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실 이사장의 ‘응지에서도 피는 꽃’을 읽고
이 웅 재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매서운 칼바람에 전기 사용량이 번번이 최고치를 갈아치웠고 한 동안 보기 어려웠던 내복이 불티나게 팔렸다는 소식이다.
복수초(福壽草)는 우리나라 전국 각지의 산에서 한겨울에 얼음을 뚫고 나와 봄을 부르는 야생화(野生花)이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놀랍게 그를 꿋꿋이 이겨내고 샛노란 꽃을 피우는 복수초, 복(福)과 수(壽)는 그렇게 힘들게 얻어지는 것인 모양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 꽃이 황금색 잔처럼 생겼다고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도 부르고, 설날에 핀다고 원일초(元日草),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고 설연화(雪蓮花),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동그랗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눈색이꽃, 얼음새꽃이라도 부른다. 강원도 횡성에서는 눈꽃송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위키백과에는 친절하게도 박경리의 『토지』의 배경으로 나오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근처 동매리의 산자락에서 2003년부터 혼자 살고 있는 박남준 시인의 시 한 구절까지도 소개해 주고 있었다.
노란 꽃 복수초를 보았다/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처절하다는 생각이 순간 떠오르는 것이지/ 복이 들어온다는데 그토록 눈부신 빛이 처절했다니/ 이면, 그래 눈부신 것 속에는 눈물겨움이 있지/ 그건 팽팽한 긴장이야/ 마른 풀잎들 사이 몸을 사린 채 어린 쑥들이 삐죽거렸다 …
(박남준, 「무서운 추억」,『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2000)
아마도 최봉실 이사장은 이 책에서도 보아 알 수 있듯이 온갖 고난과 역경, 시련을 겪어온 사람이다. 꼭 복수초를 닮았다. 아니, 아니다. 복수초보다도 한 수 위다. 이름마저 ‘봉실(鳳實)’이 아니던가? 예로부터 봉황새는 오동나무 가지에만 깃들이고, 대나무 열매[竹實]만 먹는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대나무 꽃을 본 곳은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새미골에서 다완(茶碗, 차사발, tea bowl)을 빚고 있는 여도장(女陶匠) 장금정(張今貞) 씨 댁에서 점심을 대접받으면서였다. 대나무 꽃은 최소 60년부터 길게는 120년 만에야 한 번 꽃을 피운다고 한다. 최봉실 씨의 ‘實’은 바로 그러한 대나무 꽃에서 열리는 열매가 아닌가 싶다.
‘봉황과 죽실’은 고귀한 것이다. 그것은 아무나 얻을 수 있고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최봉실 이사장의 그 ‘봉’과 ‘실’은 어려운 고난과 시련 끝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이라서 더욱이 값진 것이다.
이 책 『응지에서도 피는 꽃』을 보면 그러한 사연을 소상하게 알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시작에서 시작을 위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라고 시작되는 2003년 3월 10일부터 2012년 5월까지의 그의 최근 10년의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힘든 세월을 이겨내고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를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삶을 살아왔는지를 눈시울을 붉히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실감 있게 서술해 주고 있다.
그는 말한다.
“무엇보다 힘이 들었던 일은 이 세상에서 제일 신뢰하고 나를 따르던 나의 가족과, 일가친척들에게 기쁜 이야기, 조금은 아쉽지만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이야기만 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힘들게 지난 10년의 이야기를 가슴 속 저 밑바닥에 응어리졌던 얘기들을 어렵게 어렵게 끄집어내고 있다. 2003.3.10.까지 5번에 걸친 10일과의 악연(惡緣)은 그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정말로 삶을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자살을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고. 그런데 그는 인내하면서 살아온 결과,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포기’하고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다섯 가지를 성취해 내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그 첫 번째로, 나는 다리가 다친 것을 계기로 내가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의 이사장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요,
둘째로는, 그 인연으로 전 영부인이신 이희호 여사님과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영광을 가지게 된 것,
셋째, 국가로부터 약 30개 정도의 상장 등을 받은 것을 위시해서 오바마 대통령에게서 인권상, 봉사상을 받은 것에다가,
넷째, 『행복한 동행』이란 제목의 시집과, 『고민이 없어 고민인 사람』이란 제목의 책, 그리고 『무궁화』라는 음반을 발표하게 된 것과 선산을 정비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다섯째, 10년 동안의 학교생활이다.
순수한 피해액만 10억 정도였다는 1996. 6. 10. 도봉동 화계쇼핑에 불이 났던 일, 2003년 3월 10일의 부도…, 우리들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일 것이다. 그것도 1981.6.10.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다쳐서 장애 4급의 몸으로 말이다. 게다가 2003년의 부도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인하여 당하게 되었던 일이요, 그러한 엄청난 일을 당하자 또한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배신을 하는 현실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남았을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내공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인내하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용서하고, 그리고 봉사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동생을 용서하고, 처남을 용서하고, 매제를 용서하고, 장모를 용서하고, 그리고 또 형님을 용서하고 아내를 용서하고…. 왼쪽 뺨을 얻어맞고 용서하고, 오른쪽 뺨을 얻어맞고 용서하고…. 1억에 대한 하루 이자는 100만 원, 10일이면 1000만 원이 되는 그 높은 이자를 감당하면서도 그렇게 대하였던 사람을 용서했던 최봉실 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스스로 “작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그에게는 진정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들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큰 행복은 커다란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찾아올 수가 없는 법이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까닭이다. 마음을 비워야 ‘아, 널찍해서 좋구나.’ 하면서 큰 행복, 큰 사랑이 찾아들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늘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 그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수보(酬報)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는 고종 사촌동생 김종성에게도 ‘고맙고도 또 고맙다.’고 한다. “형님, 선산으로 쓰시지요.” 하고 흔쾌히 승낙한 그가 너무나도 고마운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지갯빛 줄과/ 빨강의자로 만들어진 그네타고/ 행복한 동행을 하여/ 그 만찬장으로 매일 간다.”(「행복한 동행」에서)고 읊었다.
‘무령리 고모네 다섯 계단’이란 그의 시집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보면, 그는 그 고모 집에 아침 10시에 도착하여 저녁 10시까지 고모네 집 다섯 계단을 올라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배고픔을 참으면서 들어가지 못하던 어린 시절을 겪었었다. 그런데 그 사촌동생이 무령리 저수지 위쪽의 밭이었던 땅을 선뜻 선산으로 사용하라고 내 주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것은 특정한 개인에 대한 감사함이다. 최봉실 씨는 그 어느 한 사람에게 또는 몇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는 선산을 만들어 놓은 다음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몇 대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디에 또 있을까? 행복하고 아름다운 내 인생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우리 부모님께서 나를 너무 사랑했기에 저승에서도 도와주는 음덕(蔭德)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모든 분들, 특히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는 많은 분들이 함께 도와주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모든 분들, 특히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는 많은 분들이 함께 도와주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 감사의 마음이 이웃에게로, 사회에게로, 국가에게로, 아니, 전 세계로 무한정하게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이 확산될수록 그의 세계는 넓어져 간다. 그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봄이 오면 꽃샘추위도 함께 찾아온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들 있다. 봄은 꽃샘추위를 잘 극복하여 참고 인내해 나가면서 내공을 쌓아야 하는 시기이다. 한번 다가왔다가는 다시 한번 뒤로 물러서고 그리고 나서야 막판에 화사하게 꽃천지를 이루는 것이 봄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하루가 25시간 또는 28시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업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고 봉사도 열심히 하였다.”고 실토한다. 삶이란 이렇게 ‘인내하면서 노력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는 체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는 많은 분들이 함께 도와주고 있었기에’ 지금의 삶이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택한 사랑의 봉사는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으로 시작이 되었다.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이 왜 필요할까? 처음엔 얼핏 의아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애인유권자의 실상을 알고 나면, 정말로 꼭 필요한 봉사단체라는 점을 절감(切感)하게 된다.
1988년경에는 우리나라의 총 투표소가 3천800개소 정도였는데, 그 중의 약 30%인 1천 200개 정도가 지하 또는 2층, 3층에 있어서, 장애인들은 투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환경과 여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이 결성되고 그 단체에서 선거관리위원회 측에 항의 개선을 위한 방문이라든가 토론회 등을 벌이는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한 결과 지금은 약 3%정도인 150개소 정도만이 지하나 2층의 투표소로 남아 있다고 한다. 대단한 성과이지 않은가? 그 150개소마저 빨리 개선되어야 하겠다.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의 분발을 바란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대인관계에서 특히 신용과 약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상대편에게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신용과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는 100번 약속하면 100번 다 지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화도 약속과 마찬가지로 중시하여 100번 전화가 오면 100번을 다 받는다고 했다. 만약에 받지 못할 경우에는 3시간이 지나기 전까지에는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반드시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어준다고 했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처럼 철저하게 약속을 지키고 전화를 중시한 결과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점은 그에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에서는 매년 장애인과 함께하는 문예글짓기 대회를 개최한다. 벌써 9회를 마쳤다.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응모했던 글들 중 수상작만 모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사랑의 등대』라는 이름의 단행본을 발간하고 있다. 그 책을 보면, 장애인으로서 겪게 되는 힘들고 서글픈 이야기, 장애인을 소중하게 대해주고 있는 애정이 철철 넘쳐나는 이야기 등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겪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대할 수가 있다. 그 속에 씌어 있는 한 줄, 한 마디가 때로는 무척이나 서글프고 때로는 너무나도 감동적이다.
그러한 사연들을 대하면서 최봉실 이사장은 “한 시간이라도 더 많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열심히” 봉사해야겠다고 생각하곤 했다고 한다. 그 자신이 장애 4급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는 지금까지 3천여 시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을 봉사해 오고서도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봉사의 길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봉사를 하려면 거기에 소용되는 비용도 적지 않아서 중앙회 입장애서 지회 운영하기가 참으로 버겁고 힘이 든다고 하소하면서도 그는 봉사의 길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2006년부터 중증장애인 자립생활 센터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중증 장애인 가족들과 함께 인쇄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증장애인 한 사람이 자활을 할 수 있게 되면, 그를 돌보아주던 주변의 인물 여러 사람에게도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모 경찰서 서장님 딸의 이야기를 구체적 사례로 들기도 하였다. 중증장애인인 딸이 오전 9시에 출근하여 오후 6시에 퇴근을 하며, 100만 원의 월급에 식사까지 제공받고 지낼 수 있게 되면서 그 가정에는 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딸이 출근한 후 그 어머니는 북한산에 가서 운동도 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봉사활동도 하는 등 하루하루를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중증장애인 자립생활 센터 운영의 효과인 것이다.
2003년 3월 10일의 사건 이후에 나는 자살마저도 생각했던 최봉실 씨, 그는 그때 문득 깨달았다고 했다. 자신은 일단 죽었다고 생각하고, 죽었던 자신이 다시 살아났다는 마음으로 살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를 하자, 그렇게 다짐을 하였다고 했다. 그런 생각으로 그는 자랑스러운 한국장애인상위원회도 만들었다. 전 영부인 이희호 여사님을 명예회장으로, 그리고 회장님으로는 전 대한적십자사 서영훈 총재님을 모시고서 설립된 ‘자랑스러운 한국장애인상위원회’에서는 중증장애인 1급․2급․3급에 해당되는 사람들 중, 우리 사회에 모범이 되는 분들을 선별하여 상을 준다고 한다. 진흙탕 속에 뿌리를 내리고서도 그 모든 시련과 고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더할 수 없이 순수하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한 송이 연꽃과 같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분들을 기려주는 ‘자랑스러운 한국장애인상’, 정말로 자랑스럽다.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 ‘무궁화미술대전’도 만들었다. 그는 스스로 처음엔 무궁화의 ‘무’라는 글자도 잘 모르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던 그가 ‘무궁화미술대전’을 만들게 된 데에는 남궁억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단다. 나라를 위하여 애쓰시던 그분이 왜경에 붙잡히어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타계하신 그분이 우리나라 무궁화 지키기에 전심전력하신 분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생각해 보니, 무궁화만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국가가 있었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 거기에 생각이 멈추자, 그는 ‘무궁화미술대전’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 ‘무궁화미술대전’이 개최될 수 있기까지의 어려움도 그에게는 또 하나의 강인한 의지를 담금질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특히 여성부의 처사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러한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한 대한민국무궁화미술대전도 이제는 2회를 무사히 마친 상태이다. 그에게 무궁화 사랑은 곧 나라사랑으로 환치될 수 있는 일, 앞으로도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해 본다.
그는 또 “사랑의 집”에서 구두미화 강의도 시작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구두닦이 길라잡이’ 교재도 만들었다.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의 직업으로서는 한 곳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직업이 여러 모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는 것이다. 교재를 만드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문적 용어인 생소한 단어들과 수없이 씨름을 하기도 하고, 몇십 년 동안 그 업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직접 만나 자문을 하기도 하는 등 온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 책에는 구두를 닦는 내용뿐만이 아니라, 구두를 수선하는 방법, 예컨대 밑창, 구두 뒷굽과 앞굽은 어떻게 수선해야 하고, 또 가방을 수선하는 요령, 손님에게 서비스하는 요령까지도 세밀하게 알려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평생교육원에서 그것을 강의하고, 전 과정을 이수한 사람에게는 수료증과 자격증도 주어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장애인들을 위하여 봉사를 한다. 그 자신이 장애인이면서도 말이다. 그는 ‘장애인’의 한자를 ‘障碍人’이라기보다 ‘長愛人’이라고 써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이란 길게 사랑을 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요, 또한 장애인은 다른 사람을 길게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어려서부터 온갖 고생을 이겨내고 자수성가의 길을 찾다보니 그는 “생의 가장 소중한 청소년기에 배움의 길을 접어야만 했었다는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44살이나 되어 만학길에 오른다. 배움의 길 10년 동안의 긴 여행은 힘들기도 했지만, 그대로 기쁨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중소기업중앙회 공산품협동조합중앙회장과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 이사장, 자랑스러운 한국장애인상위원회 이사장, 목포 남농문화원 이사, 호남경제인회 사무총장 등 9군데의 이사장과 회장직을 수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지만, 그런 속에서도 그의 향학열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이 53세에야 대학을 졸업하고, 교정에서 사각모를 쓰고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그는 거기서 멈추지를 않았다. 대학원 진학까지 한 것이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그 학과는 조치원에만 있었다. 서울에서 조치원까지 통학을 하려면 왕복 4시간이 들어야 한다. 그는 그 시간이 아깝기도 했지만, 배움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서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왕복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자신에게 도움을 받고 있던 한국장애인국제예술단 단장인 배은주 씨가 자기도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하여 그분에게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고, 조치원까지의 왕복 4시간도 본격적인 노래 연습을 하였던 결과, 취입을 하여 CD까지 만들었다. 필자도 그 CD를 한 장 기증받아서 ‘멈춰버린 시계’와 ‘무궁화’라는 노래를 가끔 듣고 있는데, 노래 실력도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그는 그 노래마저도 봉사의 한 축으로 여기고 있었다. “노래는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어 주는 도구”라면서 양로원과 노인병원엘 다니면서 힘들고 고통 속에서 지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다. 앞으로 그의 공부는 박사학위를 따는 데까지로 이어질 것이다. 고난과 시련, 그리고 바쁘기 그지없는 시간을 쪼개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최봉실 이사장의 건투를 빈다.
그렇게 힘들게 대학원까지 나오게 되었으면서도, 그 사이사이로 그는 또한 잊지 못할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중의 하나가 3번의 북한방문이었다. 북한에서는 가장 크고 호화롭다는 평양의 양각도호텔(羊角島國際 Hotel) 생활도 해 보았고, 옥류관 냉면도 맛보았고, 개성의 고려 왕건릉도 돌아보았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자신에게는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북한 사람들도 우리 민족이고 우리 동포라면서, 독재와 가난 속에서 허덕이는 북한 주민도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빨리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그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었다.
그는 국가는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국민이 곤란한 일 또는 봉변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되면 국가가 나를 꼭 구하여 준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야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고, 국가에 봉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북한 주민도 우리의 국민이다. 그러니 국가는 그들도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시대는 지구촌 사회이니만큼 이제는 최소한 우리나라, 우리민족끼리는 한 가족처럼 서로 돕고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한 가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정치는 왜 이처럼 편가르기만 심화되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느냐고 일갈(一喝)이다.
그는 또한 마음속에 있는 철철 넘치는 사랑,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도록 격렬한 사랑을 해 보았기에 행복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시집의 표제는 『행복한 동행』이 되었다. 물론 『행복한 동행』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 속에는 자신의 온 영혼과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그리고 용기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한 동행’이란, 번민과 고뇌, 고통과 시련에도 해당하는 말이며, 슬픔과 기쁨도 함께 하고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 시집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녹아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에게 작년 2012년은 진정 잊히지 않는 한 해가 될 것이다. 그의 행복한 동행에 또 다른 기쁨이 보태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표창과 상을 받았다. 약 30개국 대사님들에게도 감사패, 공로패, 표창장을 받았다. 게다가 2012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골드 표창장까지 받은 것이다. 이런 일들도 모두가 그에게는 잊히지 않는 ‘행복한 동행’이겠다.
그에게는 ‘행복한 동행’이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2013년부터는 다솜평생교육원도 더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데다가, 순천에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무궁화미술관을 건립할 예정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나라 장애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이르렀고, 여기에다가 고령화시대로 접어들면서 급격히 불어나고 있는 노쇠 장애인 등으로 인하여, 이제는 국민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시대가 되었다고 하겠다.
최봉실 씨,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매사에 감사한다고 했다. 특히 절망과 좌절에 직면해 있을 때, 그 인생행로의 고비고비에서 용기를 내라, 좌절하지 말고 굳건하게 일어서라며 도움을 주고 응원을 해준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했다.
이제는 어지간한 시련들은 즐기며 이겨내는 슬기마저 터득하게 되었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 심지어는 등산이나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야생초나 야생화 그리고 수목의 그늘마저도 새로운 위안과 희망으로 나를 승화시켜 준다.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무심코 또는 무심상(無尋常)하게 지나쳐버리게 되지를 않는다.
이제 그에게는 진정한 삶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최봉실 이사장의 칼럼을 읽고
최봉실 이사장의 칼럼을 보았다. 칼럼의 작성자는 장애인 뉴스 발행인 최봉실로 되어 있었다. 그는 그 칼럼에서 실로 다양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도마에 올려놓고 칼질을 했다. 그런데 그 칼질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보통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보고 듣고 맞닥뜨리는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시작을 하되, 슬그머니 그 칼럼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틈에 사건의 본질적인 핵심부에 들어가 있음을 깨닫곤 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 방심하고 있다가는 어느 순간엔가 죽비(竹篦)를 맞게 될 것이다.
가끔 우리는 어딘가 가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심하면 병원엘 가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가려운 곳을 긁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려움증은 내 손이 가 닿지 않는 등어리 같은 곳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때에는 참으로 난감하다. 왼손 오른손을 교대로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가면서 긁어보려고 해도 그 가려운 곳에까지는 손끝이 가 닿지를 않는 것이다. 답답하다. 아니 짜증이 난다. 누군가 가족의 한 사람이 옆에 있어서 긁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공교롭게 아무도 없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효자손’이다.
세상살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등의 모든 부문에서 잘못 되어가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최봉실 칼럼에서는 바로 그러한 부분들을 콕콕 끄집어내어서 시원스럽게 긁어준다. 최봉실 씨는 그렇게 우리에게 효자손 노릇을 해 준다. 답답한 마음을, 가려운 부위를 용케도 찾아내어 긁어주는 것이다.
때로는 그의 문제 제기와 문제 해결의 방식이 전문적인 분석, 비평이 못 된다는 흠을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늘 대하는 비전문가로서의 장애인들의 일상에서 우러나오는 염려나 바람을 바로 그들의 시각, 장애인들의 관점에서 소박하게 문제 제기를 하고 아울러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코 그 자신이 비전문가로서의 견식을 지닌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그는 장애인들의 소박한 바람을 장애인들의 시각에서 소박하게 대변하고자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때로는 그의 문제 제기가 성급한 느낌을 주는 경우도 없지 않다.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남보다 먼저 느끼는 선각(先覺)의 센스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미리 대비시킬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다 지나간 다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버스 떠난 다음에 손 들고 스톱(Stop)! 스톱(Stop)! 아무리 외쳐보아야 그것은 말짱 헛수고일 뿐이 아니던가?
그의 문제 제기는 그처럼 발 빠르되, 그의 상황 설명은 자상하고 안정적이다. 그래서 지적장애인의 경우에도 쉽게 이해할 수가 있도록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문제 해결 방식에서는 엄격하다. 언제나 정의를 앞세운다. 옳은 일이라 생각하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는 날카로운 서슬이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사람들의 ‘합심’과 ‘협동’을 중시한다. 그래서 그의 칼럼에는 ‘한마음 한뜻으로’라든가 ‘힘을 합쳐’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한 사람보다는 많은 사람을 위하는 마음, 한 사람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여 일을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생각이 모든 글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을 보고 플라톤은 ‘대중은 우매하다.’고 했는데, 이 생각은 최근까지도 유효했다. 미국의 유명한 평론가 H.L 멘켄은 말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보통사람들의 상식은 거의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요커』의 논설위원 제임스 서로위키는 근저(近著) 『대중의 지혜』에서 멘켄의 말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 일례를 보자.
1884년 런던 국제박람회장 한 켠에서 도살돼 손질된 소의 무게 맞추기 내기가 벌어졌다. 영국의 통계학자 프랜시스 골튼이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했다. 소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8백 명이 참가한 이 내기가 끝난 후 골튼은 모든 참가자가 써낸 추정치의 평균값을 구한 결과 1천1백97파운드였다. 실제 소의 무게를 측정한 결과 1천1백98파운드였다고 한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50115111042&Section=04)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최봉실 씨의 칼럼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의 칼럼은 그가 지적했던 사회현상들이 대부분 이제는 지나간 일들로서 당연히 그랬어야 할 것이었다는 생각들을 할 수도 있겠으나, 칼럼이 쓰여질 당시에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었음을 염두에 두고서 읽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한 가지 조금 아쉬운 점은, 문제점 적시 다음에 오는 해결 방안이 때로는 좀더 구체적인 예시가 있었으면 싶은 점이다.
제1부 ‘정부와 국민은 한배를 타고 있다’에서는 요즈음 자주 논의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을 우려하면서, “국운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므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올바른 국가관을 세워야만 하겠다”고 강조한다.
제2부 ‘정치판 소용돌이’에서는 18대 국회를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국회라 질타를 하는 한편, 요즈음에도 관심거리인 헌법 개정 문제를 제기하면서 개헌론은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여․야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엄청나게 큰 문제의 법안 처리를 상호 교환조건으로 주고받는’ 일이 있다면서, 이러한 ‘빅딜’은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단호하게 주문한다.
‘정치판 소용돌이’에서는, 요즈음 정치인들 중에는 “어찌 보면 맡겨진 일, 해야 할 일들이 무슨 일인지 잘 모르는 사람을 뽑아서 일을 맡겼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고 개탄을 하면서, “정치판이 난장판으로 소용돌이치는데 국민이 평안할 수 없고, 국민이 평안하지 못한데 국가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 정치인들은 부디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올바른 정치, 깨끗한 정치, 국리민복을 위하는 정치에 전념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제3부 ‘우리가 바라는 선거문화’에서는 특히 유권자들의 사명이 막중하므로 2012년은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을 준엄하게 심판해야 할 해”라면서 국민 유권자의 위력을 보여주자고 했다. 특히 열악한 장애인 선거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과 관련하여 “장애인 유권자의 이해도를 높이고 투표 참여의사가 자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유권자의 권리와 의무, 선거법 등을 장애인들에게 알려줄 유권자교실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우리들 모두가 경청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한다.
특히,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에서 행하는 장애인 투표 참여의 중요성에 대한 홍보라든가 장애인들의 투표참여 편의제공 활동에 대한 실상을 알리는 한편, 이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꽃을 아름답게 피우기 위해” 전 국민 유권자의 투표참여 홍보활동까지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비장애인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실상이 아닌가 싶다.
제4부 ‘대한민국, 모두가 하나되는 그날을 위해’에서는, ‘고귀한 우리땅 독도 사진 전시회와 대한민국 무궁화(나라꽃) 미술대전’을 축하하면서, “우리 민족의 기상을 드높이는 행사가 계속됨은 나라 사랑의 마음을 한결 고양시켜주는 매우 유익하고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였다. 아울러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망상을 하루바삐 떨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의적절(時宜適切)한 글과 함께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꿈을 우려하는 글을 실었다.
그런가 하면, 3대 세습체제의 북한에 대해서도 전쟁 협박으로만 일관할 것이 아니라 남북 상생의 길을 찾아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편, 우리는 북한의 그러한 경색된 사고에도 불구하고 통일의 노력은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남남갈등부터 없애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제5부 ‘동네 슈퍼는 나라 경제의 초석이다’에서 지적한 지자체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만하고 무책임한 예산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과 금융대란을 잠재우고 금융개혁을 하려면, 먼저 금감원과 금융위의 인적 정리와 충원을 통한 체질의 개선도 빼 놓을 수 없는 방안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충언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금융감독 혁신을 위한 TF팀이라면, 당연히 금융소비자를 위한 조직이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금융소비자 대표의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점도 강조하고 있었다.
대형매장과 백화점 같은 곳에서는 서민경제의 최 일선에서 활동하는 나라 경제의 초석인 슈퍼라든가 구멍가게, 재래시장 같은 곳의 파이를 빼앗아 먹으려 하지 말고, 관광객을 유치한다든가 해서 국제경쟁력을 키우는 데 전념해야 할 것이라는 점도 명쾌히 지적해 주고 있었다.
제6부에서는 주로 교육정책을 다루었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지대계이니만큼 단기적 안목으로 볼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예컨대 등록금 반값 정책 같은 것은 “교육정책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하여 보다 획기적이고도 실현성이 담보되는 교육정책을 수립하여 제시하기를 기대해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인성교육을 강조했다. 지식만으로 학생들을 바른 인격자로 육성해 나갈 수가 없음이 자명하니, 가정교육에서부터 바람직한 인성교육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성의 중요성은 그의 칼럼 곳곳마다에서 언급되고 있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인성교육의 과제’라는 12강에 해당하는 강의까지도 마련하고 있는 점은 그의 칼럼의 두드러진 점이라고 할 것이다. ‘욕심→탐욕→죄악→파멸’의 길은 무엇보다도 인성교육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모두들 경청해야 할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학교 폭력 문제에도 관심이 깊었다. 특히 특수교사의 장애학생 폭력사건을 보고 무자격교사를 배출시킨 당국에도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고 일갈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현재 “심신이 멀쩡한데도 놀고먹는 ‘무위도식자’가 전체 생산가능인구(15∼64세)의 4.5%”인 2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하면서 ‘무위도식자가 없는 사회를 건설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제7부에서는 ‘소외계층에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여주자고 한다. 과다한 등록금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보다 우수하고 위대한 인물을 길러내기가 힘들므로, 대학등록금상한제는 필요한 제도라고 하였다.
“전체인구의 10%가 넘는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계층에게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자는 주장에도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그러기 위해서 최봉실 씨 자신이 중증장애인을 비롯해서 소외계층으로 밀려나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두(신발) 미화사업 등을 찾아냈고 이를 실현시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아주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문화 시대와 해외동포 800만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참신한 정책들이 수립되기를 소망해 본다”는 말에는 그의 시야가 보다 넓게 펼쳐져 나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8부에서는 ‘바쁘면 돌아가라’고 했다. 그는 혹한과 폭염 같은 기상 이변에 대비하여야 함은 물론 산사태 예방 문제, 원자력발전소의 안전관리, 에너지 비상 대책 등의 일에까지도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 재난에 대해서는 정부적 차원에서 종합대책을 수립,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여야만 하겠으며, “특히 이러한 재난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노약자나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에 대한 철저한 대책과 함께 농ㆍ축ㆍ어업의 피해 대비책”까지도 철저하게 수립되어야만 하겠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재난 따위에는 사전예방뿐만 아니라 사후처리 지침도 미리미리 수립하여 재해에 대한 만전을 기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제9부의 ‘문예부흥’에서는 얼핏 지나쳐 버리기 쉬운 문예나 방송, 문화, 종교 문제들을 다루었다. 아리랑과 한글날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었고, 장애자유권자연맹에서 해마다 문예글짓기대회를 개최하는 것도 바로 그의 이러한 문예부흥에 대한 남다른 정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 자신이 시인으로 등단하여 『행복한 동행』이라는 시집을 상재(上梓)한 것도 그가 문예부흥에 대하여 얼마나 경도(傾倒)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는 대중교통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지하철 문제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지하철 문화는 대중교통 문화의 차원을 넘어서 국민의 생활경제와 연계되어 문화예술, 그리고 사회질서와 복지문화 인간사회의 도덕성까지도 연계되는 생활문화공간의 필수 요건으로 많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이루어내야 할 사명감이 지워져 있는 문화이다.
이 말은 그가 지하철 문화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을 대표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제10부에서는 ‘강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노자의 가르침을 따라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이 진리라고 하였다. 때로는 “험한 구비구비를 힘겹게 돌고돌아 하구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두 다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공익과 봉사의 길은 힘겹지만 거기에 뜻을 두니 “보람을 느낄 수 있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말한다.
시련을 이겨낸 행운은 더욱 보람찬 법이다. 지금 나는 만학의 어려움 속에서도 후회나 원망 같은 못난 생각은 마음속에 지니지를 않는다. 내 마음속에는 오직 보람과 자부심, 그리고 거기서 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오늘도 중단 없이 내 인생 길의 상봉을 향해 힘겨워도 마다않고 꾸준히 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가 늘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자고도 하였다. ‘허식의 물레방아’를 돌리지 말고, 참되게 살자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치매 의심증상과 그 대처 방법’ 같은 실생활에 필요한 유의사항까지도 꼼꼼히 챙겨주었다.
제11부는 ‘인성교육의 과제’로 앞부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어, 생략한다.
한 마디로 그의 삶은 정말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을 대로 겪었고, 그는 그런 힘든 세월을 이겨내고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고 하겠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바른 길을 걸어왔고,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을 위하여 봉사와 헌신으로서 살아왔다. 말은 쉽지만,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제는 그러한 그에게 밝은 햇살이 비치는 즐겁고 행복한 삶만이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
2013.2.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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