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81) 최초로『소학』을 번역했던 청백리 최숙생(崔淑生).hwp
경북 인물열전 (81)
최초로『소학』을 번역했던 청백리 최숙생(崔淑生)
[大東野乘 第19卷 海東雜錄 1 崔淑生 條]
이 웅 재
최숙생(崔淑生: 1457∼1520)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진(子眞). 호는 충재(盅齋)이다. 최유량(崔有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저(崔渚)이고, 아버지는 최철중(崔鐵重)이며, 어머니는 이계손(李繼孫)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496년(연산군 2)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수찬·지평·헌납 등을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응교(應敎)로 있을 때 연산군이 생모에 대하여 상복을 다시 입으려 하자, 이행(李荇)과 함께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문제가 되어 장(杖) 60을 맞고 황해도 신계(新溪)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그해 9월 다시 응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15일 자 『조선왕조실록』의 1번째 기사를 보면, 그는 철저한 억불론자로서, 조강(朝講)에 나온 임금께 다음과 같이 아뢴다. “도성 안의 원각사(圓覺寺) 등과 같은 절은 이미 폐지되었으나, 영원히 다시 세우지 말 것을 마땅히 다시 하교하소서. 승도(僧徒)들이 부세를 도피하고 부역을 모면하여 유교에 해가 되니 통절히 뿌리를 뽑으소서.”
1508년(중종 3) 3월 10일 2번째 기사에서도 주강(晝講)에 나온 임금에게 아뢴다.
“요즈음 민간에서 후하게 장사지내는[厚葬] 폐단은 없어지고, 다만 무당이나 음사(淫祀)만을 믿어, ‘야제(野祭)’라고 일컫고 있으며, 또 불사(佛事)를 베풀어 재산을 다 없애 가면서 귀신에게 빌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엄하게 금지해야 하는데, 반드시 위에서 먼저 스스로 금지한 후에라야 백성들이 곧 본받을 것입니다. 국가에서 조종(祖宗) 때로부터 기신재(忌晨齋: 왕이 忌日에 올리는 佛事)를 설치한 것은 예절에 어긋난 행사입니다.”
그해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하고 대사간·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대동야승』 10권 「기묘록 보유 권상(己卯錄補遺 卷上)」의 「최숙생 전(崔淑生傳)」에서도 그의 억불책을 서술하고 있다.
“그가 대사헌으로 지낼 때의 일이다. 도성 안에 거주하는 무녀들을 잡아들여 동ㆍ서활인서(東西活人署)에 가두어 버리고, 성 남쪽의 이사(尼舍=尼寺: 여승방)를 철거하고 불상까지 허물어서, 여승들이 도성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규제를 벗어난 사대부의 집도 철저히 찾아 죄를 다스리고 간가(間架: 집의 칸살의 얽이)를 철거하는 등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으면서 조금도 아부하지 아니하니, 조정과 저잣거리가 모두 삼가고 두려워하여 금령(禁令)을 범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1518년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그런데 그 7월 8일자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보면 헌부(憲府)에서 그의 직임을 갈도록 임금께 아뢰는 기사가 나온다.
“최숙생을 특지로 찬성에 제수하셨으니…찬성은 ‘삼공(三公)에 다음하여 교화를 넓히는’ 소임입니다. 이 소임에 제수하는 이는 여기에 그칠 뿐만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인망을 길러 대임(大任)에 오르게 하는 것이니, 숙생은 재능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아마도 그가 누구보다도 꼿꼿한 청백리였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우찬성에 보임되기 5년 전인 1513년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직을 제수받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의 세도가 김안국(金安國)의 동생인 김정국(金正國)의『사재척언(思齋撫言)』을 보면, 최숙생이 얼마나 기개가 있는 청백리였는지를 알 수가 있는 얘기가 나온다.
“이세정(李世精)은 경학(經學)에 정통하였으나 과거에 여러 번 실패하고 선비들을 가르쳤는데, 이장곤ㆍ성몽정(成夢井)ㆍ김세필ㆍ김안국이 모두 수업하였다. 성품이 소탈하고 졸직하였으며 재간이 없었으나 한 때 수업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천거하여 청양 현감(靑陽縣監)에 임명되었다. 공이 새로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자 수학했던 제공들이 문 밖에 나와 전별하면서 청양 현감 이세정의 일로 부탁하기를, ‘우리 스승은 학문과 맑은 지조가 있는 분이니 부디 고과(考課)할 때 치적의 등급을 함부로 깍아내리지 말라.’ 하니, 공이 알았다고 하고 갔다. 그러나 부임해서 첫 번째 고과에 이세정은 하(下)를 맞아 파직되어 돌아갔다. 공이 체직되어 돌아오자 세 김씨(金世弼, 金安國, 金正國을 가리킴)가 공에게 가보고 말하기를, ‘…공의 고과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하니, 말하기를, ‘다른 고을의 원은 아무리 교활해도 도적은 하나뿐이라 백성들이 오히려 견딜 만하나, 청양 현감은 비록 청렴하나 여섯 명의 도적(여섯 아전)이 밑에 있어서 백성들이 견딜 수 없다. 게다가 뱃속이 텅 빈 사람이 어찌 한 고을을 다스리겠는가.’ 하자, 김정국이 말하기를, ‘이공 뱃속에 육경(六經)이 꽉 차 있는데 어째서 뱃속이 텅 비었다고 하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공 등이 이씨 뱃속의 육경을 모두 나누어서 자기들 뱃속을 채워 이로써 과거에 급제했으니, 이씨의 배가 아무리 크다 한들 남은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이러한 최숙생에게 김안국은 불쾌해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관리들을 감찰하는 대사헌에 추천했던 것이다.
1519년에는 사은사(謝恩使)를 거절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판중추부사로 복직되었으나, 이해 기묘사화로 다시 파직된 후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시문에 능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사륙체(四六體)에 능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충재집』이 있으며, 1518년(중종 19년)에 김전(金詮)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소학』을 번역을 『번역소학』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5.8.3.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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