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지하철 풍경 하나

거북이3 2017. 4. 1. 10:38

  

4.1.지하철 풍경 하나.hwp

       


     지하철 풍경 하나

                                                                                                                                            이 웅 재

  양평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12시쯤 지하철을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곳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하철은 아니었다. 경의선 철도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 근교의 열차들은 통상 지하철로 간주하기에 나도 이를 따랐을 뿐이다.

  변두리 지역이라서 자리도 넉넉했지만 그래도 나는 젊은이들의 자리를 빼앗는 것 같아서 일부러 경로석을 찾아 한 사람이 앉아 있는 옆 자리에 앉았다. 열차는 한참 동안을 머물러 있었다. 조금 있으니 한 50대쯤 되었으려나, 한 사내가 열차에 탑승을 하는데, 몰골이 꾀죄죄한 것이 말이 아니었다. 어디 흙바닥에서나 뒹굴다가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공사장 인부들의 작업복 상의로 보이는 옷의 앞쪽 가슴께에는 붉은 색으로 된 원 안쪽으로 십자 표시가 되어 있고, 그 바깥으로는 사방으로 ‘안, 전, 제, 일’이라는 글자가 한 자씩 씌어져 있었는데, 그 붉은 색이 때에 절어 거무스레하게 보였다. 그는 높이 한 7cm쯤 되고, 가로 세로 40×25cm쯤 되는 위쪽이 터진 종이 박스와 검정 비닐 백 하나를 들고 타더니 내 앞쪽 경로석에 앉았다. 공사장 인부? 그런데 이 시간에 일은 하지 아니하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자리에 앉은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양 손을 꿈지럭꿈지럭 움직였다. 나와 내 옆 사람의 시선은 자연히 그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시선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종이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무척이나 느린 행동으로 검정 비닐 백에서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종이 박스에 담고 있었다. 왜 저러지? 비닐 백에 넣은 채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 훨씬 편할 터인데…. 박스에 담기는 물건을 보았더니, 이름 모를 드링크 종류의 캔이 세 개인가 되고, 매실액 같은 캔이 또 두 개, 그리고 우유팩으로 보이는 것도 두어 개가 되었다. 저걸 서울까지 가면서 하나씩 먹으려고 그러나? 궁금증이 일어서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물건들을 한 곳으로 몰아 정리해 놓더니 이번에는 생수병 두 개를 꺼내었다. 하나는 따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하나는 절반쯤 먹다가 남은 것이었다. 그것은 캔 종류와는 반대쪽에다가 올려놓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이지? 정말로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남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당사자는 다시 느릿느릿 신고 있던 후줄근한 등산화를 한 짝씩 힘들여 벗고 있었다. 그는 그 신발짝들을 떨어뜨릴 듯 떨어뜨릴 듯하면서 캔 종류를 꺼내던 예의 그 검정 비닐 백에 넣고 있었다. 신을 벗고 아예 좌석에 올라앉으려는 것일까, 그러면 그 옆에 앉는 승객이 불편할 텐데…, 하고 생각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등산화 두 짝을 담은 그 비닐 백을 생수병과 캔의 사이에 마치 경계를 표시하듯이 올려놓았다. 그는 그렇게 일련의 작업(?)을 마치더니 주머니에서 역시 때가 꾀죄죄한 공사장 인부들이 흔히 착용하는 작업용 장갑을 꺼내어서는 하나씩 손에다 끼기 시작했다. 그 동작도 보고 있는 사람이 답답해질 정도로 아주 느리고 또 느렸다. 신발은 벗고 장갑을 낀다?

  그때 열차의 공안이 지나가다가 그런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양말 차림의 그에게 무언가 한 마디 하려나 하고 생각했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공안은 다음 순간 무심히 지나쳐 버렸다. 가끔은 보아오던 모습이라서 그런 것일까? 어쨌든 내가 보기에는 공안은 직무 유기를 하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도 비상식적인 차림이요, 게다가 더러운 몰골 하며 승객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아무런 조치나 주의하는 말 한 마디도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다니….

  드디어 작업을 끝낸 그는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종이 박스를 두 손으로 잡더니 갑자기 그 앞쪽으로 엎어지는 것이었다. 잠시 우물우물 중심을 잡고서는 온 몸을 비비 꼬는 자세를 만들었다. 아니, 중심을 잡았다는 말은 적절하지가 않았다. 그의 몸은 한 쪽으로만 무척 쏠려있었다. 영락없이 신체가 매우 불편하여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장애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종이 박스를 앞세우고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하였다. 열차에 오를 때에는 멀쩡하게 걸어서 들어오던 사람이었는데…. 신발을 벗은 양말은 뒤쪽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뒤꿈치가 민망스럽게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아하, 그제야 감이 잡혔다. 그는 그렇게 완벽한 장면을 연출한 뒤, 힘겹게 힘겹게 앞으로 전진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사업(?)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종이 박스의 앞쪽에 놓여 있는 캔이며 팩은 상품인 듯싶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만 사 주세요.” 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멘트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의 몰골이며, 상품(?)의 상태를 보아서 그것을 사서 먹을 사람은 있을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그런 불필요한 일에 조그마한 힘도 쏟아 부을 생각부터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 물건들은 매우 형식적이며 면피용(?)으로 보이는 물건들일 뿐이었다. 그가 느릿느릿 움직여서 조금 이동을 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중년 남자 한 사람이 그의 종이 박스 위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놓아주었다. 드디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목소리는 매우 갸날프고 잦아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더욱 측은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다시 조금을 더 전진을 하니 어느 여학생이 역시 천 원짜리 한 장을 또 놓아주었다. 역시 그의 입에서 갈라지고 건조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고맙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같은 열차 칸에서 네 번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그는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남의 돈을 뭉텅이로 사기쳐 먹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상대방을 바보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나는 그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던져주지 못하며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두 눈을 감아버리고 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17.4.1. 15매)


4.1.지하철 풍경 하나.hwp
0.03MB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하철 풍경 세엣  (0) 2017.04.06
지하철 풍경 두울  (0) 2017.04.02
아파(牙婆)와 염상(鹽商)   (0) 2017.03.27
행복해지는 방법  (0) 2017.03.23
주꾸미열전  (0) 2017.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