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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운수석산(日雲水石山)…’ 같은 일생의 기록

거북이3 2013. 12. 20. 21:25

 

‘일운수석산(日雲水石山)…’ (한경석 교수 자서전 추천사).hwp

[추천사]

‘일운수석산(日雲水石山)…’ 같은 일생의 기록

수필문학추천작가회장 이 웅 재

‘일운수석산(日雲水石山)이요, 송불록학구(松不鹿鶴龜)라.’

‘해와 구름은 물이 흐르고 돌이 뒹구는 산마루에 걸터앉았고, 소나무는 사슴이나 학 또는 거북이와는 달리 동물이 아니고 식물이니라.’ 이것은 내가 십장생을 외울 때 쓰는 한문문장이다. 병풍이나 문양에서 흔히 사용되는 십장생은 누구나 선망하는 열 가지의 사물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쉽게 외워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만들어낸 한문 문장이었는데, 한경석 교수의 “인생은 삼 단계”라는 자전적인 글을 대하면서 그 문장이 느닷없이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한 교수의 일생은 바로 ‘일운수석산(日雲水石山)이요, 송불록학구(松不鹿鶴龜)라.’라는 한 문장 속에 그대로 녹아 있는 듯이 여겨졌던 것이다.

십장생과 같은 오래오래 변치 않는 삶을 사는 일생만이 일생은 아니다. 하루살이의 일생도 일생이다. 대통령의 일생도 일생이요, 막노동꾼의 일생도 일생이다. 그 누구의 일생도 그 살아온 궤적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흔적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쓰인 글씨처럼 바닷물이 한번 쓸려왔다 빠져나가면 남아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서 그의 삶은 무화(無化)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일대기를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대기만 남기면 그의 일생은 영원히 남는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 일대기라면 쓸데없이 지가(紙價)만 올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우리 한경석 교수의 삶의 기록은 그렇지가 않다. 그는 평범한 삶을 살아온 듯싶으면서도 그 평범을 넘은 삶을 살아왔기에, 우리는 그의 삶에서 나름대로 공감의 장(場)을 찾을 수 있고, 그의 일생에서 많은 점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한 교수의 일생은 ‘일운수석산(日雲水石山)이요, 송불록학구(松不鹿鶴龜)라.’는 말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이제 그러한 그의 삶 하나하나를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그가 결혼 상대자를 검토하기로 했던 100개 문항의 질문지를 생각해 보자. 그와 같은 질문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도 바로 채점을 하면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여 일주일 뒤부터 아주 신중하게 일주일에 걸쳐 채점을 해 본 사람을 나는 내 주위에서 본 적이 없다.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을 선택하는데 그 정도의 신중함은 우리가 배워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가서 점심을 먹을 때의 이야기도 그의 예지가 빛나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나는 감사히 먹겠다고 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우선 밥이 깔끔했다. 반찬도 맛이 있었고 음식이 무척 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음식은 장모 솜씨를 닮는다고 했는데 이 정도면 만족이야.”

세상을 밝게 비추는 ‘해’와 같은 소중한 지혜를 우리는 한 교수에게서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월남의 공산화, 그 패인(敗因)을 분석한다’와 같은 글을 보아도 그의 세상을 보는 눈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절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의 글에서는 또 ‘산’과 같이 듬직한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쉽게 읽을 수가 있다. 다음의 글을 읽어 보자.

부모님이 위독하다고 하여 휴가를 보낸 사병이 귀대일자가 지나도 안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의 집에 가보니 집안이 형편없었다. 거기에다 편찮으시다는 그의 아버지는 곧 숨이 넘어갈 듯하였다. 나는 우선 그 사병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버지가 완치되면 돌아오라고 또 다시 일주일의 휴가를 더 주었다. 그런데 내가 그 병사의 집에 갔다 온 지 하루 뒤에 그 병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님이 오늘 새벽에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님 상을 잘 모시고 오라는 말을 하며 그 병사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었다. 그는 내가 말했던 대로 아버님을 잘 모시고 휴가가 끝나는 날 무사히 귀대하여 나의 걱정을 풀어 주었다.

글자 하나하나에서 그의 타인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월남에서 적의 포탄을 맞고도 그가 취한 행동은 ‘숭고함’까지도 동반하는 듬직함에 가슴이 뿌듯해진다.

나는 아무리 아파도 가서 비상종을 쳐야 된다는 의무감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낮은 포복으로 종이 있는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포를 맞은 자리에서 15m쯤 떨어진 곳에 종이 있었다.

나는 종이 매달려 있는 대를 움켜잡고 종을 힘껏 내리쳤다. 그렇게 몇 번을 친 나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우리 내무반이었다.

권투 시합에 나가서 판정패를 당하면서도 ‘돌’과 같은 굳은 의지를 꺾지 않은 그의 행동에는 승자에게보다도 오히려 뜨거운 박수를 쳐 주고픈 마음이 든다.

머리에 박히는 상대방의 주먹은 차라리 돌덩이였다. 그만큼 상대의 펀치가 강했다. 상대방의 오른 쪽 훅을 맞은 나는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나는 얼른 머리를 옆으로 몇 번 흔들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채, 이리 저리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그렇게 1회전에 맞은 머리의 띵함은 3회전까지 계속됐다. 나는 그날 판정패를 당하는 결과를 맞고 말았다.

‘거북이’처럼 느린 행동으로 위기를 탈출하는 그 용의주도함은 또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권투를 배운 적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완급조절이 아주 절묘하다.

아뿔싸, 내 배 위에 기어오는 건 전갈이었다. 나는 온몸이 잔뜩 긴장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전갈에게 물리면 모두 즉사한다. 나는 우선 이것을 튕겨버려야겠다는 생각에 오른손을 아주 조금씩 올렸다. 내가 긴장하고 있는 사이 전갈도 가는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결혼을 반대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신 장인 영감을 8~9시간쯤이나 끈질기게 기다리는 ‘소나무’ 같은 굳은 지조도 대수롭게 넘어갈 일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장인 영감이 두 손을 들게 만든 것은 한 교수만의 끈질김의 승리라고나 할까?

“자네에게 부탁할 일은 자네의 그 큰 뜻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달라는 얘기야. 혹시 학생이 결혼하면 학력이 뒤떨어진다고들 하는데 자네는 목표가 뚜렷하고 인생관이 확실히 서 있는 사람 같아서 내가 내 딸을 주기로 생각한 것이니 내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없도록 하게. 아무튼 내가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볼 것이니 자네의 지금 그 뜻이 꺾여지지 말도록 하게.”

시청료 시비 문제로 KBS와의 끈질긴 싸움을 끝내 승리로 이끈 것도 그의 올곧음을 대변하고도 남는 일이라 하겠다.

신혼여행으로 동학사를 둘러보고 사진만 몇 장만을 찍고서 여인숙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한 말도 예사롭지가 않다. 길고 험난한 길을 예상하면서도 나중에 신문기자가 되어 우리나라의 잘못된 저널리즘을 똑바로 고쳐 놓겠다는 ‘학’을 닮은 고고한 기상을 어찌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여기도 자장면 하나요.”

우리는 첫 데이트에 자장면을 먹은 희귀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조용히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나 순수한가? 깊은 산속 옹달샘을 찾아와서 목을 축이는 ‘사슴’과 같은 순수함이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가? 그럴 때에는 시간도 ‘조용히 조용히’ 흘러가서 평화로움을 담뿍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고향인 충북 옥천 군서 마을로 가는 곤룡재를 넘기 위해서, 소꿉동무 월선이와 같이 산길로 접어선 때가 바로 이쯤이었다.…

여기저기 있는 도랑에는 딛고 건널 돌부리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 없이 나는 용기를 내어서 넓적한 등판을 월선이에게 들이댔다. 잠시 동안 망설이던 그녀가 살그머니 어깨에 매달렸다. 온몸이 비에 젖어서인지 생각보다 묵직한 느낌이었다. 나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심스럽게 세찬 물줄기를 헤치며 건너갔다. 사나이의 체면이 무릎을 휘도는 물살을 넘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감싸주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우리는 얼마 되지 않아서 산 중턱을 조금 지나 옹달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자그마한 샘이다. 우리는 그 곳에서 목을 축일 수가 있었다. 차가운 샘물을 들이마시니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물’이 가져다주는 ‘맑고 깨끗함’이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느껴 보았던 ‘순수한 사랑’을 재현시켜 주고 있는 대목이다. 추억도 이쯤 되어야 반추할 맛이 나질 않을까?

한 교수가 때에 따라서는 단팥빵을 한 자리에서 한 50개를 먹기도 하는 삶을 비롯해서 1인 5역의 인생을 살아 왔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로초’의 ‘불로장생’의 이미지를 더해 주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한 자신의 일생을 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내가 일생 동안 75년을 산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25년씩 3등분해서 계산한다면, 바로 그것이 내가 겪었던 군대생활 3년의 여정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군대생활 초년 1년의 아주 어려웠던 시기는 전반기의 내 인생과 거의 흡사했고, 중년의 1년은 내 인생의 황금기인 중반기의 내 인생과 비슷했으며, 나머지 후반기 월남에서 복무했던 1년은 내가 동아일보를 퇴직한 후의 삶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는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나는 월남에서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첫 번째는 아까 얘기했듯 도깨비 21호 작전을 한 닥산에서 생겼던 전갈사건이고, 두 번째는 근무를 하다 적의 파편을 맞은 사건이다. 세 번째는 연대에서 집을 지을 때 쓰는 PS판을 수령해 오던 중 월남군과 베트콩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그 속에 들어갔다가 개죽음을 당할 뻔한 사건이다.

그가 살아서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은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이다. 그가 살아서 돌아왔음으로 우리는 그의 ‘일운수석산(日雲水石山)…’ 같은 그의 일대기를 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의 글에는 ‘충’도 있고, ‘효’도 있어서 더욱 가치가 배가된다.

“언제 전쟁터에 갔다 오신 적이 있으세요? 다리에 파편이 있는 것 같은데요.”

나는 그때서야 34년 전 베트남에서 포를 맞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금까지 그때의 기억을 하얗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 포탄 파편이 지금까지 내 다리에 박혀 있었다니……”

그래서 그는 국가유공자다.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하여 이 증서를 드립니다.’

그의 국가유공자증명서에 씌어 있는 문구다.

또한 그는 당신의 아버지를 자신에게 가시고기와 같은 분이셨다고 회고하는가 하면, 어머님은 평소 입버릇처럼 ‘나는 정월 대보름날 저 세상으로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처럼 정월 대보름날 임종하셨다고 하면서,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정을 못 잊어 하는 효자이기도 하다.

한 가지 깜빡 빼어 먹고 넘어갈 뻔한 일이 있다. 그건 바로 ‘구름’으로 상징되는 풍류라고 할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술 이야기’다. 그에게서 ‘술’을 빼면 ‘앙꼬(팥소) 없는 찐빵’이 아닐까? 용각산을 먹으면 음주측정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벌였던 한바탕 소동은 아마도 그의 술 얘기에서의 백미가 아닐까 싶어서 조금 장황하게 인용해 본다.

우리들은 곧바로 근처에 있는 약국으로 향했다. 갈수록 술은 거나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용각산을 달라고 했다. 그것도 가장 큰 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퍼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들어가던 그것은 반쯤 먹자 입으로 더 들어가지 않았다. 텁텁해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먹어야 음주운전에 걸리지 않는다는 일념에 죽어라 하고 퍼먹었다. …

“기자님은 음주운전입니다. 그것도 당장 운전 취소입니다.”

나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내가 그 동안에 했던 행동이 모두 헛것이란 말인가? 그러면 용각산은 어떻게 되는가?

경찰서를 나오는 나는 어깨가 움츠러들 대로 움츠러들어 초라하게 느껴졌다. 바지 주머니를 뒤져 담배꽁초를 뒤져보니 구부러진 게 하나 손에 닿았다. 그것을 피워 물고 나는 종로경찰서 앞길에서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푸…’하고 내뱉었다.

한 교수의 일대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살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점을 아주 명쾌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서술한 보기 드문 자서전이다. 이 밖에도 그의 정확한 상황 판단, 끝없는 도전, 하면 된다는 굳은 신념, 시의 적절한 발상의 전환, 그리고 한번 선택, 결정한 일에는 전력투구하는 끈기 등,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인생의 예지를 찾아보는 일은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유익한 시간으로 남을 것이라 여겨서 감히 일독을 권한다.

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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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석 씨에 대한 지칭을 ‘한 교수’라고 했는데, 선호하시는 다른 지칭으로 바꾸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끝 부분에 나오는 문장, “그것을 피워 물고 나는 종로경찰서 앞길에서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푸…’하고 내뱉었다.”라는 표현이 지난 번 수정본에서는 ‘내뱄었다’로 되어 있으니 ‘내뱉었다’로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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