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이 웅 재
유난히 더웠던 금년 여름, 그래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나는 가을을 맞으러 용문사로 향했다. 느긋하게 전철을 타고 용문역에서 내려 용문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차창을 통해 몰려드는 싱그러운 가을바람을 맞으며 여름 내내 나의 온몸을 짜증스럽게 해왔던 삶의 더께를 훌훌 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의 풍경에 눈길이 멎었다. 외롭게 꽃을 피우고 있는 코스모스 한 대였다. 살랑 부는 바람에도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는 그 가냘픈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연민의 정이 새록새록 솟구쳐 오른다. 측은한 마음이 일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조금 더 가노라니, 아, 이번에는 정말로 멋진 정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한 무리의 코스모스가 함께 어우러져 피어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환희, 환희가 출렁이고 있었다. Cosmos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는 ‘질서, 조화’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무질서, 혼돈’의 Chaos로부터 벗어나서 ‘함께 살고 있는 세계’가 현현되고 있었다.
그렇다. 더러는 홀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럿이 어울려 피어 있는 모습이야말로 정말로 보기가 좋았다. 세계는 ‘함께 함’의 장(場)인 것이다. 개체란 나름대로의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게 마련이지만, 저렇게 여럿이 어우러져 있을 때에는 그 단점은 서로서로가 가려주어서 보완이 되어 장점만이 도드라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수단인 우리의 한글을 생각해 보자.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하나의 음절을 이루고, 그 음절들이 모여서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는 낱말을 이루게 된다. 자음과 모음이 따로따로 존재하여서는 의미를 형성하지 못한다. 의미 형성을 할 수 있는 단어가 되어야지만 다시 그것들이 모여서 의사 전달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솝우화에는 ‘회초리와 세 아들’ 이야기가 들어 있다. 말을 듣지 않는 세 아들에게 회초리 10개씩을 구해 오라고 하고서는 그것들을 한데 묶어서 차례로 세 아들에게 부러뜨려 보라고 하였다. 아무도 그것을 부러뜨릴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것을 한 개씩 나누어주고서 부러뜨려 보라고 하였다. 세 아들은 아주 쉽게 회초리를 부러뜨렸다. 아버지가 말했다. “너희는 한데 묶어놓은 회초리 다발을 부러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회초리 하나씩은 쉽게 부러뜨렸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 줄을 알겠느냐?”
그렇다.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한 말을 잘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로 인식하고들 있다. 그는 달러화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 2명 중의 한 명으로 알렉산더 해밀턴이 10달러화의 인물임에 비해, 100달러짜리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이미 영어 속담 중에 들어있는 말 중의 하나였다.
영어 쪽이 아닌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일찍이 정유재란 당시 13척의 배로써 왜적선 200척과 싸워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왜선과의 전투에서 부하 장병들에게 말했던 ‘단생산사(團生散死)’가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었다.
‘뭉치면 산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독불장군’이 사회 곳곳에 뿌리박고 있다.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은 모르고 지내는 것보다도 더욱 좋지 못한 일이다. ‘뭉쳐야 산다.’ 그래서 서로가 상부(相扶)하게 되고 상조(相助)하게 된다. 생각이 익어가고 있는데, 차창 밖으로 밤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주렁주렁 소담스럽게 밤송이가 달려 있다. 생각이 밤나무에게로 이동한다.
밤송이 하나를 여물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력자가 있어야 하는가? 나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물이 있어야 하고, 광합성 작용을 위해서는 햇빛도 필요하며, 꽃가루받이를 위해서는 나비나 벌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여물게 된 밤송이 하나는 얼마나 대견한가? 겉껍질은 가시투성이, 아무나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 겉껍질을 까 내면 이번에는 반질반질하고도 예쁘게 보이는 밤톨을 둘러싸고 있는 질기고 딱딱한 껍질이 드러난다. 아직은 먹을 수가 없다. 그 껍질마저 벗겨야 하는데, 그 안에는 떫은맛을 내는 속껍질 보늬가 또 있는 것이다. 밤송이 하나를 위해서 햇빛이 필요하고 물도 있어야 했으며 벌과 나비도 협력을 했는데, 이제 다시 그 속살을 보호하기 위하여 3중의 껍질이 또 제각각의 구실을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조선일보 10월 3일자 A12면 기사가 생각난다. “‘文靑(문학청년)의 요람’ 大學 문학상이 사라진다”는 제하의 기사이다. 그동안 많은 작가들을 키워온 대학 문학상이 스마트폰·영상·인터넷 세대를 맞아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일을 외면하여 응모자 수 20명을 넘기기가 어렵다 보니,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중·고교 시절에는 학생들을 위한 문예지 『학원(學園)』이 있었다. 필자도 가끔 얼굴을 내밀었던 기억이 있는 학생문예지, 1950, 60년대에 문학 지망 청소년들을 이끌어 주었던 잡지이다. 그런데 이제는 『학원(學園)』도 없고, 대학의 문학상마저 사라진다니 문학 지망생들은 기댈 곳이 없어진다. 그런가 하면 성인들의 문학작품 발표지들도 하나같이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어 내실 있는 운영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밤송이가 그 속살을 보호하기 위하여 3중의 껍질을 지니고 있듯, ‘뭉쳐야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우리 모두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우리의 문예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서로 합심하여 아름답게 어우러진 코스모스의 세계를 이루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수필문학추천작가회 동인지 권두언. 2013.10.8. 15매)
⇒ 권두언 아름다운 코스모스의 세계
이 웅 재
유난히 더웠던 금년 여름, 그래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나는 가을을 맞으러 용문사로 향했다. 느긋하게 용문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차창을 통해 몰려드는 싱그러운 가을바람을 맞으며 여름 내내 나의 온몸을 짜증스럽게 해왔던 삶의 더께를 훌훌 날려 보내고 있었다. 문득 하나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외롭게 꽃을 피우고 있는 코스모스 한 대였다. 살랑 부는 바람에도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는 그 가냘픈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연민의 정이 새록새록 솟구쳐 오른다. 마음이 아팠다.
조금 더 가노라니, 아, 이번에는 정말로 멋진 정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한 무리의 코스모스가 함께 어우러져 피어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환희, 환희가 출렁이고 있었다. Cosmos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는 ‘질서, 조화’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더러는 홀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럿이 어울려 피어 있는 모습이야말로 정말로 보기가 좋았다. 세계는 ‘함께 함’의 장(場)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솝우화에는 ‘회초리와 세 아들’ 이야기가 들어 있다. 말을 듣지 않는 세 아들에게 회초리 10개씩을 구해 오라고 하고서는 그것들을 한데 묶어서 차례로 세 아들에게 부러뜨려 보라고 하였다. 아무도 그것을 부러뜨릴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것을 한 개씩 나누어주고서 부러뜨려 보라고 하였다. 세 아들은 아주 쉽게 회초리를 부러뜨렸다. 아버지가 말했다. “너희는 한데 묶어놓은 회초리 다발을 부러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회초리 하나씩은 쉽게 부러뜨렸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 줄을 알겠느냐?”
그렇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 이전에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라고들 하지만, 이 말은 사실 이미 영어 속담 중에 들어있는 말 중의 하나요, 일찍이 이순신 장군이 왜선과의 전투에서 부하 장병들에게 말했던 ‘단생산사(團生散死)’가 바로 이 말이기도 했다.
‘뭉쳐야 산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말이다. 그래서 서로가 상부(相扶)하게 되고 상조(相助)하게 된다. 생각이 익어가고 있는데, 차창 밖으로 밤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주렁주렁 소담스럽게 밤송이가 달려 있다. 생각이 밤나무에게로 이동한다.
밤송이 하나를 여물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력자가 있어야 하는가? 물이 있어야 하고, 햇빛도 필요하며, 나비나 벌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여물게 된 밤송이 하나는 얼마나 대견한가? 겉껍질은 가시투성이, 아무나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 겉껍질을 까 내면 이번에는 반질반질하고도 예쁘게 보이는 밤톨을 둘러싸고 있는 질기고 딱딱한 껍질이 드러난다. 아직은 먹을 수가 없다. 그 껍질마저 벗겨야 하는데, 그 안에는 떫은맛을 내는 속껍질 보늬가 또 있는 것이다.
밤송이가 그 속살을 보호하기 위하여 3중의 껍질을 지니고 있듯, ‘뭉쳐야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우리 모두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우리의 문예지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서로 합심하여 아름답게 어우러진 코스모스의 세계를 이루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2013.10.10. 9매)
* 2013.10.8. 15매)→[수정본](2013.10.10. 9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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