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
이 웅 재
“지금 몇 시지요?”(청중에게 물었다.)
“열두 시 이십이 분인데요.”(돌아오는 대답)
“이상하지 않나요?”(조금 뜸을 들이고)
“이상한 점 두 가지가 있지 않나요?”(역시 또 조금 뜸을 들이고)
“첫째, 자기도 시계를 차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일이 이상하지요. 그런데 그건 얘길 풀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습니다. 그걸 인정을 하고 나도 이상하긴 마찬가지가 아닌가요?”(청중은 무엇이 이상하다고 하는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이제 슬슬 얘기를 풀어나갈 차례가 되었다.)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발상의 전환
이 웅 재
“지금 몇 시지요?”(청중에게 물었다.)
“열두 시 이십이 분인데요.”(돌아오는 대답)
“이상하지 않나요?”(조금 뜸을 들이고)
“이상한 점 두 가지가 있지 않나요?”(역시 또 조금 뜸을 들이고)
“첫째, 자기도 시계를 차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일이 이상하지요. 그런데 그건 얘길 풀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습니다. 그걸 인정을 하고 나도 이상하긴 마찬가지가 아닌가요?”(청중은 무엇이 이상하다고 하는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이제 슬슬 얘기를 풀어나갈 차례가 되었다.)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열두 시라고 했으면 당연히 스물두 분이라고 했어야 할 것이고, 이십이 분이라는 표현을 쓰려면 시간을 나타내주는 말도 십이 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일관성 있는 표현이 아닌가요?”(그제야 청중은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제부터 하고 싶은 얘기가 전개된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같은 컴퓨터의 경우라면 언어표현에서의 일관성은 틀림없이 지켰을 것입니다. 나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관전평 중에서 가장 섬뜩한 생각을 별 일도 아닌 듯이 덤덤히 말하는 사람(“이음새문학회”의 이윤협 씨)을 보고 ‘정말로’ 놀랐습니다. 이세돌이 이긴 네 번째 판, 그는 말했습니다.
“그건 알파고의 계산된 패배라구요.”
‘정말로’ 그렇다면, ‘정말로’ 큰일이 아닐까요?
이제는 우리도 모든 걸 바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현상을 무조건 수용하려고만 하다가는 알파고에게서처럼 치욕스런 패배감만을 느낄 수밖에는 없게 됩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새로움이 보입니다. 일상적이었던 일도 일상이 아닌 특별한 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요, 당연시되었던 일도 의혹이 일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겨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시각이 열릴 수도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참신성’이란 사실 별 것이 아닙니다. 생각만 바꾼다면 ‘참신성’은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입니다.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치풍토, 좀 바꿔보면 안 될까요? 아니, 정치뿐만이 아니라 경제,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수필쓰기에서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비틀어보기, 뒤집어보기, 거꾸로보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요즈음은 어디서나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고, 그래서 얻어질 수 있는 ‘참신성’을 ‘하느님처럼’ 떠받들고 지냅니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해 볼까요? 모든 걸 다 바꿔야만 할까요?
선생님도 바꾸고 사장도 바꾸고…, 아니, 아빠도 바꾸고 엄마도 바꾸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예 남편도 바꾸고 아내도 바꿔봄은 어떨까요? 하긴 과거에 비하면 최근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바꿈’의 유행 때문은 아닐는지요?
바꿈은 중요합니다. 발상의 전환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다시 둘러서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왜 ‘열두 시 이십이 분’라고들 말하는지요? 어째서 그런 일관성 없는 표현들을 하는지요? 그리고 그것을 왜 이상하게들 생각하지 않는가요? 그것은 순전히 ‘관습’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시각(時刻)’이라는 말을 썼지요. 여기서 ‘각’이란 1시간은 4개로 쪼갠 개념입니다. 그 이하의 ‘분’ 단위의 시간은 표현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 단위의 시간 표현은 서양에서의 표현 방법을 차용해서 아라비아 숫자로 말하게 되었지만, 시간은 예로부터 쓰던 방식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이 점점 굳어져서 하나의 관습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관습, 그건 무서운 것입니다. 그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습, 그것은 곧 ‘전통’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새로움’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을 무시해야만 ‘새로움’이 생기는 것일까요? 과거와의 비교를 전제로 하여야만 ‘새로움’이란 말도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요? ‘전통’을 무시하고서는 ‘새로움’도 ‘참신성’도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상생’의 원리 속에서 존재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최근 들어 너무 ‘참신’이나 ‘새로움’만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숲’은 키 큰 나무도, 키 작은 나무도, 아니 나무뿐만 아니라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름 없는 각종 풀도 함께 어우러져 있어야만 합니다. 키 작은 나무, 이름 없는 풀이라 하여 필요가 없을 수가 있을까요? 그런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키 큰 나무’를 ‘키 큰 나무’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기름진 토양, 신선한 공기 또한 필요로 하지 않을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뭄에 바짝바짝 타 들어갈 때의 나무들을 보십시오. 시원하게 내리퍼붓는 빗줄기는 또 얼마나 고마운 존재이던가요? 심지어는 그들의 몸(가지나 잎)을 갉아먹는 벌레들조차도 나중에 나비나 벌이 되어 그들의 ‘대 이어감’을 도와주고, 그래서 온전히 ‘숲’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필수불가결의 엑스트라들이 아니던가요?
기존의 사회질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그 ‘기존’에만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새로움’을 창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통’과 ‘창조’, 우리는 그것을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인식하고들 있지만, 그들 중 어느 한 쪽이 결여되면 다른 한 쪽도 존립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는 쌍륜이며 양익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예전에도 흔히들 거론되던 내용입니다. 가깝게는 연암 선생의 ‘법고창신’이 그렇고, 더 올라가서는 고려시대의 삼혹호선생 이규보의 ‘용사(用事)와 신의(新意)’가 그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발상의 전환’을 했을 뿐입니다.
(16.9.30. 17매. 종로 3가 한일장, “국제문예” 9월 월례회에서 발표.)했으면 당연히 스물두 분이라고 했어야 할 것이고, 이십이 분이라는 표현을 쓰려면 시간을 나타내주는 말도 십이 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일관성 있는 표현이 아닌가요?”
(그제야 청중은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제부터 하고 싶은 얘기가 전개된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같은 컴퓨터의 경우라면 언어표현에서의 일관성은 틀림없이 지켰을 것입니다. 나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관전평 중에서 가장 섬뜩한 생각을 별 일도 아닌 듯이 덤덤히 말하는 사람(“이음새문학회”의 이윤협 씨)을 보고 ‘정말로’ 놀랐습니다. 이세돌이 이긴 네 번째 판, 그는 말했습니다.
“그건 알파고의 계산된 패배라구요.”
‘정말로’ 그렇다면, ‘정말로’ 큰일이 아닐까요?
이제는 우리도 모든 걸 바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현상을 무조건 수용하려고만 하다가는 알파고에게서처럼 치욕스런 패배감만을 느낄 수밖에는 없게 됩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새로움이 보입니다. 일상적이었던 일도 일상이 아닌 특별한 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요, 당연시되었던 일도 의혹이 일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겨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시각이 열릴 수도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참신성’이란 사실 별 것이 아닙니다. 생각만 바꾼다면 ‘참신성’은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입니다.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치풍토, 좀 바꿔보면 안 될까요? 아니, 정치뿐만이 아니라 경제,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수필쓰기에서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비틀어보기, 뒤집어보기, 거꾸로보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요즈음은 어디서나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고, 그래서 얻어질 수 있는 ‘참신성’을 ‘하느님처럼’ 떠받들고 지냅니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해 볼까요? 모든 걸 다 바꿔야만 할까요?
선생님도 바꾸고 사장도 바꾸고…, 아니, 아빠도 바꾸고 엄마도 바꾸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예 남편도 바꾸고 아내도 바꿔봄은 어떨까요? 하긴 과거에 비하면 최근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바꿈’의 유행 때문은 아닐는지요?
바꿈은 중요합니다. 발상의 전환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다시 둘러서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왜 ‘열두 시 이십이 분’라고들 말하는지요? 어째서 그런 일관성 없는 표현들을 하는지요? 그리고 그것을 왜 이상하게들 생각하지 않는가요? 그것은 순전히 ‘관습’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시각(時刻)’이라는 말을 썼지요. 여기서 ‘각’이란 1시간은 4개로 쪼갠 개념입니다. 그 이하의 ‘분’ 단위의 시간은 표현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 단위의 시간 표현은 서양에서의 표현 방법을 차용해서 아라비아 숫자로 말하게 되었지만, 시간은 예로부터 쓰던 방식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이 점점 굳어져서 하나의 관습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관습, 그건 무서운 것입니다. 그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습, 그것은 곧 ‘전통’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새로움’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을 무시해야만 ‘새로움’이 생기는 것일까요? 과거와의 비교를 전제로 하여야만 ‘새로움’이란 말도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요? ‘전통’을 무시하고서는 ‘새로움’도 ‘참신성’도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상생’의 원리 속에서 존재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최근 들어 너무 ‘참신’이나 ‘새로움’만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숲’은 키 큰 나무도, 키 작은 나무도, 아니 나무뿐만 아니라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름 없는 각종 풀도 함께 어우러져 있어야만 합니다. 키 작은 나무, 이름 없는 풀이라 하여 필요가 없을 수가 있을까요? 그런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키 큰 나무’를 ‘키 큰 나무’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기름진 토양, 신선한 공기 또한 필요로 하지 않을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뭄에 바짝바짝 타 들어갈 때의 나무들을 보십시오. 시원하게 내리퍼붓는 빗줄기는 또 얼마나 고마운 존재이던가요? 심지어는 그들의 몸(가지나 잎)을 갉아먹는 벌레들조차도 나중에 나비나 벌이 되어 그들의 ‘대 이어감’을 도와주고, 그래서 온전히 ‘숲’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필수불가결의 엑스트라들이 아니던가요?
기존의 사회질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그 ‘기존’에만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새로움’을 창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통’과 ‘창조’, 우리는 그것을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인식하고들 있지만, 그들 중 어느 한 쪽이 결여되면 다른 한 쪽도 존립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는 쌍륜이며 양익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예전에도 흔히들 거론되던 내용입니다. 가깝게는 연암 선생의 ‘법고창신’이 그렇고, 더 올라가서는 고려시대의 삼혹호선생 이규보의 ‘용사(用事)와 신의(新意)’가 그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발상의 전환’을 했을 뿐입니다.
(16.9.30. 17매. 종로 3가 한일장, “국제문예” 9월 월례회에서 발표.)
'강연, 강의, 논문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사화집(2016년 제26호) 평설 (0) | 2016.10.22 |
---|---|
대단하다 (0) | 2016.10.21 |
거짓말의 빛깔 (0) | 2016.09.05 |
오늘의 『열하일기』가 있게 만들어 준 요인들 (0) | 2016.07.30 |
燕巖 朴趾源의 『熱河日記』를 생각한다 (0) | 2016.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