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인물열전(2) 문장으로 이름을 빛낸 사람들
이 웅 재
1.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지었던 조운흘(趙云仡: 1332~1404)
조운흘은 본관은 풍양현(豊壤: 현 남양주), 호는 석간(石澗), 서하옹(棲霞翁) 또는 몽촌(夢村)이다. 평장사 조맹(趙孟)의 31대손으로,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담대하여 매사에 얽매이기를 싫어했으며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홍건적의 난 때에는 왕을 호종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국자감 직강(國子監直講)을 거쳐 전라, 서해, 양광의 삼도안렴사(三道按廉使)를 지내고,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있다가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칭하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우왕 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재 등용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사임하고, 광주 고원강촌(古垣江村: 현 몽촌)으로 퇴거하였다. 그곳에서 신분을 감추고 판교원(板橋院), 사평원(沙平院)을 중수하여 원주(院主)라 자칭하면서 공사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창왕 때에는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기도 하고, 그 후 계림부윤(鷄林府尹), 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시절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환란을 피하고자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며 지냈다. 서해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는 매양 아미타불을 불렀다. 하루는 관내 군현을 순시 중 배천(白川)에 당도하여 잠을 자는데, 새벽이 되자 밖에서 갑자기, "조운흘!" "조운흘!" 을 염송하는 소리가 들려와 가만히 살피니 배천 현감 박희문이었다. 조운흘이 괴이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박희문이 말하기를, "관찰사께서는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성불코저 하시니, 저는 '조운흘'을 염송하여 관찰사가 되고저 그리 했나이다." 라고 답하니 후일 이 이야기를 듣는 이 모두 웃었다 한다.
그는 또 거짓으로 “청맹(靑盲)이 되었다.”며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머물렀다. 그러자 그의 첩이 자신의 아들과 서로 놀아나며 늘 눈앞에서 수작을 하였으나, 수년 동안 모르는 척하다가 난리가 진정되고서야 눈을 부비며 자신의 눈병이 나았다며 아들과 사통한 첩을 데리고 뱃놀이를 가서 그 죄를 다스려 강에 던졌다고 한다.(용재총화 3권)
조선조에 들어와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고원강촌에 퇴거하여 살았는데, 스스로 묘지명을 지었으니,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고원성(古垣城')에서 별세하였다. 자식이 없었다. 해와 달을 구슬로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제물(祭物)로 삼았다. 옛 양주 아차산(峩嵯山) 남쪽 에 장사를 지냈다."고 했는데, 현재 묘지와 비석은 없고 묘비명만『고려사』권112 조운흘전에 남아있다.
그와 관련된 기생 홍장(紅粧)과 관련된 이야기도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고려 우왕시절이었다. 강원감사 박신(朴信)은 백성을 잘 다스려 칭송이 드높았다. 그는 강릉기생 홍장(紅粧)을 깊이 사랑하였다. 홍장은 당시 2백여 명 기생 가운데 가장 출중한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 강릉부사 조운흘이 홍장과 박신의 사이를 알고 한번 놀려주고자 꾀를 냈다. 그는 홍장이 갑자기 죽었다고 박신에게 거짓으로 알리니 박신은 몹시 서러워하였다. 박신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였다. 조운흘은 경포대 한송정(寒松亭)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석양에 경포호수에 이르니 경호(鏡湖)는 십 리나 뻗쳐 물결과 주변이 어울린 아름다움이란 비길 데가 없었다. 두 사람의 취흥이 무르익었을 때, 문득 멀리 호수를 바라보니 그림배 한 척이 스르르 미끄러져 오는데, 그 속에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신선세계의 소리처럼 심금을 울렸다. 박신은 놀라 물으니, 조부사는 이는 필시 선녀의 놀음일 것이라 하면서 우리도 가까이 가서 같이 놀아보자고 하여 호수에 배를 띄웠다. 여인이 탄 배가 가까이 왔다. 선녀처럼 보였던 여인은 분명 홍장이었다. 박신은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조부사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세 사람은 경포호수에서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떠난 박신을 두고 홍장이 노래한다.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마소.
초원(草原) 장제(長堤)에 해 다 저물었네.
객창(客窓)에 잔등(殘燈) 돋우고 세워보면 알리라.
1년 후 박신은 순찰사가 돼 강릉에 다시 들렀는데, 홍장의 굳은 절개를 보고 그녀를 한양으로 데려가 부실을 삼았다고 한다.
조선 효종 때의 신후담(愼後聃)은 이와 같은 홍장과 박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남겼다. 「홍장전」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태준(金台俊)의 『조선소설사』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2. 김상헌(金尙憲)이 3소(三蘇)에 비겼던 한지원(韓智源: 1514~1562)
한지원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요, 자는 사달(士達), 호는 청련(靑蓮)이다. 문정공 한계희(文靖公 韓繼禧)의 증손자(曾孫子)이고 삼등공 한사신(三登公 韓士信)의 손자이며 도정공 한석(都政公 韓碩)의 넷째아들이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 (坡平 尹氏)로 증 이판공 윤지준(吏判公 尹之俊)의 딸이다.
1537년(중종3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4년 별시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거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어 『중종실록』의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1548년(명종3)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고 이어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어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였다.
이어 병조정랑(兵曹正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교리,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등을 지냈다. 1553년에는 사림(士林) 최고의 영예인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다. 이때에 지은 조정암(趙靜庵) 선생의 신원상소(伸寃上疏)는 관학제유(館學諸儒)의 찬탄(讚嘆)하는 바가 되어 사림(士林)은 물론 세인(世人)들도 상찬(賞讚)하였다. 그러나 윤원형(尹元衡)등 권신(權臣)에 아부하여 탐학(貪虐)을 일삼았다는 탄핵(彈劾)을 받고 삭직(削職)되었다가 사실이 아님이 판명되어 1555년 복관(復官)이 되었다.
1557년(명종 12)에 성천부사(成川府使)가 된 뒤 박천군수(博川郡守), 인천부사(仁川府使) 등의 외직(外職)을 역임(歷任)하였다.
그는 특히 문장이 뛰어나 이두(李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며 아들 한술(韓述), 한회(韓懷)의 시문과 함께 찬한『삼체집(三體集)』이 있다.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의 「삼체집 서문(三體集 序文)」에는 그를 송나라의 문장가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의 삼소(三蘇)에 비긴다고 하는 등 당대 최고의 문학사(文學士)로 추앙받았다.
『대동야승(大東野乘)』 중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월정만필(月汀漫筆』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신기재(申企齋)가 말하기를,
“한지원(韓智源)의 「제갈채(諸葛菜)」절구는 지금의 두시(杜詩)라.”
하였다. 시는 이러하다.
팥배나무엔 이미 소공의 덕화 없어졌는데 / 甘棠已無召公化
작은 나물엔 오히려 제갈 이름 전해 오네 / 小菜猶傳諸葛名
당시에 큰 별이 떨어지지 않았던들 / 不有當年大星落
위의 동산 오의 채마밭에는 나물만이 자랐으리 / 魏園吳圃菜渾生
묘소는 분당구 율동(栗洞) 산 9-1번지에 정부인(貞夫人) 무송 윤씨(茂松尹氏)와 합조(合兆)인데 2009년 6월 25일에 성남문화유적 제9호로 지정이 되었다.
3. 이항복(李恒福)도 탄복하였던 시를 쓴 한술(韓述: 1541~1616)
한술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선(子善)이고 호는 도곡(陶谷)이다. 교리 한지원(韓智源)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힘썼으며, 특히 고시(古詩)로 이름이 높았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80년에 알성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1597년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허균(許筠) 車天輅(차천로) 등과 나란히 급제하기도 하였다.
1592년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으며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지내다가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1597년에 임진왜란 초기 서천군수(舒川郡守)로 있을 때 도망갔다 하여 의금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명나라 마제독(麻提督)의 접대에 차출되었음이 밝혀져 혐의를 벗었다.
그 후 1599년에는 해주목사가 되었으나 간관으로부터 재주가 용렬하고 치적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탄핵을 받았다. 또 같은 해 문과의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사관으로부터 그의 사람됨이 비루하고 천한 행동으로 사류(士類)에게 버림을 받았으므로 시관이 될 수 없다는 사평(史評)을 듣기도 하였으나 가유약(賈惟約)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명나라와의 외교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1600년 정주목사(定州牧使)가 되었고 이듬해 평안도 구성부사(邱城府使)가 되었다가 다시 함경도의 영흥부사(永興府使)가 되었으나, 70세 이상의 부모를 둔 수령은 한양에서 300리 밖에 임명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1602년 체직되어 내직으로 들어와 1605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에 예물로 가져간 만화방석(滿花方席)이 습기에 젖어 변색된데다가, 사리사욕을 채우는 등 여러 가지 물의를 빚어서 파직되었다. 이때 지은 「조경(朝京)」이라는 시 한 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시에는 당시 사신으로서의 사명 완수가 어려운 형편에 대한 자탄과 황궁(皇宮)의 조용한 모습 그리고 공무를 잘 끝내면 주변 경치를 구경하려던 계획 등이 허망하게 무너진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이항복(李恒福)은 그 시를 보고 탄복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동지중추부사로서 경연특진관에 선발되었으나 사간원(司諫院)으로부터 평소에 명망이 낮다 하여 제외시킬 것을 요청받아 제외되었다.
1612년부터 1614년까지에는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있으면서 상주향교의 동서무(東西廡)와 침천정(枕泉亭)을 중창하여 사림의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침천정은 상주목사 정곤수(鄭崑壽 : 1538~1602)가 세워, 향내의 부로들을 초청하여 강도(講道)와 치정(治政)의 여가에 더불어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관민이 함께 즐기는 장소로 사용된 관정(官亭)이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그가 중창한 것이다.
그는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상촌(象村) 신흠(申欽),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등 당대의 명문장가들과 친교가 두터웠다.
벼슬이 가선 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에 이르렀으며, 의정부 좌찬성,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ㆍ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ㆍ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에 증직되었다.
이순신(李舜臣)의『난중일기(亂中日記)』 1597년(정유년) 음4월 19일(양 6월 3일) 조(條)에 보면, “임천군수 한술(韓述)은 중시(重試)보러 서울로 가던 중에 앞 길 을 지나다가 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의 ‘임천군수’는 ‘서천군수’의 잘못이 아닌가 싶다. 『국조방목(國朝榜目)』을 보면, 그가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丁酉) 중시(重試) 병과(丙科) 2위 전력 서천군수”로 나오고 있어 이를 방증(傍證)하고 있다. 이때 이순신은 모친 상중이었다.
유필로 『赴京二首(부경이수) 』가 전하고 효자 旌閭(정려)가 내려졌다. 묘소는 분당구 율동(栗洞) 산 9-1번지에 부친의 묘와 함께 있다.
4.「염상유백상루설(鹽商遊百祥樓說)」을 남긴 권득기(權得己:1570~1622)
권득기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자는 중지(重之), 호는 만회(晩悔)이다. 증조부는 권홍(權弘), 조부는 종묘서령(宗廟署令) 권덕유(權德裕)이고, 친부(親父)는 예조판서 권극례(權克禮)이며 어머니는 윤천석(尹天錫)의 딸인데, 큰아버지인 선공감역(繕工監役) 권극관(權克寬)에게 입양되었고, 구성군(龜城君) 이첨(李瞻)의 사위이다.
158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좌랑 (禮曹左郞)을 배수받았다. 1618년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다.
광해군이 모후 인목대비를 서궁(西宮: 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는 등 폭정을 휘두르자 “오늘날은 큰 윤기가 끊어진 때이다. 벼슬하지 않으면 야인이 될 뿐이나 벼슬에 나아가면 하루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충청남도 태안(泰安)에 은거하며 도학(道學)을 연마하여 당시에 고절(高節)한 선비라 일컬어졌다.
평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늘 의관을 근엄하게 정좌하였으며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손들에게는 학문의 목적을 과거에 두지 말고 “오직 경(敬)으로써 마음을 맑게 하고 책을 읽어 이치를 연구할 뿐이다”라고 하며, “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의롭지 못한 일에 빠지지 말라”는 가훈을 남겼다.
죽은 뒤 공조참판에 추증되고, 대전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만회집』,『연송잡기(然松雜記)』 등이 있다.
『만회집(晩悔集)』의 「염상유백상루설(鹽商遊百祥樓說)」은 널리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글이라서 다음에 인용한다.
안주(安州) 백상루(百祥樓)는 빼어난 풍경을 지닌 관서 지방의 누각이다. 중국 사신이 오거나 우리나라 사람이 공무로 지나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누각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덕수(德水) 이자민(李子敏)이 “수많은 산들이 바다에 이르러 대지의 형세는 끝이 나고, 꽃다운 풀밭이 하늘까지 이어져 봄기운은 떠오른다.”라고 읊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어떤 상인이 소금을 싣고 가다가 이 누각을 지나게 되었다. 때는 겨울철로 아침 해가 아직 떠오르기 전이었다. 상인은 누각 아래 말을 세워 놓고 백상루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긴 강에 깔린 얼음장과 넓은 들을 뒤덮은 눈뿐이었다. 구슬픈 바람은 휙휙 몰아오고, 찬 기운은 뼈를 에일 듯 오싹해서 잠시도 머물 수 없었다. 그러자 상인은 “도대체 백상루가 아름답다고 한 게 누구야?”라고 탄식하며 서둘러 짐을 꾸려서 자리를 떴다.
저 백상루는 참으로 아름다운 누각이다. 하지만 이 상인은 알맞은 철에 놀러 오지 않았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듯이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알맞은 때가 있으며, 만약에 알맞은 때를 만나지 않는다면, 저 백상루의 경우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여우 겨드랑이 털로 만든 가죽옷[狐白裘] 은 천하의 귀한 물건이지만 무더운 5월에 그것을 펼쳐 입는다면 가난한 자의 행색이 되며, 팔진미(八珍味)가 제 아무리 맛이 좋은 음식일지라도 한여름에 더위 먹은 사람을 구하지는 못한다. 황금과 구슬, 진주와 비취는 세상 사람들이 보석이라고 일컫는 물건이지만, 돌보지 않아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방안에서 그런 황금과 옥으로 치장을 하고 앉아 있다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사짓는 집의 여인이 짧은 적삼에 베치마를 입었으면서 그 위에 구슬과 비취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면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명성과 좋은 관직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얻을 만한 때 얻는다면 좋은 것이겠지만 얻을 만한 때가 아닌 때에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전한(前漢)의 세상에서는 유협(遊俠)을 숭상하였고, 전국시대의 경춘(景春)은 장의(張儀)와 공손연(公孫衍)을 대장부로 간주하였다. 그들의 명성도 명성이라 할 수는 있지만 그때는 다름 아닌 한나라가 쇠퇴한 때요 전국시대였다. 송나라 소흥(紹興) 시절에는 금나라와 강화를 맺자는 주장에 찬동하는 자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고, 경원(慶元) 연간에는 주자(朱子)를 그릇된 학문이라고 공격하는 자들이 요직에 두루 포진해 있었다. 그런 자리가 좋은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 때는 바로 진회(秦檜)와 한탁주(韓侂胄)가 행세하던 시기였다. 저들은 자신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군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썩은 쥐보다도 못하여 병든 올빼미가 한 번 놀랄 거리도 되지 못한다.
무릇 이러한 것들이 다 겨울에 백상루를 구경한 소금장수와 다르지 않다.
분당구 금곡동 쇳골은 그가 궁내동에 살고 있던 전주 이씨 구성군(龜城君) 이첨(李瞻)의 사위가 된 연유로 처음 정착하게 된 이후 세거지가 되었다.
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산 8-21에 있다. 묘소 아래에는 그를 배향한 재실 흥모재(興慕齋)가 있다.
5.「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쓴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이경석(李景奭)은 조선 중기의 종친이며 문신으로,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또는 쌍계(雙溪)이다. 정종(定宗)의 10남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6대손으로, 조부는 이수광(李秀光)이고, 부친은 이유간(李惟侃)이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16년(광해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7년 증광 별시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 등을 지내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公州)로 몽진(蒙塵)하는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1626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정묘호란(1927년) 후 승지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도승지로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면서 인조가 항복하게 되자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등이 있다.
「삼전도비(三田渡碑:大淸皇帝功德碑)」는 청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처음,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비문을 짓게 했으나 모두 사양했다. 국왕이 다시 강권하자 세 신하가 마지못해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거칠게 지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했다. 청나라는 장유와 이경석의 글 중에서 이경석의 글을 고쳐 사용하라고 명했다.
비문을 쓴 대제학 이경석(李景奭)은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있다. 그 개략을 보인다.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元年)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께서, 우리 편에서 먼저 화의를 깨뜨린 까닭에 처음으로 진노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곧바로 동쪽으로 공격하여 오니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는 남한산성에 계셨는데, 위태롭고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 얼음을 밟고 있으면서 밝은 햇볕을 기다리듯 하였다.
거의 50일이 지나자 동남쪽 여러 지방의 군사들은 잇따라 패해 무너지고, 서북쪽의 장수들은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였으며, 성안의 양식 또한 떨어져 갔다. 이러한 때에 황제께서 대군으로 성에 육박하시기를, 마치 서릿발 같은 바람이 가을 낙엽을 휘몰아 가는 것 같고, 화로의 이글거리는 불이 기러기의 깃털을 태워 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무예의 근본으로 삼고 오직 덕을 펴는 것을 앞세우셨다. 그리하여 곧 칙유(勅諭)를 내리어, “항복하여 내게로 오면 짐(朕)은 너희를 모두 온전하게 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도륙(屠戮)할 것이다.” 하셨다.…
마침내 임금께서는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군전(軍前)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는데, 황제께서는 이에 예로써 극진히 대우하고 은혜로써 가까이 하여, 한번 보고 심복(心腹)으로 허락하였으며, 물품을 하사하시는 은택이 따라온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황제께서는 곧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자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를 불러들여 서쪽으로 물러나게 하였으며, 백성들을 무마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 새떼처럼 흩어졌던 사람들을 모두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커다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께서 이미 대병(大兵)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다시 한 무리의 군대에게 명하여 먼저 강화도를 함락시켜 궁빈(宮嬪), 왕자 및 여러 신하의 가족들까지 무두 포로로 붙잡았는데, 황제께서는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떨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고, 시종하는 관리와 내시들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셨다.
또 크게 은전을 내리어 소방의 군신과 포로 된 권속들을 모두 옛집으로 돌려보내시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따뜻한 봄 햇볕이 되고, 가뭄이 단비가 된 듯, 나라가 거의 망했다가 다시 살아나고, 종묘사직이 거의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동쪽의 땅 수천리가 모두 살아나는 은택을 입었으니, 이는 만고에 드물게 보는 일이라 하겠다. 아아, 훌륭하도다.…
그는 인조대왕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그 행장을 지어 바치기도 했고, 뚝섬 앞쪽에 있다가 강남을 개발하면서 사라진 저자도(楮子島)의 풍광을 묘사한 「풍월정기(風月亭記)」도 남아 전한다.
묘소는 분당구 석운동 51, 속칭 ‘대감능골’에 있는데, 경기도기념물 제 84호로 지정되었다.
6. 재화, 여색, 잡기(雜技) 따위엔 무관심했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이덕무에 관해서는 아쉽게도『성남인물지』에서도 누락이 되어 있기에 이 기회에 증보할 겸 소개한다.
그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선귤당(蟬橘堂)이다. 정종의 별자(別子) 무림군(茂林君)의 10대손으로 통덕랑(通德郞) 이성호(李聖浩)의 아들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사(經史)에서 기문이서(奇文異書)에 걸쳐 여러 방면에서 박식을 자랑하였으나 서얼(庶孼)인 관계로 관직에서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 ·성대중(成大中) 등과 사귀고 일찍이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탑골공원 원각사지의 흰색 10층 석탑[白塔] 부근으로 이사했는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도 그곳에 와 살게 되면서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 등이 백탑 주변에서 자주 만났던 관계로, 그들 고증적인 북학파를 ‘백탑파’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1778년(정조 2) 서장관 심염조(沈念祖)를 수행하여 청의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여러 자료 및 고증학 관련 저서를 가져와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에 정조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여기에 서얼 출신의 우수한 학자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뽑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국조보감(國朝寶鑑)』,『규장전운(奎章全韻)』 등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시편을 남겼다. 그는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선조·인조 연간의 한학4대가인 월상계택(月象谿澤) 곧 월사 이정구(月沙), 상촌(象村), 계곡 (谿谷), 택당(澤堂) 등에 대하여 후사가(後四家)라 불리기도 한다.
한편, 그가 서울 지도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보고 읊은 백운시(百韻詩)를 본 정조가 ‘아(雅)’라는 평가를 내리자 호를 새로이 아정(雅亭)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검서를 겸한 채 외직에도 나가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등을 거쳤으며, 1791년에는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가 『홍문관지(弘文館志)』를 교감한 공로로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그가 죽자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그의 저술은 아들 이광규(李光葵)에 의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로 집성되었다. 『청장관전서』에는 독서광이었던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고 했던「간서치전(看書痴傳)」, 선비·부녀자·아동의 예절과 수신 규범을 적은 ‘사소절(士小節)’ 등이 실려 있다.
『연암집』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형암(炯菴) 행장(行狀)」에는 그의 행장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어 발췌 소개한다.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지녔고 성품이 단정하고 엄격하였다. 세 살 때 이웃에 사는 창기(娼妓)가 엽전 한 푼을 가지라고 주자, 즉시 “더러워. 더러워.” 하며 땅에 던졌고, 그 돈이 빗나가서 신고 있는 신 위에 떨어지자 수건으로 그 신을 닦았다. 겨우 6, 7세밖에 되지 않아서는 능히 글을 지었고 책 보기를 좋아했다.…
차츰 장성하자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썼다.…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두어 칸의 허물어진 가옥에 거친 음식도 건너뛰는 때가 많았지만 편안하게 받아들여, 남들은 그가 근심하는 빛을 보지 못했다. 무릇 세간의 재화와 이익, 가무와 여색, 애완물, 잡기(雜技) 따위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뜻을 같이하는 두어 사람과 학문을 강론하는 외에는, 지은 시나 산문을 남에게 잘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책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보면서 초록(抄錄)했는데, 본 책이 거의 수만 권을 넘었으며, 초록한 책도 거의 수백 권이었다. 비록 여행할 때라도 반드시 책을 소매 속에 넣어 갔으며, 심지어는 붓과 벼루까지 함께 가지고 다녔다.…
무술년(1778, 정조 2)에 사신 행차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면서 산천과 풍물을 관광하였으며,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담론하고 시를 지어 주고받은 일이 많았다. 항주(杭州) 사람 반정균(潘庭筠)이 그를 만나 보고 탄복하며…
임금께서 검서들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는, ‘규장각 팔경(奎章閣八景)’이라는 제목의 근체시(近體詩) 8편을 짓게 했는데 무관이 장원을 차지했고, 이튿날 다시 ‘영주에 오르다〔登瀛州〕’라는 제목으로 20운(韻)의 시를 짓게 했는데 또 장원을 차지하니…이렇게 해서 남들에게 받지 못했던 인정을 비로소 임금에게서 받게 된 것이다.…
적성에 있는 5년 동안 10번의 인사 고과에서 다 최우수를 받았다.…
향년은 겨우 53세였다. 2월에 광주(廣州) 낙생면(樂生面) 판교(板橋)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7. 남편도 스승이라고 생각했던 성리학자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
영조・순조 연간의 강정일당(姜靜一堂)은 세조 때 공신이며 설화집『촌담해이(村談解頤)』와 유명한 「도자설(盜子說)」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현재 일본의 오쿠라[小倉] 문화재단에「독조도(獨釣圖)」를 남기고,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姜希孟)의 10세손이지만, 조부 강심환(姜心煥)과 아버지 강재수(姜在洙)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모두 단명하여 영락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권서응(權瑞應)의 딸이다. 권서응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권상하(權尙夏)의 동생인 참판 권상명(權尙明)의 현손이니, 정일당은 부계의 문인 전통과 모계의 성리학 기호학파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의 여중군자(女中君子)라 하겠다.
어릴 적 이름은 지덕(至德)으로, “여기 지극한 덕을 갖춘 사람이 있으니 네게 부탁한다.”는 어머니의 태몽에서 따온 것이다. 어릴 적부터 성품이 정정단일(貞靜端一)하고 희로애락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며, 문밖에 나가 다른 아이들과도 어울려 놀기를 삼가 조심하는 등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허약한 체질이긴 하였지만 누구보다도 뛰어난 여공(女工) 솜씨를 지녀서 모든 어른들로부터 “천인(天人)과 같은 아이로구나!” 하는 칭찬의 말을 자주 들으며 성장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면 옷도 벗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약과 음식에 정성을 다하였고, 어머니의 바느질과 길쌈을 밤새워 도왔다. 여덟 살 때부터 ‘시경’, ‘예기’ 등에 나오는 경전 구절을 배웠다.
여자에게 학문을 가르치지 않던 당시의 관행으로 보면, 예외적일 만큼 문학적 소양과 재덕을 겸비하였음을 알 수가 있겠다. 정신적 스승인 아버지를 열일곱에 여읜 정일당은 몸이 상할 만큼 슬퍼하며 3년상을 치렀지만, 바느질과 베 짜기로 어머니를 도우며 집안일에 헌신하는 등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20살 때, 6살 연하의 충주 선비 탄재(坦齋) 윤광연(尹光演; 1778~1838)에게 출가한다. 시댁은 고려시대 윤관(尹瓘)과 윤언이(尹彦頤)가 그 선조이다. 윤광연의 조부 윤심진(尹心震)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아버지는 한학자로서 아호 자재(自齋) 윤동엽(尹東燁)이며, 그의 어머니 천안 전씨는 전여충(全汝忠)의 딸로 아호를 지일당(只一堂)이라고 하였는데 역시, 시문(詩文)으로 며느리 강정일당과 화답이 될 만큼 여류문사의 자질이 뛰어난 훌륭한 집안이었지만, 가정형편은 아주 곤궁했다.
그래서 정일당은 가난한 친정에 계속 머물다가 3년 후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시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남편을 도와 함께 공부하였다.
이후 18년 동안 모신 시어머니가 사망하자 정일당은 더욱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며 온갖 궂은일을 감당하게 된다. 게다가 5남 4녀라는 자녀를 모두 어린 나이에 잃는 참척(慘慽)의 슬픔을 당하고 양자를 둔다. 그러나 정일당은 의연했다. 그녀는 남편의 공부를 독려하며 집안을 혼자 이끄는 한편 자신의 공부에도 매진한다.
정일당의 학문적 관심은 ‘정감’이 두드러진 서정적 시문보다는 성리학이나 주역 같은 재도적(載道的) 문학관 쪽에 가까워, 여성철학자로 평가받는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아서, “내 비록 여자의 몸이나 하늘로부터 받은 성품이야 애초 남녀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윤지당의 말을 인용하면서, “여자라도 노력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라고 남편에게 묻기도 하였다.
따라서 정일당의 한시도 애정, 이별, 연모 쪽이 아닌 안빈낙도, 학문, 수신, 훈계 같은 유가적 세계에 가깝다. 이것이 일찍이 문학성을 인정받은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황진이, 매창, 홍랑 등의 여성 시에 비해 평가가 늦을 수밖에 없었던 연유이기도 하다.
정일당은 남편의 학문에 대한 점검과 채근도 자주 했다. 이는 “필요할 때마다 조언해 달라.”는 남편의 부탁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 윤광연도 정일당의 조언을 반발 없이 수용했으니 그 역시 당시의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던 듯하다.
과천에 살던 어느 해 흉년이 들어 3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가계(家計)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등 치산(治産)에도 힘써, 말년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재산을 모으게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후에 서울로 이사하여 남대문 밖의 약현(藥峴 : 지금의 중구 중림동)에 살 때에는 남편의 호를 따서 지은 탄원(坦園)이라 명명한 정원이 딸린 넓은 집에서 살게 되었으며, 청계산 동쪽 넓은 임야를 선조들의 위토로 사서 3대 조상의 묘소를 새로 옮겨 단장하기도 하였다. 또 형제와 친척들의 혼례와 상례를 대신 치러주기도 하였다.
현재 성남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 관리되는 성남시 수정구(壽井區) 금토동(金土洞) 산자락 묘역 전체가 모두 정일당이 마련한 선영(先塋)으로 자신의 묘소도 이곳에 있으며 여성으로는 드물게 추모 사당도 가지고 있다. 서화에도 능하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사람들이 그의 남편에게 글을 청하면 대신 지어주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정일당이 죽은 후 남편 윤광연은 “이제 공부하다 의심나는 것을 누구에게 물어보고,…허물은 누가 타일러줄 것인가?”라며 “나에겐 스승도 되고 아내도 되었다”고 하며,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내의 유고문집 펴내었다.
그렇게 탄생한 『정일당유고』에는 시 38수, 명 5편, 서 10편, 기 3편과 묘지명, 행장 등 정일당이 생전에 추구하고 쓴 글들이 오롯이 실려 있다.
언젠가 이직보(李直輔)가 정일당의 시 한 수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는데, 이 소문을 들은 이후로는 자신의 저술을 일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성남문화원에서는 해마다 7월경 강정일당을 추모하는 성남사랑 글짓기 대회를 개최한다.
8. 문관직 제수를 기뻐했던 한말 3대 시인 강위(姜瑋: 1820~1884)
한말의 한문학자이며 개화사상가로 본관은 진양(晋陽), 별명은 호(浩) 또는 성호(性澔)이고, 본명은 문위(文瑋), 자는 중무(仲武), 요장(堯章), 위옥(韋玉) 등이며, 호는 추금(秋琴), 자기(慈屺), 청추각(聽秋閣), 고환(古懽), 고환당(古懽堂) 등이다. 출신지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복정리(福井里)이다. 고조부는 강성익(姜聖益), 증조부는 강주현(姜周炫), 조부는 강헌규(姜獻圭)이며, 공주영장(公州營將)을 지낸 무관 강진화(姜鎭華)와 박희혁(朴希赫)의 딸 사이의 2남이다.
가계는 조선 중엽부터 문관직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강위의 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무반 신분으로 굳어져 있어서 문신이 될 수 없음을 알고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였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11살이 되어서야 서당엘 다녔으며, 14살 때 한성으로 가서 공부를 했는데, 그 중에서도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의 손자로 뒷날 이조판서를 역임한 용산(蓉山) 정건조(鄭健朝: 1823~1882)와 함께 수학하여 일생의 지기로서 지냈다.
24세가 되는 1843년(헌종 9) 가업인 무과를 포기한 뒤에는 정건조의 극력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을 공부하는 데 치중하여 민노행(閔魯行: 1777~1848)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다가, 그가 사망하자 그의 유촉(遺囑)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2~1856)를 찾아가 5년 남짓 사사한 후, 김정희가 북청 귀양에서 풀려난 뒤 김정희를 하직하고 방랑생활로 들어갔다. 이때 그의 방랑생활을 밑받침해 준 것은 시인으로서의 명성이었다. 원래, 그는 고심하며 시를 짓거나 시고(詩稿)를 다듬고 고치는 일도 거의 하지 않았으나 그의 시는 개성이 뚜렷하고 참신하여 당대 제일의 시인으로 추앙받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가 방외인적(方外人的) 태도를 버리고 현실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1862년(철종 13) 삼남지방을 시발로 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란의 충격이었다. 이 민란의 와중에서 난군들에게 감금당하여 격문을 기초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탈출하여 경사(京師)로 올라왔다.
이때 친구인 정건조의 강권에 의하여 지은 것이 3만 어에 달하는 삼정(三政)의 폐단에 대한 시무책인『의삼정구폐책(擬三政救弊策)』인데, 이는 전정, 군정, 환곡에 관한 혁신적인 개혁안으로, 그 내용이 너무 혁신적이라 정건조가 조정에 제출하는 데 난색을 표하자 미련 없이 이를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한편, 실학자로부터 개화사상가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1873(고종 10)∼1874년에 걸친 두 번의 중국 여행을 통해서였다. 원래 역관들과 친숙하여 해외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으나, 이 두 차례의 여행을 통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를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어, 1876년(고종 13) 한일 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대신 신헌(申櫶)을 막후에서 보좌하면서 필담을 책임 맡기도 했다.
그 뒤 1880년 김홍집(金弘集)이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김옥균(金玉均)의 추천에 의하여 서기로 수행하면서 일본과 중국의 개화파가 조직한 흥아회(興亞會)에 참석하여 그들과 교유를 맺었고, 특히 중국대사관의 참찬으로 파견되어 있던 황준헌(黃遵憲)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귀국 후에 『조선책략(朝鮮策略)』으로 알려져 있는 황준헌의 『연미거아책(聯美拒俄策)』을 적극 옹호하였다. 『연미거아책』이란 강대국 러시아가 동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하려 하니, 가장 위기에 처해 있는 조선의 살 길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하는 것이라는 것이 책략의 핵심이다.
다시 2년 뒤인 1882년에는 김옥균, 서광범(徐光範) 등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 제자인 변수(邊燧)와 함께 이들을 수행하였다. 이때 나라에서 선공감(膳工監) 가감역(假監役)이라는 문관직을 제수받은 것을 기뻐하여 이름을 위(瑋), 자(字)를 위옥(韋玉)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유럽과 미국까지 돌아보고자 하였으나,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서둘러 귀국하였는데, 강위는 이들과 헤어져 단신으로 세 번째 중국여행을 하고 귀국하였다.
1883년 박영선(朴永善)과 함께 박문국(博文局)을 세우는 한편,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간행, 후에 이를『한성주보(漢城週報)』로 고친 후 국한문을 혼용하는 데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저서로는 그의 사망 후 친구 방치요(房致堯)가 수집, 간행하였던 것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 간행한『강위전집(姜瑋全集)』이 남아 전한다. 그런데 갑신정변 이후의 국내정세 때문에 그와 김옥균,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 사이에서 오고간 시문은 모두 삭제되고 말았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함께 한말(韓末) 3대시인으로 불렸다.
묘소는 선산이 있던 광주부 세촌면 복정리(福井里) 안골에 있었는데, 후손이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화장하였다고 한다.
9. 최근 발견, 위작설이 난무하는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金大問)(생몰년 미상)
김대문은 진골 귀족 출신으로, 신라 중대의 문장가요 학자이다. 일찍이 당에 유학하였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704년(성덕왕 3)에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의하면 “도독은 주(州)의 장관으로 785년(원성왕 원년)에 종래 총관(摠管)이라 부르던 것을 도독이라고 고쳤다.”고 하였으므로 704년 당시 김대문은 한산주총관이었다고 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 권46 열전6 「설총전(薛聰傳)」에 부기(附記)되어 전하는데, 그의 저서로『계림잡전(鷄林雜傳)』, 『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 『한산기(漢山記)』, 『악본(樂本)』 등이 있었다고 한다.
『계림잡전』은 역대의 설화를 모아 놓은 책으로,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신라 불교수용에 관한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인용하고 있으며, 신라 초기의 왕호(王號)에 대한 김부식의 설명도 역시 이『계림잡전』에서 인용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신라 역사상의 중요한 사건들을 다룬 저술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고승전』은 유명한 승려의 일생을 적은 저술일 것이요, 『악본』은 가무(歌舞)와 관계된 책이고, 『화랑세기』는 신라 화랑의 전기이며, 『한산기』는 한산주총관으로 있으면서 지방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까지 남아 있어서 자료로 인용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저술은 신라 중대의 문화 수준이 단순히 중국 것을 모방한 단계를 벗어나 신라의 독특한 문화전통과 생활경험을 토대로 하는 데까지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1989년에 필사본『화랑세기』가 발견되고, 다시 1995년에는 이른바 그 모본(母本)이 알려졌는데, 여기에는 32명의 풍월주(風月主)의 계보와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인 사랑, 알력, 음모 등의 개인적인 사생활도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에선 이 책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책이라면 이것을 바탕으로 신라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다시 써야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러나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박창화(朴昌和)에 의한 위작설(僞作說)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3.11.10. 102매)
성남인물열전(2) 문장으로 이름을 빛낸 사람들 註解
이 웅 재
1.趙云仡(13p, 이웅재 ‘경북 인물열전 40’에도)
*國子監 直講: 成均館 敎授
*按廉使: 고려ㆍ조선 시대에 둔, 각 도의 으뜸 벼슬. 按察使→按廉使→觀察使
*典法摠郞: 법률의 집행을 담당하던 관직.
*院: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공적인 임무를 띠고 여행하는 관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국영 여관. 나중에는 일반 나그네도 투숙이 허용되었지만 사용자가 제한되어 쇠퇴하였다.
*靑盲: 눈은 멀쩡하나 보지 못하는 병.
2.韓智源(8p.)
*賜暇讀書: 기간은 1~3개월이었으나 개월을 한정하지 않고 '장가'(長暇)를 주기도 했다.
*申企齋: 이름은 光漢. 조선 중기의 문관. 양관[弘文館, 藝文館] 대제학[文衡]. 대제학은 영 의정이 부러워하는 벼슬자리로 “3대가 善을 베풀어야만 대제학 한 명을 배출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는 문충공 申叔舟의 손자이다. 그의 집은 李承晩 대통령이 기거하던 梨花莊에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申臺라고 부른다. 저서에『企齋集』『企齋記異』가 있다.
*諸葛菜: 諸葛亮이 심어서 軍糧에 대던 무이므로 제갈채가 됨. 무는 육 개월이면 다 자라 먹을 수 있으므로 출정하면 막사를 짓고 무를 심었다고 함.
*召公 姬奭:주 무왕의 동생. 甘棠 아래에 거주하며 교화를 밝혔다 한다.
*큰별: 諸葛亮의 죽음을 비유한 것.
*尹根壽: 영의정 尹斗壽의 동생.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판서로 임금을 호종하기도 했고, 奏請使(조선시대 대중국관계에서 외교관계로 보내던 비정규적인 사절) 등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여 6번이나 중국을 왕래하면서 국난극복에 힘썼다. 성리학에 밝아 李珥와도 막역한 사이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나 당시의 거장으로 일컬어졌다.
3. 韓述(12p.)
*滿花方席: 여러 떨기의 꽃무늬를 놓아서 짠 방석.
4.權得己(13p.)
*百祥樓: 관서팔경 중의 하나.
*德水 李子敏: 子敏은 李安訥의 字이고, 德水는 본관이요, 호는 東岳이다.
그는 道學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문학에 힘쓰되 평생 "뜻을 얻으면 經濟一世하고 뜻을 잃으면 隱遁閑居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문집 『東岳集』에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가 전한다. 杜詩를 萬讀이나 했다고 한다.
*八珍味: 중국에서 성대한 음식상에 갖춘다고 하는 진귀한 여덟 가지 음식의 아주 좋은 맛. 龍肝, 鳳髓, 兎胎, 鯉尾, 鶚炙(악적), 熊掌, 猩脣, 酥酪(수락)을 이르기도 한다.
※鶚: 물수리, 징경이
酥酪: 소젖을 정제하여 만든 것이 酥요, 이 수를 다시 정제하여 만든 것이 酪이다.
*遊俠≒俠客: 司馬遷의 『史記』 列傳 제64에 「遊俠列傳」이 있다.
*전국시대의 景春은 張儀와 公孫衍을 대장부로 간주하였다: 경춘, 장의와 공손연은 모두 전국시대의 縱橫家이다. 『孟子』「滕文公 下」에서 경춘이 그들에 대해 말하기를, “공손연과 장의가 어찌 진정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 번 화를 내자 제후들이 두려움에 떨었고, 편안하게 지내자 천하가 전쟁을 멈추었습니다.” 하였다.
*慶元, 紹興 : 南宋은 宋이 金에 밀려 남쪽 臨安으로 遷都한 1127년부터 元에게 망한 1279년까지의 송나라를 이르는 말이며 慶元과 紹興 南宋의 高宗과 寧宗의 연호.
*秦檜 : 南宋 高宗 때의 정승. 고종의 신임을 받았지만 뇌물을 받고, 主戰論을 펴는 충신 岳飛를 모함해 죽였음.
*韓侂胄: 南宋 寧宗 때의 권신으로, 朱熹를 내쫓고 성리학을 僞學으로 몰아 慶元黨禍를 일 으켰다. 秦檜와 韓侂胄는 송(남송)의 대표적 간신으로 평가받는다. ※侂:부탁할 탁
*썩은 쥐보다도 못하여: 『莊子』「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惠子가 梁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혜자에게, “莊子가 와서 당신을 대신하여 재상이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혜자가 몹시 두려워하여 전국에 수배하여 사흘 밤낮 장자를 찾았다. 장자가 스스로 혜자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남방에 원추란 새가 있는데 자네는 아는가? 원추는 남쪽 바다를 출발하여 북쪽 바다로 날아갈 때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물이 나는 샘이 아니면 마시지 않았네. 그런데 올빼미가 썩은 쥐를 얻고서 원추를 쳐다보면서 쥐를 뺏길까 봐 ‘꿱’ 하고 을러댔다네. 그처럼 자네도 양나라 재상 자리 때문에 나를 을러대는 것이 아닌가?”
5.李景奭(13p.)
*謁聖試: 임금이 文廟에 참배한 뒤 명륜당에서 행한 과거. 알성문과는 고시 시간이 짧아 실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고, 당일 발표하는 卽日放榜이었기 때문에 試官의 수도 많았으며 임금이 친림하므로 相避制가 없어 시관의 아들이나 친척도 응시할 수 있었다.
*承文院: 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 槐院이라고도 하였다. 槐木은 회화나무로 나무 木에 귀신 鬼가 합쳐진 글자로서 회화나무의 옹두리가 귀신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周나라 때 朝廷의 앞뜰에 회화나무를 심었었으므로 조정을 槐庭이라고도 불렀으며, 회화나무를 學者樹 또는 ‘선비나무’라고도 불렀다. 오래된 회화나무의 썩은 껍질에는 개미들이 살고 있어 이를 槐安國이라 부른다. 槐安夢은 ‘槐安國의 꿈’이라는 뜻으로, 덧없는 꿈이나 부귀영화를 이르는 말로, 당나라 李公左의 傳奇小說 「南柯太守傳」에서 淳于棼이 꾸었던 꿈으로 南柯一夢이라고도 한다.
*남한산성 축성: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내륙지방과 수도까지 적에게 점령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고 이로 인해 산성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이나 독성산성 등의 전투에서 산성을 이용하여 왜구를 물리치는 사례가 늘면서 조정에서는 산성의 필요성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고성이나 옛 성지를 증, 개축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성룡은 도성방어책으로서 경기지방의 산성을 수축하도록 주장하면서 광주 이천 등의 군사를 집결시켜 남한산성을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남한산성에 승장 惟政이 거느린 승군 60여 명을 보내어 산성을 수비케 하고 앞으로의 축성에 대비토록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임진왜란의 전후복구가 한창이었던 떼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산성의 수축은 어렵고 또한 수축 후에도 산성의 방어와 유지가 힘들다는 주장으로 인해 남한산성의 수축은 일단 포기하게 된다.
그후 남한산성 수축의 논의가 다시 시작된 것은 인조반정 이후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그들이 외교정책이 광해군 시대의 중립외교 노선을 포기하고 숭명배청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이것은 후금을 크게 자극하게 되었다.
첫 번째의 축성계획은 산성의 책임을 맡았던 林檜가 李适의 난으로 피살되어 실패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축성시기는 각자료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축성시기는 알 수 없다.
洪敬謨의 <重訂南漢志>에 의하면,…인조 4년 11월에 완공되었다.
張維의 <남한산성기>에 따르면…인조 4년 7월에 완공하니…
축성에 동원되었던 인력은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僧軍이다. 기록을 통해서 覺性 등 전국의 유명한 승려들이 승도들을 모아 지역을 나누어 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인조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 만에 항복하게 되었다.
6.李德懋(15p.)
*『國朝寶鑑』: 조선 시대 역대 군주의 업적 가운데 善政만을 모아 편찬한 編年體 史書로, 廢王되어 끝까지 추존되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군주들의 재위 순서에 따라 편차가 구성되어 있다.
*『奎章全韻』: 1800년(정조 24) 왕명으로 李德懋가 奎章閣에서 편찬한 韻書로서 尹行恁·徐榮輔·南公轍 등이 교정하였다. 漢詩를 짓는 데 꼭 필요한 사전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원래 서명은 『御定奎章全韻』이지만 줄여서 『奎章全韻』이라고 부른다.
*沙斤道: 경상도 咸陽의 沙斤驛을 중심으로 한 驛道=驛路.
*察訪: 역참의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 外職 문관의 벼슬. 공문서를 전달하거나 공무로 여행 하는 사람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馬官.
*廣興倉: 관원의 녹봉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官衙.
*主簿: 문서 따위를 주관하던 종6품 관직. 조선시대의 관직은 정1품에서 종 9품까지 18등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6품 이상은 각 등급마다 상하위의 구분이 있어서 모두 30등급의 관직이 있었다.
정3품의 상위 계급인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는 당상관(堂上官)으로 불렸고 그 아래 관리들은 당하관(堂下官)으로 불렸다.
당하관도 6품까지는 참상관, 7품에서 9품까지는 참하관으로 불렸고 관복의 색깔도 당상관은 붉은 관복을, 참상관은 푸른 색 관복을, 참하관은 초록빛 관복을 입었다.
*司饔院: 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靑莊: 박지원의 『澹然亭記』에는 ‘淘河’와 ‘靑莊’이란 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하는 ‘사다새’, ‘伽藍鳥’, ‘펠리컨(pelican)’이라고도 한다. 아래 주둥이의 수축할 수 있는 볼주머니에 먹이를 넣어 두면 새끼가 입으로 꺼내 먹는다.
‘淘’는 일렁인다는 뜻으로 도하는 진흙과 뻘을 부리로 헤집고 다니며 쉴새없이 물고기를 찾아다닌다. 깃털과 발톱은 물론 부리까지 진흙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쓰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헤메고 다니지만, 종일 고기 몇 마리 잡아먹지 못하고 늘 굶주린다.
청장은 해오라기[白露]의 별칭이다. 혹은 ‘信天翁’으로도 불린다. 맑고 깨끗한 물가에 날개를 접은 채 붙박이로 서 있다. 물고기가 그 앞을 지나가면, 고개를 숙여 날름 잡아먹는다.
도하는 고생 고생을 해도 허기를 면치 못하지만, 청장은 여유만만하게 지내면서도 굶주리는 법이 없다.
이는 세속에서 부귀와 명리를 구하는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쫓아다니면 먹이는 오히려 멀리 달아나 버린다. 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담담하게 지내면 애써 구하지 않아도 먹이가 저절로 찾아든다는 의미이다.
*『弘文館志』: 조선 후기에 응교 李魯春 등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홍문관의 연혁·故事 등 을 기록해 엮은 책.
7.姜靜一堂(15p.)
*『村談解頤』: 淫談悖說이 처음으로 기재되기 시작한 야담집. 본격적인 음담은 宋世琳의 『禦眠楯』에서 보이고, 그것을 이은 것이 成汝學의 『續禦眠楯』이다. 이 세 책을 모아 엮은 것이 편자 미상의『古今笑叢』이다.
*玄孫: 1子-2孫-3曾孫-4玄孫(高孫이라고도 하지만 卑屬이기에 높을 高자는 가급적 피한다.)-5來孫-6昆孫-7仍孫, 耳孫-8雲孫
雲仍(운잉)은 구름처럼 멀고도 아득한 자손을 뜻하는 말로 한 단어로 쓰인다. 자세히 말하자면, 雲孫은 8대손이고, 仍孫은 7대손이지만 雲仍(운잉)이라고 하면 아주 먼 자손을 뜻하는 관용어이다.
*「獨釣圖」: 柳宗元(773-819)의 시 「江雪」의 結句에서 따온 畵題. 柳宗元(773-819)의 「江雪」전문은 다음과 같다.
千山鳥飛絶 (천산조비절) 즈믄 산에는 새들이 날기를 그치고
萬徑人縱滅 (만경인종멸) 만 갈래 길에는 사람의자취 없는데
孤舟蓑笠翁 (고주사립옹) 거룻배에 도롱이 삿갓 쓴 늙은이
獨釣寒江雪 (독조한강설) 치운 강 눈발 속에 홀로 낚싯대 드리우고 있네
*任允摯堂: 1721년~1793)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풍천, 호는 윤지당(允摯堂),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저서로 『允摯堂遺稿』가 전해지고 있다.
8.姜瑋(13p.)
*繕工監: 土木과 營繕(건축물 따위를 새로 짓거나 수리함)을 관장하던 관청.
*假監役: 從九品의 임시 관직. 監役은 役事를 감독하는 직책.
9.金大問(6p.)
*漢山州都督: 신라의 지방 관직. 오늘날 경기도 광주 일대에 해당하는 한산주를 통치하는 지방 장관.
*『花郞世紀』: 金大問이 쓴 花郞들의 傳記.
*『花郞世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제2세 풍월주 미진부의 딸 미실로, 우산국을 점령했던 이사부의 아들인 세종과 정식으로 혼인, 아들 둘을 낳는다.
그러나 미실은 진흥왕 중기부터 진평왕 초기까지 약 40년 동안 오로지 빼어난 미색 하나로 색공(色供)을 통해 제왕을 능가하는 권력으로 정계를 좌지우지하였다.
미실은 진흥왕과 그의 아들 동륜태자, 그리고 동륜태자의 이복동생 금륜태자(25대 진지왕), 동륜태자 아들 진평왕 등 3 왕과 1 태자를 사랑하였고, 화랑 사다함을 비롯 세종, 설화랑, 미생랑 네 명의 풍월주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다.
미실의 혈통은 대원신통(大元神統)이라 한다. 대원신통은 신라 왕실에 왕비 등의 여자를 공급하는 혈통으로, 진골정통과 함께 모계로 이어지는 특이한 혈통이라 한다.
그런데 신라에는 대원신통 이외에도 왕비를 공급하는 진골정통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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