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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열하일기』가 있게 만들어 준 요인들

거북이3 2016. 7. 30. 01:20


오늘의 『열하일기』가 있게 만들어 준 요인들(수필문학 16.8월호 게재의 요약본).hwp



            오늘의 『열하일기』가 있게 만들어 준 요인들

                             (“수필문학” 하계 세미나에서 발표한 “燕巖 朴趾源의 『熱河日記』를 생각한다”를 1/3로 요약 정리한 것임.)

                                                                                                                                                            이 웅 재

   연암의 성가(聲價)는 논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일 먼저 “열하일기”의 저자라는 점을 꼽을 것이다. 수필가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열하일기” 속의 ‘일신수필(馹迅隨筆)’이 처음 쓰인 (1780년) 7월 15일이 ‘수필의 날’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780년 08월 14일(월요일)이다. 수필의 날을 맞아 『열하일기』가 있게 된 요인을 한 번 생각해 본다.

1. 자제군관이라는 신분

   과거 보기도 단념한 연암은 가난한 삶을 이어가던 중, 44세 때인 1780년 진하사(進賀使) 정사(正使)인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연경엘 따라갔다.

  정사는 통상 4명까지의 군관을 거느리고 갈 수 있었고, 자제군관이라고 하여 손아래 친인척을 기용할 수도 있었다. 연암은 그

 자제군관이었다. 정식 수행원이 아니었기에 공식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 바로 “열하일기”를 저술할 수 있

게 했던 것이다. “일신수필” 7월 17일 자를 보자.

   쌍림은, “그러면 사점(四點)인가요?” 한다. 수역(首譯)은, “아니오, 정사 대감의 적친(嫡親) 삼종형제(三從兄弟)입죠.” 하니, 쌍림은, “그럼, 이량위첸[伊兩羽泉]이구먼.”한다. ‘이량위첸’이란 중국말로 한 냥 닷 돈을 말한다. 한 냥 닷 돈은 곧 양반(兩半)이라,…양반(兩半)과 양반(兩班)이 음이 같으므로…은어(隱語)를 쓴 것이다. 사점(四點)이란 서(庶) 자이니 우리나라 서얼(庶孼)을 두고 말함이다.(李家源 역, 熱河日記‧上, 盛京雜識, 7월 11일, 大洋書籍, 1973.5.20, p.205. 이하 李家源이라 약칭함.)

   얼핏 김삿갓 유의 언어유희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표현은 점잖은 양반님네들의 글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다.

2. 요령과 핵심을 잡은 글짓기

   연암이 처음 벼슬길에 나간 것은 50세 때(1786년)이었다. 친구인 이조판서 유언호(兪彦鎬)의 천거로 선공감 감역을 제수 받은 이후, 한 때 사헌부 감찰로 전보된 적도 있었으나 중부 사헌(師憲)의 함자와 같아서 상피하여 나아가지 않았고, 제릉 영(齊陵令)을 거쳐 한성판관, 안의현감을 지낸 후, 61세에는 면천군수, 이듬해 양양부사를 마지막으로 벼슬길을 그만두었다. 한마디로 그는 고관대작의 벼슬은 한 적이 없다. 이것이 연암으로 하여금 벼슬길에 나간 후에도 특유의 자유분방한 필치를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일 것이다. 더구나 “열하일기”는 벼슬길에 나가기 이전의 글이다.

   “열하일기”의 편명 ‘일신수필’의 ‘馹’은 ‘역말’, ‘迅’은 ‘빠르다’는 뜻이다. ‘일신수필’이란 ‘빠르게 달리는 말을 타고 가면서 일별한 광경들을 붓 가는 대로 기록한 글’이겠는데, 그러한 일들을 한문으로 이처럼 소상하게 기록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연암집” 제1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에는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란 글이 있다. 글을 짓는 일을 병법에 비유해서 설명한 글인데, 이에 의하면 ‘일신수필’은 정면의 적을 향해 빠른 속도로 곧바로 진격하면서, 그 좌우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경관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보거나 겪은 내용을 적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진실로 그 이치를 얻는다면 집안사람의 일상 이야기도 오히려 학관(學官)에 나란히 할 수 있고, 어린아이들의 노래나 마을의 상말도 또한 “이아爾雅”에 넣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진실로 능히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게 되면 마치 눈 오는 밤에 채(蔡) 성을 침입하는 것과 같고, 토막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면 세 번 북을 울리고서 관(關)을 빼앗는 것과 같게 된다. 글을 하는 도가 이와 같다면 지극하다 할 것이다(연암집 제1권 연상각선본 소단적치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집안사람의 일상 이야기’나 ‘어린아이들의 노래나 마을의 상말’도 얼마든지 훌륭한 글이 될 수 있으며,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게 되’거나 ‘토막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 글은 지극한 경지에 오른 것이라는 말이다. 연암의 글이 바로 그렇다.

3. 이용후생적인 관점

   “연암소설연구(燕巖小說硏究)”(乙酉文化史, 1984년, 4판)에서 이가원은 “열하일기”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관상(觀賞)은 오로지 승지(勝地)‧명찰(名刹)에 그친 것이 아니었고, 특히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면에 중점을 두어, 수많은 연행문학(燕行文學) 중에서 백미적(白眉的)인 위치를 독점하였으며,…”(p.21.)

   연암은 보고 대하는 새로운 문물 하나하나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도강록(渡江錄)’ 7월 12일자 기사를 보자. 연암은 자기가 잠이 든 사이에 마두(馬頭) 창대(昌大)가 낙타를 본 것 같다고 말하자 왜 알리지 않았느냐고 다그친다. 창대가 말한다.

   “그때 코고는 소리가 천둥치듯 하와 불렀사오나 아니 깨시는 걸 어찌하오리까?”…

   “이담엘랑 처음 보는 물건이 있거든 비록 졸 때거나 식사할 때거나 반드시 알리렷다.”(李家源, p.155.)

   연암은 이틀 밤이나 잠을 설쳤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새로운 문물 하나하나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용후생적인 면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를 우리는 흔히 ‘북학론’이라고 부른다.

연암의 실사구시적인 견해는 “열하일기”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는 연행에서 관심 깊게 보고 확인했던 바의 베틀, 용골차(龍骨車), 용미차(龍尾車) 물레방아 등 여러 기구를 귀국 후 제조, 시험해 보이기도 했었다. 연암은 특히 수레에 관심이 깊었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인식했던 셈이다.

4. 삼종형 박명원

   “열하일기” ‘막북행정록 가을 8월 5일’ 자의 기사를 보면, 연경까지 오는 데에도 온갖 고초를 겪어 온 몸이 녹초가 된 상태인데다가 다시 청의 황제가 피서차 열하에 가 있다고 해서 연암이 갈까 말까 주저하고 있을 때에, 삼종형 박명원이 적극 권하는 바람에 따라나서게 된다. “열하일기” 전체를 통하여 박명원에 대한 기사는 별로 없다. 하지만 그는 “열하일기”가 쓰도록 만들어준 가장 큰 공로자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첫째 먼 길을 겨우 쫓아 와서 안장을 끄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피곤이 가시지 않은데다가 다시 먼 길을 떠남은 실로 견딜 수 없는 노릇이요, 둘째는 만일 열하에서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황경(皇京) 구경이 낭패가 되는 것이다. 전례에 황제가 우리나라 사행을 각별히 생각하여 빨리 돌아가도록 분부한 특별 은전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십중팔구는 바로 돌려보낼 염려가 없지 않다 하고 내가 주저하던 차에, 정사가 나더러, “자네가 만 리 연경을 멀다 않고 온 것은 널리 구경하고자 함이거늘, 이제 열하는…좀처럼 얻기 어려운 기회이니 꼭 가야만 할 것이 아닌가?” 하기에, 나는 드디어 가기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정사 이하로 직함과 성명을 적어서 예부로 보내어 역말 편에 먼저 황제에게 알리기로 하였으나, 나의 성명은 단자(單子) 속에 넣지 않았으니, 이는 별상(別賞)이 있을까 보아서 피혐(避嫌)한 것이었다.(‘李家源’ pp.309-310.)

   그렇게 하여 열하로 가게 되었는데, 연경까지의 노정도 험난했지만 열하로 가는 길은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더욱 간험(艱險)했다. 박명원이 아니었더라면 연암은 열하로 가는 일을 포기했을 것이고, “열하일기”는 쓰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5. 술

   고난이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때에는 고난 그 자체로 남아있게 마련이지만, 극복하고 나면, 그것은 하나의 시련, 말하자면 자신을 단련시켜 주는 훌륭한 기제(機制)로 작용할 수가 있게 된다. 연암은 바로 눈앞에 닥친 고난을 나름대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매체는 바로 술이었다.

   연암은 젊은 시절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산수를 유람할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연암협(燕巖峽)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간혹 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술로 괴로움을 잊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현실도피로서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고 할 수가 있겠지마는, 술로써 삶의 진취(眞趣)를 찾아 괴로운 현실도 즐거운 삶으로 환치시킬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면 나무랄 일만은 아니라고 할 수가 있다. 연암과 술에 대한 일화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라서 여기에서는 줄이기로 한다.

6. 정조

   흔히들 정조는 연암의 글을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라고 하여 남공철을 내세워 질책을 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루는 임금님께서 규장각 직각(直角) 남공철(南公轍)에게 다음과 같은 분부를 내리셨다.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結者解之)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蔭職)으로 문임(文任)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즉시 편지를 써서 나의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하라!”(朴宗采, p.106~107.)

   박종채는 이러한 임금의 분부는 연암의 글을 폄하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박제가(朴齊家)나 이덕무(李德懋)의 글을 두고 ‘연암의 문제를 본떴’다고 했다든가, 이미 “열하일기”를 보았다고 하는 말 등은 연암 특유의 자유분방한 필치를 조금이라도 더 순정문학(醇正文學) 쪽으로 유도해 보자는 의도였을 뿐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50세가 된 연암에게 벼슬을 제수한 일만 보더라도 그의 말이 미화한 것만은 아님을 알 수가 있겠다.

7. 홍국영의 실각

   황해도 금천(金天) 연암(燕巖)골은 박지원이 호로 삼기까지 한 곳이다. 그가 연암골로 들어간 때는 42세 때다. 연경에 가기 이태 전이다. 그가 연암골로 들어간 직접적인 원인은 권세가 홍국영(洪國榮)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유언호(兪彦鎬)는 연암을 위해 개성유수로 부임했다. 하루는 그가 조정 하례에 참여하여서는 일부러 당대인의 문장을 평하면서 연암에 관해 말했다.

   “인생의 궁달(窮達)은 알 수 없는 것이외다. 박지원이 당시에 어떠했습니까? 내가 개성에 가서 들으니 가족을 이끌고 떠돌아다니다가 그만 부잣집에 눌러앉아 늙은 훈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군요.”

이 말에 홍국영은 껄껄 웃으며, “참으로 형편없이 됐으니 논할 것도 없구려.”라고 하였다. 유공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제야 자네가 화를 면하게 됐네.”(朴宗采, p.40.)

   연암이 열하로 가기 전후의 일을 정리해 보자.

   박지원은 42세 때(1778년) 연암골로 들어갔다. 이듬해 홍국영이 정계에서 쫓겨났다. 다시 그 다음해 연암은 서울로 돌아와 서대문 밖 평계(平溪)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연행이 이루어졌다.

이듬해(1781년) 홍국영이 죽었다. “열하일기”는 하마터면 세상에 탄생하지 못할 뻔했다.

8. 나가는 말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열하일기”는 그렇게 세상에 남았다. 삶에 기복이 없을 때라고 마냥 안심하지만 말고 미리미리 위험에 대비하여야 하고, 위험이 찾아왔다고 해서 낙담만 해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내일을 기약하여 더욱 분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것을 잊고 지낸다. 다시금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그런 진리를 재삼 확인하였다.(3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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