ‘장애’로 남겨두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픔을 참고
불편하고 힘겨워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랑스런 노래’에서)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세상을 갈구한다. 그가 바라는 세상이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날!”(‘초극장애 자유인의 노래’)이다. 그때 그는 “우리 모두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세나”(‘초극장애 자유인의 노래’)라고 목청을 높인다.
그가 바라는 것은 사회에서 사랑이 장애를 감싸 안는 것이다.
“사랑이 장애를 감싸 안을 때
장애는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다“ (‘장애가 사랑으로 태어나는 방법’에서)
그는 절실하게 읊는다. 사랑이 가득한 사회가 도래하기를 목 놓아 노래한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단어
장애라는 어두운 단어
우리 모두의 관심과 배려로
두 단어를 하나로 묶을 때
더불어 함께하는 우리나라
사랑이 가득한 우리 사회“ (‘사랑이 가득한 우리 사회’에서)
그런 사회가 빨리 왔으면 싶다. 최봉실 씨는 그러한 사회가 도래하면 장애인들도 자유인이 되는 것이라고 기뻐한다.
“신체의 장애를 A로 극복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포옹하고 배려하며
생각의 장애를 B로 이겨냈을 때
세상은 그들을 자유인이라 부른다“ (‘장애극복 자유인’에서)
그런 세상이 오면 세상은 온통 아름답기만 할 것이라면서, 그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바로 ‘욕심’ 때문이라고 정곡을 찌르기도 한다. “하늘을 바라보고 허공을 쳐다보고/ 저 수평선 끝을 이고 땅을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온통 세상이 아름답기만 하다”(‘아름다움’)면서 두 글자만 버리면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그 두 글자는 바로 ‘욕심’, ‘나의 욕심’이라는 것이다. 그 ‘욕심’만 버리면 이제 세상은 하얀 눈으로 덮인 깨끗한 세상으로 다가올 수가 있는 것이다.
“바람 타고 흰눈깨비가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더니
어느새 저 하늘 끝에는 펑펑 흩날리며
어둡고 캄캄한 곳을 희고 하얗게 만들려나 보다“ (‘12월 어느날’에서)
최봉실 씨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 날은 무엇에 비유될 수 있을까? 그는 절묘하게 그런 세상을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그런 세상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건 바로 ‘굴비와 같은 인정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다.
“노을이 질 무렵이면
혼자라고 느끼는
그 감정의 맛은
소금으로 간을 절인
굴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 한 살이’에서)
굴비와 같은 인정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허공에 매달아만 놓아도 밥 한 그릇쯤은 뚝딱 해치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굴비와 같은 인정의 세상이 정말로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한밤중 새벽 세 시 온 천지 감싸 안은 대지 위에
이명증 증세 같은 천국의 전화 어둠 속에
투명한 노랫소리 고요해“ (‘어둠 속의 투명송’에서)
그런 세상에서는 천국의 전화 소리도 들려옴 직하다.
이제 최봉실 씨가 대나무를 읊은 시편을 찾아보자.
“대나무 댓잎들이 활짝
손 벌리고 받쳐든 햇살
간밤에 함박눈 댓잎에 쌓여
고개 숙여 말 못하고 눈물짓는구나
덮인 눈 털어내니 활짝 웃었다“ (‘함박눈 덮인 잎’에서)
봉황새는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고 했다. 우리의 최봉실 씨는 함박눈 덮인 잎이 그 덮인 눈 털어내니 활짝 웃는다고 했다. 모진 추위 이겨내고 아마도 이제는 그 대나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나 보다. 이제는 대나무 열매를 먹을 때가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덧붙이는 말은, 최봉실 씨는 가족에 대한 시편은 별로 쓰질 않았는데(‘형님’과 ‘형제’늘 노래한 것 말고는), 아, 힘겹게 찾아낸 글, ‘일편단심(당시에게 바치는 노래)’의 일절을 놓칠 수가 없다.
“당신이 있기에 행복을 알았고
지금도 당신이 있기에 행복합니다“
책 말미에는 수필 몇 편도 덧붙였다. 기실 그의 삶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문학적 형상화로 알기 어려운 시보다는 있었던 대로의 기록일 수도 있는 수필 쪽에서 더욱 적나라한 면모를 대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어린 시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늦깎이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꿈과 희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려운 학업에 정진하였던 그분(최봉실 씨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의 모습을 잊지 못하는 최봉실 씨, 그에게는 그 힘들던 시절의 미아리고개가 잊혀지지 않는다.
미아리고개로 넘어가는 중간에는 점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오직 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속고쟁이에 작은 주머니 하나 달아서 꼬질꼬질한 종이돈, 천 원짜리 종이돈으로 점값(복채)을 내던 우리의 누님이며 어머니들이 점 보러 다니던 곳, 미아리 고개의 추억은 최봉실 씨에게는 힘들고 고달팠던 과거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항상 꿈과 희망을 놓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기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음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한 많은 사연을 간직한 미아리고개와 더불어 수많은 슬픔과 희망과 눈물로 얼룩진 무학재(일명 무악재)의 고갯길은 그를 도전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 주었다. 극한상황에 처한 고난 속에서는 아주 작은 남의 도움이라도 엄청난 힘이 된다는 것을 깨우치고, 삶이란 도중에서 쓸데없이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만들어준 무학재고개는 그에게는 매우 소중한 고개이다. 그 두 고갯길이 인간 최봉실, 오늘날의 최봉실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아련한 그리움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옛정이 맴돌고 있는 학교 가는 길은 그에게 오늘도 정겨운 길로 남아 있다. 가는 길이 멀고 험해서 가기 싫어하기도 했던 외갓집, 새끼 배 고프지, 우리 새끼 춥지, 하시며 반겨주시던 할머니의 사랑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것들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50 넘어 60세를 바라보면서 기나긴 인생 여정 정리하여 보면서, 지난 날 삶 자체가 비록 어렵고 힘든 행보였지만, 어떻게 보면 다른 이들이 걸었던 길들에 비해 그리 불만족스럽지 않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한다는 그 삶에의 긍정적 태도, 그리고 가족이 있어서 행복했고, 부모님께 늘 감사한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 스스로가 말하고 있지 않는가? 10년 후, 20년, 50년 후에도 봉사를 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고. 그에게 영원하게 변하지 않는 꿈, 그것은 죽는 날까지 봉사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최봉실 씨는 법정 스님의 말처럼 ‘버리고 떠나기’에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어렸을 적에 처음으로 찾아갔던 고모님댁, 부모님께서 전하라는 말을 전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그 7계단 앞에서 지냈던 그는 고모님께서 마련해주신 선산을 생각하고, “이제 나도 언젠가는 고모님이 만들어주신 그곳 무령리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여유로움도 생겼으니 말이다. 그가 뒤늦게 고모님에게 드리는 감사의 말씀을 들으면 최봉실 씨의 삶이 얼마나 무르익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을 만하다는 생각이다.
최봉실 씨, 앞으로 남은 삶은 부디 ‘봉사하는 삶 속에서 스스로 채워지는 삶’, ‘비움 속의 가득찬 삶’을 이루시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2011.5. . 이 웅 재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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