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제방(百花齊放) 33] 결초보은의 풀 암크령과 수크령.hwp
[百花齊放 33] 결초보은의 풀 암크령과 수크령
이 웅 재
9월 ×일.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추석이 지나고 나니 슬슬 퇴각하기 시작하는 모양으로 제법 날씨가 선선해졌다. 그러다 보니 탄천 산보객들도 부쩍 늘었다. 특히 저녁 무렵이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나오는 어린아이들도 제법 되었다.
“아빠! 이것 좀 봐요! 여기 강아지풀이 엄청 커요!”
“그래? 정말 엄청 크구나? 이거 강아지풀이 맞긴 맞는 건가?”
어느 부자간의 대화가 들려오기에 그쪽으로 눈을 돌렸더니, 아하, 수크령이었다.
‘수크령’은 ‘수[雄]+그령’이다. 그러니까 수컷 그령인 것이다. 이놈의 꽃대는 강아지풀처럼 생겼지만, 강아지풀보다 훨씬 커서 1m가 넘는 놈들도 많이 있다. 강아지풀처럼 앙증맞지도 않고 강아지풀처럼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지도 않는다. 부들처럼 육질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핫도그 모양의 방망이를 제 딴에는 수놈처럼 꼿꼿이 세우고 있는 놈이다. 만져 보면 꺼끌꺼끌한 느낌을 주는데, 볏과 식물의 특징으로 씨앗 하나마다 기다란 털이 달려 있다.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어서 ‘길갱이’라고도 불렀고, 그 꽃대가 이리[狼]의 꼬리를 닮았다 해서 ‘낭미초(狼尾草)’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한 풀이다.
수크령이 있으면 암크령도 있으렷다? 원래는 암크령을 ‘그령’이라고 했다. 그런데 풀잎의 줄기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꽃대가 꼭 수컷을 닮은 놈을 ‘수크령’으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엄격하게는 ‘그령(곧 암크령)’과 ‘수크령’은 같은 종(種)으로서의 암수 개념의 풀이 아니다. 암크령과 수크령은 종 자체가 완전히 다른 풀이다. 수크령 때문에 ‘그령’이 ‘암[雌]’ 자 하나를 덧붙이게 되었을 뿐이다. 보기에는 수크령이 더 의젓하고 멋져 보이지만, 영어나 한자 이름으로는 암크령이 훨씬 낭만적이다. 암크령의 영어명은 ‘Korean Lovegrass’(한국의 사랑초)이고, 한자명은 ‘지풍초(知風草: 바람을 아는 풀)’이다. 지풍초란 이름은 아마도 그 풀의 잎이 선형(線形)이고 질겨서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줄기가 갈라지지는 않지만, 여러 대가 한 군데에서 자라나 큰 포기를 이루고 있는 풀로 아주 무성하게 자라는 특성이 있다.(사진의 앞쪽 강아지풀을 닮은 놈이 수크령, 뒤쪽의 성긴 꽃을 달고 있는 것이 그령, 곧 암크령이다.)
이 풀은 어렸을 때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풀이다. 마차의 바퀴가 지나간 곳은 땅이 조금 움푹 파였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약간 둔덕이 져서 높은데, 바로 그 높은 부분에 길고 질긴 풀잎을 무성하게 자랑하는 놈이다. 사람들은 마차의 바퀴가 지나간 부분으로 걸어다니는데, 심술꾸러기들은 양쪽의 무성한 풀줄기를 서로 묶어놓아서 다른 친구가 거기에 걸려 넘어지면 좋아라고 깔깔거리던 추억거리를 가져다주던 풀이었다. 줄기가 질길 뿐만 아니라 뿌리도 땅 속에 아주 단단하게 박혀 있어서 묶어놓은 풀이 끊어지는 일은 별로 없기에 장난을 치기에 아주 걸맞았다. 그렇게 장난을 치면서 노는 가운데, 우리는 옛날 사람들과 관련된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무의식중에 실행해 보는 것이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이야기이다. 진(晋)의 위무자(魏武子)는 병이 들자, 아들 위과(魏顆)에게 유언을 한다. 자기가 죽으면 아름다운 후처인 애첩 조희(祖姬), 즉 위과의 서모(庶母)를 친정으로 보내 개가(改嫁)시켜 순사(殉死)를 면하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그 후 위무자는 병세가 악화되어 정신이 혼미해지게 되었다. 위무자는 위과에게 유언을 번복한다. 자기가 죽으면 후처 곧 위과의 서모를 순장(殉葬)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죽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위과는 정신이 혼미했을 때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서모를 개가시켜 순사를 면하게 해 달라는 처음의 유언을 따라 서모를 개가(改嫁)시켜 드렸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당신 서모의 애비되는 사람이오. 그대가 내 딸을 순장하지 않고 개가(改嫁)할 수 있게 하여 주어서 지금 내 딸은 잘 살고 있소. 그래서 그대의 은혜를 보답(報恩)한 것이오.” 여기서 생긴 고사성어가 바로 ‘결초보은(結草報恩)’이고 이에 등장하는 풀이 그령이었다.
그령은 외떡잎식물 벼목 화본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서 소나 말의 먹이로 사용되기도 한다. 결초본은의 고사와 관련된 풀이라서 결초보은풀이라고도 하며, 세속에서는 지지랑풀, 지렁풀이라고도 한다. 이 풀로서 풀공예품으로 방석, 삼태기를 삼기도 한다.
(2013.9.25. 원고지 15매)
'계절의 문턱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산둘레길2,14.4.8. (0) | 2014.04.25 |
---|---|
[백화제방(百花齊放) 35] 로제트(rosette) 식물 질경이 (0) | 2014.03.20 |
[백화제방(百花齊放) 31] 서양등골나물 (0) | 2014.02.19 |
백화제방(百花齊放) 30. 때죽나무 (0) | 2014.02.18 |
천연 비아그라 야관문[百花齊放 34] (0) | 2014.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