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화장발

거북이3 2014. 9. 29.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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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발

                                                                                                                                           이 웅 재

  여자들의 수다란 수다를 떠는 사람들 자신도 신나는 일이지만, 그것을 옆에서 몰래 엿듣는 사람에게도 짭짤한 흥밋거리이기도 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걸 어떻게 혼자만 알고 있으란 말인가? “갑돌이와 갑순이는 물레방아 간에서 어쩌구저쩌구….” 한쪽이 수다를 떤다. “그래? 그래서….” 듣는 쪽에서도 맞장구를 쳐줘야 수다 떨 맛이 나는 법이다. ‘도대체 무슨 얘기들이지?’ 그걸 엿듣는 사람까지 있다면, 수다의 3박자가 다 갖춰지는 셈이다. TV 프로에서 ‘미녀들의 수다’ 등 수다 떠는 프로가 인기인 것도 바로 시청자가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위키 백과에 나오는 ‘수다(Suda)’라는 말은 고대 지중해 세계를 30,000여 항목으로 다루고 있는 아주 큰 분량의 10세기 비잔틴 백과사전인데, 이 책의 내용은 문학사에 대한 항목들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중요하게 여길 만한 내용은 없다고 하니, 어쩌면 여인들의 ‘수다’의 성격도 그와 비슷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채신머리’ 없게 요새 TV 프로에서의 수다에서는 심심찮게 남자들도 끼어들고 있어 입맛을 씁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내와 딸내미가 전화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딸내미 얘기가 오래간만에 화장을 하고 옷도 골라 입고 애들을 데리러 갔더니, 그만 애들이 엄마를 못 알아보고 그냥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딸내미는 그동안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니는 외손녀, 외손자 때문에 직장인 고등학교 교사직을 휴직하고 지내고 있었는데, 가사 일에만 전념하다 보니 최근에는 화장을 별로 하지 않고 민낯으로만 지냈었던 것이다. 화장발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일이다.

  ‘화장발’의 사전적인 뜻은 ‘화장(化粧)을 하여 실제보다 예쁘게 보이는 효과’다. 딸내미의 수다를 듣고 보니, 여자들이 ‘화장발’에게 꼼짝 못하고 매여 사는 것은 당연지사일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다. 구글 검색에서 ‘화장발’을 검색하여 보았더니, 네이버 카페 ‘화장발’을 즐겨 찾는 멤버가 27,615명이라고 나오는 것을 보고 ‘화장발’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기도 했다. 역시 구글 검색에서는 ‘성형보다 무섭다는 화장발’이라는 미주 중앙일보의 기사도 대할 수가 있었다.

  러시아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바딤 안드리브(Vadim Andreev)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비포 앤 애프터(Before & After) 시리즈가 화제라는 것이다. 화장을 하기 전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쌩얼’과 화장을 끝마친 상태의 두 모습을 촬영해 올린 사진들로서, 그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성형하지 않고 화장만으로 이렇게 변한다는 것이 놀랍다”면서 화장에 따라 달라지는 여성의 얼굴에 선거움을 표했다고 한다. 네이버 통합검색에서는 ‘아이유 민낯 공개, 누가 아이유 화장발이랬어?’라는 글도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화장’이란 낱말의 다른 뜻도 몇 개 더 알아보자. 화장(火杖)은 ‘부지깽이’이고, ‘화장(畵匠)’은 ‘화가(畵家)’를 가리키는 말이요, ‘화장(火匠)’은 ‘배에서 밥 짓는 일을 맡은 사람’이나 ‘도자기 가마에 불을 때는 사람’이란다.

  그런데 정작 여성들마저도 서울 청담동에 ‘화장품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코리아나화장품에서 관리하고 있는 복합문화공간인 ‘스페이스 씨(SPACE C)’가 그것인데, 지하 2층, 지상 7층 건물로 분(粉)접시, 유병(油甁), 향합(香盒), 노리개 등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 여성들이 쓰던 각종 유물 6백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이 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화장품 박물관이다. 여기에는 조선조 후기 안정복(安鼎福)이 쓴 ‘여용국전(女容國傳)’이라는 가전체(假傳體) 작품도 전시가 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여용국전’은 여자의 얼굴[女容]을 나라로 비유하여 여자의 화장과 관련된 내용을 재미있게 쓴 글이다. 단정한 얼굴을 가리키는 효장황제(孝莊皇帝)를 동원청(銅圓淸:구리거울)이라는 재상이 15명의 중요한 신하와 함께 보필하고 있었다. 임금은 매일 아침 이들을 능허대(凌虛臺: 경대)로 소집하여 국정을 의논한다. 그 신하들은 주연(朱鉛: 臙脂), 백광(白光: 粉), 양수(楊樹: 칫솔), 관정(盥淨: 세숫대야), 포세(布洗: 수건), 포엄(布掩: 揮巾), 마영(磨零: 비누), 방취(芳臭: 향수), 윤안(潤顔: 곤지), 백원(白圓: 분첩), 납용(蠟容: 납기름), 섭강(鑷强: 족집게), 차연(釵延: 비녀), 소쾌(梳快: 얼레빗), 소진(梳眞: 참빗) 등인데 모두 이름은 한자어로 사용하였다.

  처음 황제는 늘 이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나라가 태평하자 점차 교만하고 안일해져서 아침마다 시행하던 능허대 조회까지 거르는 등 화장을 하지 않기에 이르러 사방에서 도적들이 봉기하였다. 도적들의 괴수는 구리공(垢裏公: 때)인데 이들은 먼저 광이산(廣耳山: 귀)을 점령하고, 나중에는 오악산(五嶽山: 이마 · 턱 · 코 · 좌우 광대뼈)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슬양(머릿니)은 임금의 머리에서 세력을 떨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에 소쾌와 소진이 나아가 슬양(虱癢: 이)을 잡는 등 공을 이루어 황제는 이들을 크게 상주고, 나라는 다시 아름답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화장도구를 의인화한 가전으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치세에 힘쓰면 나라가 태평해지고, 나태하고 안일해지면 나라가 어지러워 위태롭게 된다는 치국(治國)의 요체를 풍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화장이란 바로 여자들의 얼굴 가꾸기요, 나라 다스리기인 셈이다.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가르침을 선인(先人)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14.9.23,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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