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국내)

일체유심조

거북이3 2017. 4. 17.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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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체유심조

                                                                                                                                      이 웅 재

  뜻밖이었다. 부여에서 매월당(梅月堂)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부여라고 하면 막연하게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요, 백마강과 낙화암이 있는 곳으로만 여겼던 내 무식이 강펀치 한 방을 맞은 셈이다.

  부여의 옛 지명은 사비(泗泌) 또는 소부리(所扶里)로 ‘수읍(首邑)’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백제 제26대 성왕(聖王)은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고치면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백제의 왕성(王姓)이 부여 씨(夫餘氏)란 점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수도 이전의 대역사를 이해할 만하다. 단군조선이 해체되면서 세워져 만주 일대를 무대로 삼았던 부여국, 백제의 왕들은 그들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부여 씨라는 성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부여가 백제의 마지막 서울이었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을까? 3월 29일,그런 곳에서 매월당의 유허지를 만났으니, 낙화암에서 훨훨 날며 떨어진 수많은 궁녀들의 모습에 뒤엉겨, 세종대왕을 놀라게 했던 5세 천재가 이리저리 방랑생활을 하여야 했던 곤고한 모습이 오버 랩 되었다. 매월당이 만년에 몸을 의탁하였다가 병사한 곳, 그래서 이곳에는 설잠(雪岑: 매월당의 법호) 스님의 승탑(僧塔=浮屠,浮圖)과 영정(影幀)이 있는 곳이었다.

  그가 계유정난에서 느꼈던 심정은 백제의 멸망 시에 가졌던 백제인들의 심경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 당일치기 여행의 첫 방문지인 부여 만수산 무량사를 찾아든 느낌은 이러한 복합적인 생각으로부터 생겨나는 일종의 무상감이었다. 역사무상에 인생무상, 그리고 더하여 세월무상까지 합세하여 내 심정을 알싸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일주문에는 ‘萬壽山 無量寺’라 쓰인 편액이 있었다. 그런데 특이했다. 편액의 오른편 위쪽 부분에는 한반도 모양의 두인(頭印)이 있었는데, 일주문 뒤쪽에 쓰여 있는 ‘광명문(光明門)’, 그리고 다음번에 마주치게 되는 ‘천왕문(天王門)’의 편액에도 역시 같은 두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두인 안쪽에는 한자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써 넣은 글씨가 보였다. 그랬다. 만수산 무량사에서 느꼈던 무상감이라는 것도 결국은 ‘일체유심조’였다. 돌아나오는 길에서는 ‘공양간’ 앞쪽에 바로 ‘해우소’가 있어서 ‘먹고 싸는’ 일이야말로 인생사 중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요, 그래서 아주 가까운 곳에 함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도 ‘일체유심조’에서 나온 발상일 게다.

  세월은 무상하였지만, 산 사람은 먹어야 해서 차는 서천군의 홍원항(洪元港)으로 향하였다. 주꾸미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자장면은 ‘짜장면’으로 표기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주꾸미는 아직도 ‘쭈꾸미’로 써서는 안 된단다. 낙지와 함께 다리가 8개인 ‘문어과’에 속하는 놈인데, 다리가 10개로 변형이 되어야만 ‘쭈꾸미’ 표기가 인정될 수 있을까?

  울산의 대왕암엘 갔을 때였던가? 가이드가 음식물 축제를 하는 곳엔 가지를 말라고 하였었는데 그 말이 꼭 맞았다. 주꾸미볶음은 대, 중, 소 3가지가 있었는데 ‘소’를 시켰는데도 5만 원이었다. 좀 너무하다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지만, 집사람 눈치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역시 마누라 말은 들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또 깨우치게 될 줄이야…. 다른 일행 중에 가격표를 보고 얼른 돌아서서 나갔던 사람들이 조금 있다가 다시 우리가 앉아있는 음식점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실제로 먹어보니 밑반참도 깔끔했고 괜찮았다. 꼬물꼬물 살아있는 생물인데다가 큰 접시 2개에 푸짐하게 들어오는 주꾸미, 그래서 처음에는 한 사람마다 ‘소짜’ 하나씩을 주는 줄 알았다. 그러면 10만 원이란 말인데…. 우리가 걱정하는 소리를 옆 자리 손님들도 들었나 보다.

  “미리 확인하고 드세요!”

  걱정이 고마웠고, 그래서 확인했더니, 2개 다 드시란다. 그러면서 만 원짜리는 넘지 싶어 보이는 주꾸미무침 한 접시를 또 서비스한다.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였다.

  항구는 조그마했고 구경거리도 별로 없었다. 주차장에는 관광버스 몇 대가 보였다. 우리가 타고 온 것은 “아름여행사”, 그런데  “아름관광”은 또 무언가? 우리의 기사가 보이기에 물었다. 기사 왈,

  “아름관광은 사장님, 아름관광사는 사모님이 운영하시는 겁니다.”

  ‘아름’이란 ‘안음’의 활음조현상이니까, 그렇지, 서로가 ‘안음’의 관계였었구나. 두 관광회사가 서로 안고 안으면서 발전하는 ‘아름다운’ 회사로 발전하길 바라면서, 다음 관광지인 마량리(馬梁里) 동백나무 숲으로 향했다. 동백꽃 군락지로서는 북방한계선 쯤에 해당하는 곳이라는데 별로였다. 우리집 베란다에서 피는 동백꽃보다도 꽃이 잘고 화사하질 못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 ‘일체유심조’인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식물예술원에 들렀다. 입장료는 무료,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아주는 것은 ‘700년 묵은 모과나무 분재’란다. 매월당이 살았던 시대보다도 100여 년 이전부터 살아온 나무다. 다시 ‘무상감’이 피어올랐다. 게다가 여기서 본 분재 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풍년화’였다. 풍년화는 빨간색과 노란색 꽃을 피우는 2가지 종류가 있었다. 그런데 꽃말이 서로 달랐다. 빨간 꽃은 ‘사랑, 정성’, 노란 꽃은 ‘저주, 악령’이었다. ‘사랑’도 때에 따라서는 ‘저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역시 ‘일체유심조’였다.

  나는 그곳에서 조그마한 노란색 다육이 화분 2개를 샀다. ‘금염좌’와 ‘일월금’이다. 둘 다 ‘금’이란 말이 붙었다. 노란색이기 때문이다. 노란색 꽃은 ‘저주, 악령’? 그러나 나는 오불관언이었다. 왜? 모든 게 다 ‘일체유심조’일 뿐이니까. (17.4.17.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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