鄕歌 風謠에 나타난 서민의식
이 웅 재
1.風謠를 선택한 이유
우리나라의 문학 현실을 살펴보건대 현대문학을 하는 사람은 고전문학과는 담을 쌓고,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현대문학에 문외한인 경우가 허다한 실정이다. 이는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할 일이라고 하겠다. 한 나라의 문학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오랜 동안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고전과 현대라는 말로 두 동강을 내어버리고 마는 까닭에 우리의 문학은 그 전통이 단절되고 말아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에 우리 고대의 대표적인 정형시가인 향가에 대한 이해로부터 이러한 전통 단절의 잘못된 사고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향가란 오랜 전통을 지닌 명칭이다. 고려 문종 때(1075) 赫連挺이 지은 『均如傳』에 처음으로 보이고, 金富軾의 『삼국사기』(1145)와 一然의 『삼국유사』(1285?)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향가 이전에 있었던 시가는 민요이며 민요가 향가의 형성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점(任東權, 韓國民謠史)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향가 중에서도 가장 長形으로 창작시가라 여기는 詞腦歌의 경우에도 세인의 戱樂之具로서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어서 자주 여기저기의 담장에까지 씌어졌다고 하니, 당시에는 향가가 얼마나 인구에 회자되었는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이러한 향가 중에서도 풍요는 가장 짧은 형식의 소위 4구체(3名句體, 3名句 4行詩)의 노래이다. 4구체에 해당하는 작품도 4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풍요는 반복구가 많아서 실질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짧은 노래가 되는 것이다. ‘풍요’라는 말은 말 그대로 ‘바람과 같이 떠돌아다니는 노래’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서 노래의 제목에서부터 ‘민요’라는 의미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노래이다. 이에 그 형태가 가장 짧아서 번잡한 논고를 어느 정도 생략하고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風謠를 대상으로 하여 고전에 대한 보다 손쉬운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2.풍요에 관한 기록
풍요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4 ‘良志使錫’ 條에 실려 있다. 靈廟寺의 불상을 만들 때 그 일을 돕기 위하여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釋 良志는 이 노래를 지어주고 일을 하면서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양지의 조상이나 고향은 알 수가 없고, 오직 그 행적이 선덕왕 때에 있었다. 錫杖 끝에 베주머니 하나를 걸어 놓으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가 보시하는 집에 가서 흔들어 소리를 내고, 그러면 그 집에서 알고서 齋費를 넣어 자루가 차면 석장이 날아서 돌아왔으므로 그가 있는 곳을 錫杖寺라 하였다. 신기함이 대개 이와 같이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재주가 있었다. 또한 문장이 능숙하여 靈廟寺의 丈六尊像을 만들 때 장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무엇을 다지거나 하는 일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니 이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3.풍요의 분석
풍요는 3名句體(3名句 4행시)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①오다/ 오다/ 오다
②오다/ 셔럽/ 다라
③셔럽다/ 의내여/ (休止)
④功德/ 닷라/ 오다
이 작품은 짧은 형식이면서도 특히 반복구가 많은 민요적 성격의 작품이다. 풍요의 민요적인 성격은 이러한 구조적인 면에서도 드러난다. 민요는 독특한 시어, 까다로운 리듬 등을 싫어한다(李商燮, 문예비평용어사전). 반복구는 까다로운 리듬이 아닌 가장 초보적인 리듬을 생성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反復律은 민요가 처음 생성될 때 함께 발원되었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 효시가 바로 풍요인 것이다.(鄭東華, 한국민요의 구조에 대한 비교 연구) 민요에 반복구가 많다는 점은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요의 경우에 더욱 두드러진다. 노동에서의 힘겨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짧고 단순한 음의 반복이나 후렴구의 사용이 효과적이다. 노동요 중에서도 집단노동요의 경우에는 더욱더 반복구나 후렴구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것은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여럿이서 같은 음을 함께 반복함으로써 공동체의식을 느끼게 하자는 것이다.
반복구를 제외한다면, 이 노래는 ③과 ④로써 의미망 구축이 완결된다. 아주 단순하다. 이 단순함은 집단에게는 꼭 적합한 형태인 것이다. 집단 속에서도 개개인의 개성이 강하게 되면 의견 따위가 분분해져서 분열을 초래하게 되지만, 개인으로서는 상대하기 힘든 어떤 대상이 눈앞에 있을 때에는 자신을 집단 속에 파묻어버림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들게 되어서 자동적으로 집단의식이 발현하게 될 것이고, 일단 집단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계기만 성립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그 집단의 단순논리를 추종하게 마련이다.
풍요는 민요라고 했다. 민요의 ‘民’은 어떤 존재일까? 高晶玉의 『조선민요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해서 말했다.
1) 個에 대한 民, 곧 개인에 대한 집단
2) 君·官에 대한 民, 곧 통치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
3) 國에 대한 民, 곧 국가에 대한 民族
여기에서는 특히 두 번째의 ‘民’에 관심을 쏟고자 한다. 풍요를 부른 서중(庶衆)들은 바로 이 통치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民’이라 보려는 것이다.
영묘사의 장륙존상을 만들 때 傾城士女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고, 그 비용이 23,700碩(=石, 섬=10말)이 들었다고 하는데, 그 1/3은 인건비(식대)로 들어야 하는데 1인이 1일 6홉씩 먹는다고 치고 연인원 130,000명이 동원된 셈이라고 한다.(金善琪, 바람결노래[風謠]) 불상 하나 조성하는 데에 13만 명이나 동원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많은 인원이 동원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靈廟寺의 寺址는 본래 큰 연못이었는데 이를 하룻밤 사이에 메우고 지었다고 한다.(新增東國輿地勝覽 21권) 그러니까 13만 명이나 동원되었던 것은 그 大澤을 메우는 大役事였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大役事는 지배계층이나 귀족집단에게서는 필요한 일이요, 바람직한 일이 될 수가 있어도 피지배계층, 서민집단에서는 의식주의 일 자체가 고된 데 徵稅에다 勞役까지 겹치게 되는 일이므로 벗어나고 싶은 일이요, 불만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민들에게는 바로 勞役, 租稅, 貪官汚吏들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가져다주는 존재들이다. 그것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는 무서운 존재들이다. 저절로 불평불만이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그 불평불만을 터뜨릴 수도 없다. ‘民’이기에 느껴야 하는 서러움이 가장 원초적으로 표현 형태로 노래된 말이 語尾의 變形조차 없는 ‘셔럽다’라는 형태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③에서의 이 ‘셔럽다’는 이미 ②에서 ‘셔럽다라’로 그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러니까 반복된 표현으로서 강조된 표현이다. 그냥 단순한 반복으로서의 강조만으로 끝난 것도 아니다. ‘셔럽다 의내여’는 영탄을 포함한 倒置이다. 詠歎도 강조를 위한 표현이다. 그런데, 또 도치가 된 것이다. 곧, 이 ‘셔럽다’란 표현은 반복·영탄·도치로서의 3중 장치에 의한 강조이다. 단순한 표현인 것 같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상당한 무게를 느끼게 만들어 주는 措辭法의 사용이다.
민요란 위정자나 지배층에 대한 怨聲을 토로함으로써 쌓이고 쌓인 울분을 발산시키는 것(崔聖鎬, 新羅歌謠硏究)이기는 하지만, 풍요에서는 그것이 상대에 대한 怨望을 顯示하지 않은 獨白調의 언어라서 더욱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불평불만 혹은 울분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만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란
다름 아닌 ‘民’이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표현은 民이 아닌 貴族集團 또는 支配階層의 사람으로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가 없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깊숙한 내면의식의 표출이라서, 드러난 것은 단순하지만 內在的인 것은 상당히 뿌리가 깊다.
‘셔럽다’는 風謠 唱者들의 내면은, 18,9C의 것이긴 하지만 金義齡의 ‘農謠九首’의 표현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심정의 하나이다.
자식 녀석 즐겁게 장난치지만
어찌 그 몸에 身役 있음을 알리오.
인생이 어찌 귀하지 아니하리요마는
너를 나 논 게 무슨 소용이리오.(안대회, 문헌 소재 민요의 조사와 그 가치 해명, 한문 원문은 생략)
생명의 탄생은 세상 그 어느 일보다도 가장 경사스럽고 존귀한 일이라야 한다. 생명의 탄생은 陽氣만으로도 안 되고 陰氣만으로도 불가능하다. 陰陽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陰陽의 만남이 필연적 조건으로서 주어진다. 그런데 그 만남은 필연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우연스러운 일로 이루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필연성과 우연성의 해후,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 하나의 생명이다. 따지고 든다면 필연성과 우연성의 해후만으로도 안 된다. 그 만남 이후에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희박한 확률상의 가능성에 의하여 생명은 탄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우연성일 수밖에 없고, 그 우연성이 너무나도 우연성에 의한 결과이기에 그것은 또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성격을 띤다. 그러한 힘들고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되는 것이 生命이니만치 귀하고 값진 것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生命이, 그 生命體의 움직임이 왜 서럽게 보여야만 하는 것일까?
새로 태어나는 生命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별개로, 그는 귀족계급의 일원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또 庶民의 몸으로서 出産될 수도 있다.
자식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바라다보는 父母의 마음은 한없는 기쁨에 젖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人生은 그럴 수만은 없으니 문제이다. 父母가 庶民이기에 선택권 없이 주어진 庶民의 몸, 그래서 그 아이에겐 장차 身役이 기다리고 있게 된다. 그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모습은 父母의 마음을 찢어놓는 것이다. 귀한 것이 人生이지만, 너를 낳아 놓은 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넋두리는, 그 넋두리를 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처절한 심정의 표출이다.
‘셔럽다’는 한 마디는 論理的인 수십, 수백 마디의 말로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말이다. 자의적이지 못한 탄생은, 필연적일 만큼 우연성의 소치이기에 처음 그것은 경탄의 의미를 띠게 될 것이다. 그것이 ①에서의 初發聲 ‘오다(來如)’의 내포 의미가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것이 두 번째의 ‘오다’일 것이다. 그런데 生命의 확인이 達成되는 순간,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同伴하고야 만다. 세 번째의 ‘오다’는 바로 그러한 현실 인식의 부르짖음에 해당한다. ①에서의 ‘오다 오다 오다’는 이러한 경탄과 확인, 그리고 현실 인식의 표출이라 하겠다. 그것은 점층적인 반복에 해당한다. 단순한 반복이 아닌 한 발 한 발 庶民生活의 괴로움을 터득하는 과정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②는 그러한 결과의 표현이다. 결국 ‘오다’라는 표현의 점층적 반복에서 최종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셔럽다라’였던 것이다. 한편, ‘오다 셔럽다라’는 서로 대등한 입장의 나열이 된다.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 서러운 일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①과 ②는 바로 이러한 顯示的이지 못한 意味를 지닌다고 보겠는데, 風謠 전체의 顯示的인 意味網 구축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이승에 태어나게 되었고, 庶民으로 태어나게 되었고, 그리고 靈廟寺로 오게 된 ‘의내(우리들)’는 ①과 ②가 없어도 노래가 존재할 수 있듯이, 이 세상에 없어도 관계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①과 ②가 없어도 이 노래가 존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실질적으로 ①, ②가 없는 風謠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것은 ‘風謠’를 ‘風謠’的이지 못하게 만든다.
③에서의 ‘의내’는 말하자면 귀족집단 또는 支配階級에 대한 庶衆이다. 單數가 아닌 複數的 표현은 개체에 대한 ‘民’, 集團으로서의 ‘民’이기 때문이다. 개체이기를 부정하는 ‘民’이라는 말이다. 個體에의 부정은 개체로서 주어진 현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현실인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集團 속에 묻어버림으로써 個體로서의 不安感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인식의 작용이 ‘의내’로 드러났다고 하겠다.
마지막 ④의 ‘功德 닷라 오다’를 보자.
‘功德 닷라’라는 意圖形의 사용은 그러한 意圖로써 어떠한 結果를 期待하자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功德’을 닦는 일은 현실의 서러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方便에 해당한다. ③에서의 ‘의내’가 個體를 부정하였듯이 ④에서의 功德 닦는 행위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섯 번째로 사용된 ‘오다’는 앞에서 말한 바의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셔럽다라)’ 전체를 아예 부정해 버리자는 것이다. 서럽고 괴로운 現實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抵抗이나 反抗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힘이 없는 것이다. 참고 견디며 내일을 위한 功德 닦음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길이다. 風謠에서부터 庶衆의 삶은 忍苦의 삶의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
趙東一은 『한국문학통사 1』에서 이를 ‘이중의 의미’로 보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서럽더라’는 말뜻에 있다. 일하면서 사는 신세가 서럽다는 말이어서 원하지 않는 노동에 동 원되는 괴로움을 하소연했다고 보아도 좋겠으며, 민요라면 그런 하소연을 사설로 삼을 만하다. 그런데 다음 줄 의 ‘공덕’과 연결시켜 보면, ‘서럽더라’는 불교적인 의미에서 인생이 무상하다고 한 말로도 이해된다.
이와 비슷한 언급은 尹榮玉의 論及에서도 나온다. ‘風謠’는 被支配 勞役階層들의 不滿의 吐露를 露骨的으로 하기보다는 佛事와 關係지어 ‘功德修叱如良’로 糊塗해 表記한 것이라 함이 그것이다.
서러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功德 닦음이라는 忍苦의 삶으로 부각되는 것은, 마치 이별의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며, 散華功德의 축복을 바치며,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진달래꽃’의 忍苦와 類似하다.
서러움(風謠), 슬픔(진달래꽃)을 忍苦의 功德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비극적 타개 방식을 택하지 않을 때, 그것은 朴木月의 ‘나그네’와 같은 達觀의 서러움만으로 점철된다. 여기에는 脫出口가 없다. 그러나 情이 있고 풍류스러움이 일말의 慰安을 준다.
‘風謠’의 ‘오다’가 단지 生命誕生의 秘境만을 읊을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불리었다면, 徐廷柱의 ‘국화 옆에서’나 李鎬雨의 ‘開花’ 유의 노래로 불리었음 직도 하다.
陣痛을 겪고 生命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신비로움을 강조할 수 있는 자유를 ‘風謠’의 傾城士女들은 지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庶民들의 모습이었다.
功德을 닦음으로써 期待되는 結果, 그것은 來世에의 安寧일 것이다. 다섯 번이나 反復되는 ‘오다’는, 알고 보면 ‘오다’와는 상대적인 것 ‘가다’를 전제로 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오다’에서 ‘가다’까지의 공간적인 거리를 ‘功德 닦음’으로 메우려는 것이 ‘風謠’인 것이다. 功德 닦음만이 ‘오다’와 ‘가다’를 연결시켜 줄 수가 있다. 功德은 가기 위한 통로로 매개 항이 된다. 내세에 관한 관념은 유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내세를 위하여 제시 된 것이 良志다. 良志의 설화를 神秘化시킴으로써 내세에 대한 믿음을 强化시키는 것이다. 良志 설화의 神秘化는 ‘良志使錫’條의 冒頭에서부터 시작된다. ‘양지의 조상이나 고향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그런 표현이다. ‘錫杖 끝에 베주머니 하나를 걸어 놓으면~자루가 차면 석장이 날아서 돌아왔다’는 데 이르면 그야말로 ‘신기함이 대개 이와 같이 헤아릴 수가 없음’에 이른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재주가 있었고’ ‘또한 문장이 능숙하기까지 한’ 大工藝家라 했다. 良志에 대한 이러한 神秘化는 『삼국유사』의 지은이인 一然禪師의 불교적 관심에서의 강조 때문이라고 보인다.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가장 강조된 표현인 ‘오다’는,
곧 佛 如來를 指稱한 것일 것이요, 그 役事에 動員된 衆生도 功德을 쌓고 닦으면 바로 佛 如來일 수 있다는 生卽是佛의 共通眞理를 表現한 것으로도 解함직(金鍾雨, 鄕歌文學硏究)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如’가 나타내 주는 뜻은 시간·공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자체, 곧 諸法의 本體요, 如來는 如去와 같은 것으로서 如去는 如實한 이치에서 간 이를 말하고, 如來는 여실한 이치에서 왔다는 뜻이라고 한다. 如來와 如去를 상대하면 如去는 向上自利의 뜻이며, 如來는 向下利他의 뜻으로 이 두 말에 의하여 부처님의 無住涅槃을 表한다고 한다(운허용하, 佛敎辭典). 그러니까 來如(오다)는 거꾸로 하면 如來(‘오다’의 逆) 곧 向下利他가 되어 利他의 功德을 닦음으로써 如去(‘가다’의 逆) 곧 自利의 來世를 願望하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 것이겠다.
한마디로 庶民意識으로서의 서럽고 괴로운 個體 및 現世를 부정하고 功德을 닦음으로써 如來如去를 노래한 것이 ‘風謠’라는 말이다.
(참고문헌: 李雄宰, 『鄕歌에 나타난 庶民意識』, 白文社, 1990.) (13.11.2. 44 매)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세미나 [11/20-21,횡성] 발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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