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 반대 데모에 앞장서다
이 웅 재
대학생활에서 잊히지 않는 일 중의 하나가 한일회담 반대 데모에 앞장섰다가 머리를 다쳐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던 일이다. 그런 일로 인하여 『연세대학교 80년사』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그때의 각 일간신문의 기사들을 한번 살펴보자.
1964년 3월 25일(수)자 『한국일보』 3면에서는 “學生데모隊, 警察과 激突”이라는 특호 표제에 ‘5千學生 「平和線死守」 등 외치며 거리로’라는 부제로 3월 24일의 데모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중 延世大學校와 관련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날 하오 2시 대강당에서 장(張俊河) 함(咸錫憲) 양씨의 강연을 듣던 二천여 학생들은 하오 四시께 『스크램』을 짜고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나섰다. 학생들은 책가방을 낀채 단숨에 신촌 『로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때가 하오 四시 三十분-급히 출동한 기동대원들은 하오 五시께 학생들과 돌격전을 벌였다.
기동대원들은 닥치는 대로 『데모』 대원들의 머리를 후려쳐 쓰러뜨리고 대오를 찢어놨다.…”
3월 27일(금)자 『동아일보』 3면의 “다친 知性은 말한다/ 왜 『머리』를 때리는가/ 相剋의 意思表示…『平和데모』와 『暴力警官』/ 毆打禁止 돼 있다면서/ 警察棒濫用”이라는 제하에서, “延世大생 李雄宰(22=國文科三年) 군도 오른쪽 눈위를 맞아 세 바늘이나 궤맸으며”라고 하였다.
이튿날『조선일보』 3면에서는 “왜 하필이면 머리를 때려? 警察棒에 맞은 「知性」 病床 「데모」”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연 나흘째 계속되고 있는 굴욕외교반대학생 「데모」에서 젊은 지성들은 경찰관들의 무자비한 곤봉 세례와 최루탄의 작렬 앞에 44명이 쓰러졌다고 알려졌다. 「데모」가 계속되는 한 부상자들이 늘어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눈앞에 두고 경찰관들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병상 「데모」를 계속하고 있는 3명의 머리 깨진 지성들 중 두 고학생의 병상의 외침을 들어 보았다.
延世大…李雄宰君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중인 연세대생 이웅재군은 24일의 연세대생 「데모」에 앞장섰다가 경찰관의 곤봉에 이마를 얻어맞아 피를 수없이 쏟고 의식을 잃었다. 『경찰관들은 머리만 골라서 때렸다』고 말하는 이군은 『국가의 위신을 선양하고 국민의 여론을 반영시키기 위하여 나섰던 학생들의 머리를 때린 것은 만행적인 행동이며 수도치안을 맡고있는 경찰의 질이 형편없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분개하였다. 숭인동(崇人洞) 누님댁에서 다니며 학교 내의 자조장학회의 일을 하면서 고학을 한다는 이군은 병상에 누워서도 『정부가 저자세를 취하며 한일회담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아 일본이 우리나라에 이익을 준 적은 없다. 침략과 약탈만 일삼아왔던 그들을 왜 또 불러들일 것인가』고 굴욕회담 중지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3월 30일자 『연세춘추』(주간)에서는 1면 톱기사로,
“굴욕외교에 분노한 지성
24일 유혈 데모/ 무장 경찰들의/ 무차별 제지로
시국강연 듣다 박차고 뛰쳐나와”라는 제하에 당시의 데모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이 기사에서 밝힌 당시 데모대의 구호를 보면 다음 5가지가 있다.
①매국적인 한·일 회담을 즉시 중단하라
②삼천만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라
③제2의 이완용을 즉시 소환하라
④악덕재벌 타도하고 민족자본 이룩하자
⑤4·19는 주시한다 위정자여 각성하라
제2의 이완용이란 ‘金-大平 합의’를 이끌어낸 김종필(金鍾泌) 씨를 가리킨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김종필 씨가 일본에서 귀국한 제1성이 “학생들의 데모는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말로 인하여, 이때 데모를 한 학생들은 이 데모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6·3사태 때에 데모를 하였던 학생들과는 달리 정부로부터 ‘요주의 대상’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었다. 이때의 학생 데모는 일본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청구권 금액을 늘리는 데에 일조를 하였다고 보이는 것이다. 『연세춘추』에 의하면, 이때에 입원했던 학생들에게는 내로라하는 정부 요인들이 금일봉을 들고 문병까지 오기도 했었다.
“26일 오후 정우식 시경국장과 송 서대문 경찰서장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중인 부상학생들을 위문하고 과일과 꽃다발 및 금일봉를 전달했다.
27일에는 이효상 국회의장이 28일에는 육영수 여사가 위문했다. 현재 입원 가료중인 학생은 최하용(도1), 이웅재(국3), 유현덕(화공1) 군 등 3명이다.”
이 외에도 윤치영 서울시장 등 많은 사람들이 위문을 왔었으며, 육영수 여사는 튤립 화분을 들고 와서는 ‘우리 대통령이…’ 하면서 정부의 입장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효상 국회의장의 명함은 이제까지 내가 보아왔던 중에서 가장 글자 수가 적은 명함이었다는 점이 머리에 남는다. ‘대한민국 국회 이효상’이었던 것이다. 후에 들은 바로는 그것보다도 더욱 간단한 명함이 있었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대한민국 김관식’이었다고 했다.
한편, 이때의 데모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글로 같은 날짜 『연세춘추』의 사설이 있어 그 일부를 보인다.
“…우리들 국민은 결코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하거나 거부하자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초점은 평화선이니, 청구권이니, 어로협정이니 하는 한일회담의 내용에도 석연치 못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보다는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태도에 있다고 본다. 아직도 제국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한 일부의 고자세가 아니꼬울 뿐 아니라, 그를 대하는 정부의 지나친 저자세에 크게 불만을 느껴왔고, 그러한 가운데 진행 중인 한일회담의 정부태도가 국민의 긍지로써 참을 수 없는 굴욕적인 외교자세라는 데 있는 것이다.”
(2013.10.4. 원고지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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